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 잘 들 때는 보리도 벨 만하당께

<농번기와 영농 2>고난의 보리베기 그리고, 1976년

등록 2003.05.26 13:07수정 2003.05.26 17:52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보리밭. 보리밥. 보릿고개

보리밭. 보리밥. 보릿고개 ⓒ 김규환

논밭에 심어 둔 보리와 밀이 푸른빛을 잃어 무르익어 갔다. 춘파(春播)를 했던 봄 밭보리도 사나흘이면 충분히 익을 법하다. 그래도 밭보리는 콩을 심으면 되니 바쁠 것까지는 없다. '보리는 망종(芒種) 전에 베어야 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며칠 더 지나면 알맹이가 떨어지기도 하고 대가 약해져 쓰러지기도 하거니와 서두르지 않으면 2모작 모내기를 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남부지방은 동서(東西)를 막론하고 모내기 전 초여름에는 보리 베느라 바빴다. 영남지방은 겉보리, 호남지방은 쌀보리가 주였고 밀은 보리에 비해 양은 적었지만 한 때 자급을 했을 정도로 그 면적은 대단했다.

보릿고개를 넘기려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이모작. 이모작은 어른들 등골을 휘게 하고 아이들 학교 가는 걸 방해하고 키 크는 걸 막았던 무시무시한 존재다. 그리고 그 얼마나 까시락이 사람 환장(換腸)하게 하는가? 까시락이 온 몸에 부러져 들어와 콕콕 찔러대고 뙤약볕에 소금을 받아도 될 성싶게 찌는 더위는 목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끼게 한다.

'발등에 오줌 눌 정도로 일년 중 가장 바쁜 철'이 시작되는 망종이 다가오면 따라간 백구(白狗)라도 일을 좀 거들어 줬으면 하는 초비상 상태에 들어가는 건 한두 집만의 일이 아니다. 누구나 다 빈 땅에 보리를 심었기에 보리나 밀을 벤다고 놉을 얻을 수도 없는 처지니 남의 일 갈 형편이 못 되었다.

어떻게든 식구(食口)들 끼리 제때 해결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욕심부려 심은 보리가 발목을 잡고 일년 농사 그르칠 수도 있다. 그래도 쌀 농사 아니었던가? 남녀노소, 학생이라고 예외일 리 없다. 그나마 초등학교에 아이를 둔 부모의 경우 선생님께 막걸리나 몇 되 받아주고 친했다면 모를까 그런 사귐성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노동력을 몇 배나 더 들여야 했던 고난의 작업이다.

보리를 베러 가려면 미리 보릿단 묶는데 쓸 잘 보관해 둔 볏짚 몇 단을 챙겨두는 것으로 시작한다. 당일에는 토시를 양팔에 끼고 나일론 옷이나 아버지의 헤진 와이셔츠를 입어야 까시락을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으니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왜낫'(*1)을 날이 시퍼렇게 서도록 갈아 '숫돌'(*2)을 깔 망태에 넣고 집을 나선다.


어머니는 밥 '바구리'와 여러 반찬을 광주리에 담아서 머리에 이고 나온다. 보리 베는 날은 ‘겅개’(*2-1)가 형편없다. 달걀 찜 하나 추가되지 않는 반찬이라니! 가족끼리 먹는 것이니 평소 먹는 대로 대충 싸오면 되는 것이라지만, 먹는 게 늘 그러니 탓할 일은 아니지만 이래가지고 힘이나 쓸까 모르겠다.

아이 손에 들린 막걸리는 아버지 몫이다. 물이야 냇가에서 길러다 먹어도 될 정도로 맑으니 걱정 없다. 정 안되면 초등학교나 근처 옹달샘에서 떠오면 되니 따로 짐 되게 들고 갈 필요까지는 없었다.


a 조금 높은 밭두렁에 지금 막 필 때입니다. 메꽃 뿌리도 캐서 구워 먹는데 마처럼 두껍지도 않은데 맛은 괜찮았습니다.

조금 높은 밭두렁에 지금 막 필 때입니다. 메꽃 뿌리도 캐서 구워 먹는데 마처럼 두껍지도 않은데 맛은 괜찮았습니다. ⓒ 김규환

벌써 며칠 째 학교에서 보리를 베었기로 이골이 난 자식(子息)들은 몇 날이 될지 모르는 보리 베기를 어찌 해야할지 지레 겁부터 먹는다. 농번기 방학이 싫기까지 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발을 찍찍 끌어가며 돌부리에 넘어지지 않게 신작로를 걸어 논두렁 사이로 난 작은 길로 접어들었다.

물못자리에서는 얼른 모내기를 해달라고 키가 쑥쑥 자란 모가 아우성을 치고 있다. 벌써 1모작으로 심은 벼는 파릇파릇하다. 아직 덜 깬 이슬이 바짓가랑이를 적시기에도 충분하다. 메꽃도 몇 송이 피어 반겼다. 도랑을 건너니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몇 발짝 더 옮기자 개구리 한 마리가 깜짝 놀라 풀숲으로 풀쩍 뛰어 기어 들어간다. 이 놈은 모내기 끝내고 내 밥이 될 것이다.

오늘 베어야 할 논배미는 세 ‘배미’(*3)다. 세 ‘다랭이’(*4)라도 제법 넓은 면적이다. 총 900평에 가까우니 세‘마지기’(*5)가 넘는다. 이러니 새벽에 나설 수밖에 없다.

먼저 아버지께서 제일 아래 배미부터 낫질을 시작했다. 곧 어머니도 따라 하신다. 두 살 위인 3학년 형과 6학년 누이도 시작했다. 첫째형과 둘째형은 초등학교를 마치고 2~3년 씩 농사짓다가 서울로 돈벌이를 떠났으니 오늘은 다섯 사람이 베어야 한다. 막둥이 아들만 아직 덜 깬 눈을 비비며 ‘해찰’을 하고 있다. 한껏 노랗게 핀 고들빼기 꽃을 꺾는 척, 마렵지도 않은 오줌을 싸느라 바지춤을 내리고 한 쪽에 머뭇머뭇 비켜 서 있다. 아직 학교에 가지 않은 다섯 살 아래 막내 여동생은 큰 댁 할머니께 맡겨두고 왔다.

“막내야, 얼른 오니라~”
“알았당께요. 다 싸야 가제~”

낫을 잘 들게 갈았고 이슬이 아직 덜 깨고 보릿대가 푸른 기가 조금 남아 있어 제법 잘 베어진다.

“슥삭”
“쓱싹”
“쓱-”

벼 벨 때는 자신이 오른손잡이라면 물건을 잡는 왼손을 정면으로 하여 그냥 움켜쥔다. 주먹을 쥐듯 손을 모아 엄지와 검지가 하늘로 향하게 하여 주위 포기를 감싸기만 하면 되지만 보리는 쥐는 방법이 다르다. 즉, 왼손 팔목을 비틀 듯이 손바닥이 바깥으로 향하게 하여 반 다발쯤 되는 많은 분량을 온몸으로 끌어안는 방식이고 다리를 툭툭 차듯 밀어붙여 한 무더기 만드는 것이다.

처음 해 본 사람은 보리 베기가 더딜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얼마간의 반복적인 연습을 통하여 익숙해지고 낫만 잘 든다면 주위 사방 한 평은 너끈히 단번에 쭉쭉 긁어모으듯 잽싸게 베어 한 짐 눌러 놓은 듯 할 수도 있다.

또한 보리를 이렇게 베는 이유는 벼는 이삭을 가지런히 해야만 타작(打作)하는데 문제가 없지만 보리 타맥기(打麥機)는 검부적이든 보릿대든 밀어 넣으면 몽땅 먹어치워 자근자근 씹어 난도질을 하여 날려버리고 무거운 알곡만 바로 아래에 떨어지게 한다. 때문에 흙만 묻지 않게 잘라 분리하여 아무렇게나 놓아도 무방한 것이다.

a 1모작 했던 논은 조생종을 심기 때문에 보리베기 전에 하지만 면적은 2모작이 더 많았습니다. 꽃은 고들빼기가 맞을 겁니다.

1모작 했던 논은 조생종을 심기 때문에 보리베기 전에 하지만 면적은 2모작이 더 많았습니다. 꽃은 고들빼기가 맞을 겁니다. ⓒ 김규환

이슬이 깨고 해가 중천(中天)에 뜨면 밀짚모자로도 햇볕을 가리기 힘들다. 낫도 안 들 때가 되었다. 보리가 뿌리째 뽑혀 나오는 걸 보면 안다. 그 뿐인가? 보릿대도 푸석푸석 말라 손에 쥐기 힘겹게 자꾸 미끄러진다. 땀이 좔좔 흐르는데다가 까시락과 어울려 온 몸을 들쑤셔 대니 중간중간 가시 빼내는 일도 귀찮고 졸음까지 몰려온다. 그 때였다.

셋째형: “앗야!”
어머니: “왜 근다냐?”
셋째형: “손 벼부렀소~”
어머니: “많이 볐냐?”
셋째형: “아녀라우~”
아버지: “썩을 놈. 조심허지 않고...일하기 싫은가 보구만.”
어머니: “금순아 얼렁 가서 쑥 좀 뜯어 오니라.”
누나: “예~”

약은 아무 것도 챙기지 않았다. 아니 챙길 게 없었다. 낫으로 베었을 때는 쑥을 뜯어 돌에 올려 물기가 많이 나오지 않으면 침 한 방울이나 물을 똑 떨어뜨려 낫자루 꽁지로 콩콩 찧어 3분 여 손에 쥐고 있노라면 피가 이내 멈춘다. 혼자서 그런 일을 당하면 한 손으로 하던가 입에 넣어 쑥물이 나올 때까지 질겅질겅 씹어야 했으니 소태 맛 다음으로 입안이 쓰다. 이도 잠시 뿐 개의치 않고 또 베어나간다.

a 앞 뒤 색깔이 다르지요? 뒷 부분은 흰털이 많이 달려 있습니다. 봄에는 소가 쑥 먹고 힘을 냅니다. 손 벨 때 지사작용도 하고 사독하지 않게도 하는 귀중한 자원입니다. 더위 먹었을 때 끓여서 먹어도 좋지요.

앞 뒤 색깔이 다르지요? 뒷 부분은 흰털이 많이 달려 있습니다. 봄에는 소가 쑥 먹고 힘을 냅니다. 손 벨 때 지사작용도 하고 사독하지 않게도 하는 귀중한 자원입니다. 더위 먹었을 때 끓여서 먹어도 좋지요. ⓒ 김규환

손을 베거나 본의 아니게 속도를 늦추면 어른들이 밥 때가 된 걸 알아차리고 ‘새꺼리’(*6) 먹자고 하신다.

어머니: “금순아 물 질러(길러) 와라”
누나: “예, 저기 ‘깽번’(*7) 모탱이?”
어머니: “잉~ 그기. ‘핑’(*8) 댕겨 오니라.”
누나: “예”

보리 벤 자리에 밥을 차리니 보릿대를 깔고 앉으면 푹신하여 좋았다. 보리 벨 때 꽁보리밥이라? 방귀나 뿡뿡 뀌어대는데 좋은 보리밥에 시큼털털한 배추김치에 쉬어빠진 열무김치, 집 간장 넣고 무친 상추 겉절이에 김장 무김치 우려서 만든 채에 감자에 갈치 넣고 지진 게 다다. 아버지는 주위에서 마른 ‘검부적’(*9)을 모아 갈치를 데우셨다. 한 여름에도 식은 밥을 안 드시는 당신은 밥알을 세듯 깨잘깨잘 하신다.

들에 나가면 차리는데는 힘들어도 게 눈 감추듯 있는 것 한 숟가락 씩 넣고 둘둘 비비듯 먹고 물 한 사발 그릇 째 떠서 마시면 5분도 채 안 걸린다. 가장(家長)은 막걸리 큰 대접에 한 그릇 “쭈~욱” 마신다.

a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고향~" 그 땐 화려한 꽃이 적어서 붉게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찔구 꺾어 먹으려면 산 그늘로 들어가야겠네요.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고향~" 그 땐 화려한 꽃이 적어서 붉게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찔구 꺾어 먹으려면 산 그늘로 들어가야겠네요. ⓒ 김규환

담배 한 대 참을 쉬지 않고 배 꺼지기 전에 일을 다시 시작했다. 이러기를 두어 시간 더 하니 점심때가 훌쩍 넘었다. 아까 먹었던 밥 한 번 더 먹고 또 다시 베어나가니 새참 먹고 시작한 두 배미 째 논이 마저 끝나가겠다.

가장 자리 논두렁 근처에서 아무 말 않고 묵묵히 베어나가던 누나. 누나는 6학년이라 제법 철이 들어 선지 동생들을 챙겨가며 어른들 의중을 잘 읽는다. 산에 가서 고사리를 꺾어놓고 학교를 다니던 야무진 데가 있는 부지런한 사람이다.

누나: “아부지!”
누나: “비얌이요!.”
아버지: “뭐? 뱜이라고?”

같이 보리를 베던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라 일손을 일제히 놓았다. 급히 달려간 아버지는 낫을 길게 잡더니 뱀 대가리를 지그시 누르고 한 손으로 목덜미를 콱 움켜쥐었다.

“야~ 꽃뱀이구만. 가만 있어봐라. 이놈을 어디다 둔다냐? 거식아 지게에 가서 노끈 좀 갖과라.”

녹색 바탕에 선명한 붉은색 점을 찍은 화사(花蛇)가 아버지 손목을 휘감고 있다. 급히 달려가 노끈을 가져온 형이 도착하자 매듭을 지어 나뭇가지에 묶어놓고 일을 다시 시작했다.

네댓 시를 넘기자 쓰러질 지경이 되었다. 나이 가장 어린 나는 딴전을 피워댔다.

나: “엄마! 저 거시기 뭐시냐 심부름시킬 거 없어요? 점방에 갔다 올까?”
어머니: “아부지한테 여쭤 보그라”
나: “아부지! 점방에 뭐 두고 오신 것 없다요?”
아버지: “보리꼬실라 줄거나?”
나: “아니요 고게 아니고...”
아버지: “막걸리나 한 되 받아 오니라. 가서 뽀빠이도 세 봉 사와라.”
나: “돈은이라우?”
아버지: “헤기는 며칠 새 한다하고 아부지 앞으로 달아놓으시라 해라.”
나: “예~”

a 앵두를 먹지 않아도 입 안에 침이 고이는 건 왜일까요?

앵두를 먹지 않아도 입 안에 침이 고이는 건 왜일까요? ⓒ 김규환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낫 놔두고 가는 것도 잊은 채 학교 앞에 달랑 하나 있는 가게로 달려갔다. 짐을 들고 돌아와 보니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다. 잠시 앉아 쉬었다. 어머니는 물 밖에 안 드신다. 우린 막간을 이용하여 뽀빠이에 들어있는 별사탕 따먹기 놀이를 했다.

마저 일을 끝마칠 즈음 마땅히 숨을 곳을 찾지 못한 들쥐 새끼들이 한 곳에 다섯 마리나 있다. 그 붉은 ‘새앙쥐’는 그대로 두기로 했다. 어느덧 백아산 무등산 쪽으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 하루를 마감하자고 한다. 아버지는 소에게 줄 보리 한 다발을 묶으신다. 여럿이 달겨들어 주변에 있는 꼴을 한 깍지씩 베어서 바지게에 실었다. 소가 잘 먹어야 며칠 뒤 논 갈 때 힘을 쓸 수 있으니 사람보다 더 챙기신다.

내일도 ‘소쟁이’로 보리 베러 가야한다. 땀이 식고 찬바람이 부니 목덜미와 양팔이 쓰라리기 시작했다. 목욕하고 자려면 이 얼마나 또 귀찮은 일인가? 또랑에서 대강 씻고 앵두나 몇 개 따먹고 그냥 자야겠다. 고단한 하루도 이렇게 지나갔다.

a 밭보리는 늦게 갈아도 빨리 익습니다.

밭보리는 늦게 갈아도 빨리 익습니다. ⓒ 김규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이 기자의 최신기사 역시, 가을엔 추어탕이지

AD

AD

AD

인기기사

  1. 1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2. 2 "부영, 통 큰 기부로 이미지 마케팅... 뒤에선 서민 등쳐먹나" "부영, 통 큰 기부로 이미지 마케팅... 뒤에선 서민 등쳐먹나"
  3. 3 깜짝 등장한 김성태 측근, '대북송금' 위증 논란 깜짝 등장한 김성태 측근, '대북송금' 위증 논란
  4. 4 탐욕스러운 기업이 만든 비극... 괴물을 낳은 엄마 탐욕스러운 기업이 만든 비극... 괴물을 낳은 엄마
  5. 5 윤석열 정부에 저항하는 공직자들 윤석열 정부에 저항하는 공직자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