"으으음…!"
이회옥은 나지막한 침음성을 터뜨렸다. 무림천자성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미련과 정이 완전히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아침부터 내리는 비 때문인지 선무곡 외곽에 자리한 허름한 주청에는 대낮인데도 술추렴을 벌이는 사내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아홉 개의 탁자 중 빈 것은 하나뿐이다. 그 가운데 가장 귀퉁이에 있는 탁자에는 다소 꾀죄죄해 보이는 청년 둘이 있었다.
그들은 얼마나 굶었는지 알 수 없으나 가히 마파람(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경풍(景風), 마풍(麻風)이라고도 함)에 게눈 감추듯 그렇게 허겁지겁 소면을 먹어치우고는 배가 부른지 말 없이 앉아 있었다.
하긴 둘이서 무려 일곱 그릇이나 먹어버렸으니 배가 부르지 않으면 이상할 것이다. 배가 너무 나와 거동조차 곤란할 지경에 처한 것이다.
그들은 여기저기 기운 남루한 의복을 걸치고 있었으나 악취는 풍기지 않았기에 무사히 주청 안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물론 음식값을 지불할 충분한 은자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풀어헤쳐진 머리카락 때문에 용모를 살피기 쉽지 않은 그들은 바로 이회옥과 조연희였다.
선무분타를 빠져나온 둘은 지옥의 악귀나찰처럼 지겹게 추격하는 정의수호대원들의 추격을 간신히 따돌릴 수 있었다.
며칠 동안이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억수 같이 쏟아진 빗줄기 덕분이었다. 한숨을 돌린 그들은 즉각 선무곡을 벗어나려 하였다. 그래야 안전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가히 천라지망이라 불러도 좋을 그런 경계망이 펼쳐져 있었기에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정의수호대원들은 물론 선무곡의 제자들까지 총동원되어 곡 밖으로 나갈만한 모든 길목을 차단한 채 철저한 검문검색을 실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의수호대원들의 눈을 속일 수야 없지만 대다수 선무곡 제자들은 이회옥과 조연희의 용모를 모른다. 따라서 적당히 변복(變服)을 하고 어설프게라도 연극을 하면 빠져나갈 수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질풍과 노도가 문제였다. 놈들의 몸집이 보통 말보다 월등히 크기에 어디엘 가건 즉각 눈에 뜨였다.
선무곡에 이러한 명마들이 몇 마리라도 있다면 눈속임이라도 해볼 것이나 그럴 수조차 없었다. 한혈마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려 하여도 찾아 볼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들을 타고 다니면 금방 발각될 것이기에 쉽사리 도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풍과 노도를 타고 다닌 것은 말을 워낙 아끼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고심한 이회옥은 외딴 곳에 당도하자 질풍과 노도를 풀어주었다. 말도 중요하지만 조연희의 목숨이 더 중요하다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풀어 놔줘도 제가 알아서 선무분타로 되돌아 갈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그곳에는 허름한 초옥이 한 채 있었고, 늙은 약초꾼 하나가 살고 있었다. 평생 비단 옷이라고는 만져보지도 못했다는 그에게 이회옥은 걸치고 있던 비단 옷을 벗어주었다.
대신 허름한 마의(麻衣) 두 벌과 약초꾼들이 사용하는 망태, 그리고 약초를 캐러 갈 때 독사를 쫓기 위하여 들고 다니는 장대를 얻었다.
변복을 하고 머리를 풀어헤친 뒤 다른 약초꾼들처럼 새끼줄로 질끈 동여맨 뒤 망태기를 어깨에 걸머지자 영락없는 심마니의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쉽게 저잣거리로 나설 수 없었다. 혹시라도 누가 알아보면 큰 낭패를 당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곳에 나타난 것은 매 앞에 장사가 없고, 배고픔에는 애 어른이 없기 때문이었다.
지난 사흘을 내리 굶은 이회옥과 조연희는 설사 생포되는 한이 있더라도 음식을 먹어야겠다는 일념에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조금 전 선무곡 제자들이 자신과 조연희의 용모파기가 그려진 방을 들고 와 주청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갔다.
다행히도 그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남루한 의복과 손때 묻은 장대, 그리고 망태와 약초를 캘 때 쓰는 호미까지 완벽한 일습(一襲)을 갖추고 있었기에 속은 것이다.
이제 이곳은 당분간 안전할 것이다. 방금 둘러보고 나갔으니 금방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주청을 둘러본 불과 반각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중 그들의 예리한 눈초리를 접한 이회옥은 혹시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릴까 싶어 한참을 숨죽이고 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뛰는 듯 느껴졌던 것이다. 그것은 조연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음성이 가늘기에 입을 열면 금방 여인이라는 것이 밝혀지겠기에 당분간 벙어리 행세를 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회옥과는 형제지간인 것으로 하기로 하였다.
그런 그녀에게 선무곡 제자가 다가와 말을 시켰다. 긴장된 순간이었다. 이때 이회옥이 나서서 동생이 벙어리라고 말하자 선무곡 제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사실 선무곡 제자로서는 마땅치 않은 수색작전에 투입된 것이 불만스러웠다. 한참 마작을 즐기다가 불려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 며칠간 날씨가 지독하게 나빴기 때문이다.
하여 무림천자성에서 색출해내라는 자가 선무분타에서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나 일단 선무곡에 피해를 입힌 것은 아니기에 건성으로 수색한 것이다.
아무튼 숨막히는 긴장된 시간이 흐른 끝에 나온 소면은 그야말로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만큼 맛이 있었다. 그래서 듣기에 다소 추잡스러울 정도로 쩝쩝거리면서 먹었다.
그것은 비단 이회옥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웬만한 음식은 먹지 않고 오로지 이슬만 먹고사는 것처럼 굴던 조연희까지 게걸스럽게 먹었던 것이다.
하긴 내리 사흘 동안이나 쫄딱 굶으면서 노숙(露宿)을 하였으니 무엇인들 맛이 없었겠는가!
그 사흘 내내 추적추적 비가 내렸기에 괴로움은 더했었다.
배가 부르자 그제야 주위를 돌아볼 여유를 찾은 이회옥은 부른 배를 쓰다듬으면서 주객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선무곡을 벗어나기 위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그들의 화제는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무림의 추세였다. 물론 급박한 상황에 처한 주석교와 월빙보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다.
무림천자성의 성주 철룡화존 구부시는 무림 각파가 반대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반드시 악의 축인 월빙보를 공격할 것이라고 대내외적으로 천명한 바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무림이 시끄러운데 돌연 주석교에 대한 모든 지원을 끊었다. 월빙보를 손봐주고 난 이후 주석교가 다음 차례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암시하는 대목이었다.
주객들은 월빙보를 공격하는 것이 결코 옳지 않다 하였다. 월빙보가 세무각을 폭파시켰다고 의심되는 아부가문의 오사마를 도왔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무림을 상대로 도발하려 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불충분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꿰뚫고 있던 무림천자성 예하 순찰원 원주 오각수 도날두가 나서서 그럴 듯한 증거를 내놓았으나 월빙보에서는 사실무근이라면서 펄쩍 뛰었다. 제시된 증거가 모두 날조된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워낙 서슬 시퍼런 무림천자성의 태도 때문에 이 같은 목소리는 그냥 묻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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