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소를 몰고 가듯이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81> 오마이뉴스와 함께 보낸 1년

등록 2003.05.29 12:56수정 2003.05.29 19:24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소를 몰고 논 갈러 나가시던 우리 아버지

소를 몰고 논 갈러 나가시던 우리 아버지 ⓒ 이종찬

나는 그에게
목소리만 들어도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내게
생각만 하여도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만났습니다 만나서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마지막 사람이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내게
내일이라도 예쁘고 착한 사람이 생기면
기쁜 마음으로 떠나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아니 아니 그럴 리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목소리를 듣게 되고
생각도 하게 되고
만남도 가져 봅니다


(이선관 '목소리만 들어도 좋은 사람' 모두)

"그렇찮아도 <오마이뉴스>에서 자네 기사 잘 읽고 있어. 그동안 기사를 정말 많이 썼더만. 그래. 요즈음 어때?"
"그저 그렇게 삽니다."
"그럼 아직도 절간에 그대로 있는 거야?"
"네. 목구녕이 포도청인지라…."
"그래. 그래도 자네는 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이야. 근데 기사도 좋지만 시도 좀 써. 시인이 시를 쓰지 않으면 어쩌겠다는 거야."

지난 토요일, 안산에 계시는 시인 김명수 선생님에게 안부전화를 걸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선생님의 목소리는 몹시 밝았다. 문득 이선관 시인의 "목소리만 들어도 좋은 사람"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그래. 김명수 선생님은 목소리만 들어도 좋은 사람, 아니 목소리만 들어도 좋은 그런 선생님이다.

나와 김명수 선생님과의 인연은 지금으로부터 15년 남짓하게 거슬러 올라간다. 1997년 9월 17일, 6월항쟁의 빛나는 승리에 힘입어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민족문학작가회의'로 확대 개편되었다. 그즈음, 그러니까 작가회의 창립을 코 앞에 둔 그해 8월에 나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실에서 김명수 선생님을 처음 만났다.

당시 김명수 선생님은 마포구 아현동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던 민족문학가회의 초대 사무국장이었다. 그날 처음 만난 김명수 선생님의 모습은 때 한점 묻을 것 같지 않은 올곧은 선비, 그 자체였다. 그래. 그러면 내일부터 같이 일을 한번 해보자, 라는 선생님의 첫 말씀은 당시 내 속내를 훤하게 궤뚫고 있는 듯했다.


그래. 지난 해 5월 18일, 내가 첫 기사를 올렸던 <오마이뉴스>와의 첫 인연도 그랬다. 당시 <오마이뉴스>는 글쓰기에 목말라 있었던 내게 병따개를 따면 쏴아, 하고 거품이 피어오르는 시원한 사이다와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날부터 하루에 기사 한꼭지를 반드시 올리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나의 기사쓰기는 하루 업무가 끝나는 오후 6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업무 도중에 틈틈히 짬을 내어 기사를 다시 한번 검토한 뒤, 기사를 올렸다. 간혹 나름대로 급한 기사라고 생각되면 업무 도중에 기사를 쓰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기사를 올리고 나면 나는 마치 시험을 치른 아이처럼 가만히 앉아서 기다려야만 했다.


생나무를 거쳐 잉걸, 그리고 다시 메인 서브면에 내 기사가 떠오를 때까지 그렇게 초조하게 기다렸다. 하지만 기사가 좀처럼 메인 서브면에 떠오르지 않았다. 대부분 잉걸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래도 좋았다. 일단 내가 매일 같이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 나는 만족했다.

날이 갈수록 나는 서서히 <오마이뉴스>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해가 안 가는 때도 많았다. 스스로 판단하기에는 이 기사가 분명 메인 서브면이나 아니면 메인 탑으로 올라갈 만한 기사라고 생각하는 데도 이상하게 잉걸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기사는 생나무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때도 있었다. 생나무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던 기사는 대부분 내 탓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쓴 소설이나 동화를 필명으로 올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생나무에 그대로 머물고 있었던 기사는 어떤 사실을 80% 이상 그대로 인용한 경우였다.

메인 서브면에 오르지 못하고 잉걸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기사도 마찬가지다. 그런 경우에는 대부분 한꺼번에 기사를 2~3개씩 올렸을 때 주로 그러했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그렇지 않은 때도 있었다. 그래. 어떻게 쓰는 기사마다 약속이라도 한듯이 메인 서브면에 채택될 수가 있겠는가.

"아니, 그 기사가 왜 메인 서브에 오르지 않고 잉걸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 내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편집국에서 그 기사를 그리 중요한 뉴스가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이지요. 또 편집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들 판단하고 다를 수도 있겠지요."

지난 5월 17일은 내가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쓴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날 나는 1년 동안 내가 쓴 기사를 대충 훑어보았다. 모두 319건이었다. 319건? 나도 놀랐다. 그동안 국경일과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반드시 하루에 1꼭지씩 기사를 올린다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정말 충실하게 지킨 것이었다.

가만, 1년이 365일이지? 그러면 1년 중 일요일이 대략 50여일이라 치고, 게다가 국경일까지 합치면? 히야. 나와의 약속을 지킨 것뿐만 아니라 아예 목표를 초과 달성한 것이 아닌가. 지난 1년 동안 정말 열심히도 썼구나. 근데 왜 그렇게 열심히 달려왔지? 원고료 때문에? 아니면 기사를 책으로 묶기 위해서?

그랬다. 매일 같이 조금씩 원고료가 늘어나는 것도 제법 보람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쓴 기사를 잡지사, 지역신문사, 사보 등에서 재수록을 해도 되겠느냐는 반가운 소식도 많이 들어왔었다. 사는 이야기와 여행 기사를 한 권의 책으로 묶자는 출판사의 제의도 있었다. 그동안 저만치 남겨 두었던 반가운 사람에게서도 격려 전화가 오기도 했다.

나는 지난 1년 동안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쓰면서 내 자신을 차분히 되돌아 볼 수가 있었다. 또한 용돈도 예전보다 궁하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올 초에는 12월의 뉴스게릴라로 선정되기도 했고, 지난 4월부터는 <오마이뉴스> 기자클럽에 참가할 수도 있었다. 그로 인해 나는 이제 <오마이뉴스>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그런 관계가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기쁜 일은 내 스스로 열심히 기사를 쓴 결과, 이제 나도 당당히 오마이뉴스의 짭짤한 소금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고료도 이제 용돈으로 생각하기에는 조금 많은, 제법 상당한(?) 금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밖에 나가면 <오마이뉴스> 기자라는 이름이 닉네임처럼 따라붙었다.

그래. 지금부터 다시 시작이다. 지난 1년 동안의 기사쓰기가 내 스스로의 길찾기였다면 지금부터는 찾아낸 그 길을 열심히 걸어가는 일만이 남았다. 그래. 더 빠르고 정확한 기사 쓰기, 어떤 사실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파고 들고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보기, 독자가 읽으면 저절로 빨려드는 그런 문체 쓰기, 새로운 뉴스 찾아내기 등.

내가 걸어가야 할 그 길 위에는 수많은 가시밭길과 곳곳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나는 가시에 찔리고, 함정에 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게 주어진 그 길을 걸어갈 것이다. 아버지가 소를 몰고 논으로 가듯이 그렇게 열심히 걸어가면서, 내게 주어진 그 길 위에 값진 땀방울을 흘릴 것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4. 4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5. 5 "윤 정권 퇴진" 강우일 황석영 등 1500명 시국선언... 언론재단, 돌연 대관 취소 "윤 정권 퇴진" 강우일 황석영 등 1500명 시국선언... 언론재단, 돌연 대관 취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