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캉 내캉 신랑 각시 해뿌자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82>딸기

등록 2003.06.02 16:59수정 2003.06.02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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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넝쿨 속에 보석 같이 빨간 열매를 빛내는 줄딸기

넝쿨 속에 보석 같이 빨간 열매를 빛내는 줄딸기 ⓒ 이종찬

"아빠! 조심해. 뱀한테 물릴라."
"그래, 고마워. 아빠가 잘 익은 딸기 많이 따줄게."
"아빠! 나 딸기 안 먹어도 돼. 그냥 내려와."
"조금만 더 따고."


비음산 계곡 곳곳에는 온통 줄딸기가 밭을 이루고 있다. 파랗게 어우러진 넝쿨 속에서는 줄딸기가 어서 날 따가주, 라는 듯이 빠알간 얼굴을 여기저기 내밀고 있다. 하지만 탐스럽게 잘 익은 줄딸기를 빤히 바라보면서도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다. 줄딸기밭에는 독사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날, 작은딸 빛나는 줄딸기 넝쿨속으로 한발짝 한발짝 발자국을 옮겨놓는 내가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래. 등산화도 아닌, 구두를 신고 줄딸기 넝쿨 속에 무작정 손을 집어넣어 빠알간 줄딸기를 따는 엉거주춤한 내 모습이 빛나에게는 불안하게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어릴 적 이 비음산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닌 내가 아닌가. 겨울철에는 나무 한짐을 하기 위해, 봄이 다가오면 칡을 캐기 위해, 그리고 이맘 때가 되면 줄딸기나 산딸기를 따기 위해, 가을에는 밤과 머루, 으름, 다래를 따기 위해 이 산에서 살다시피 하지 않았던가.

그래. 내가 어릴 때 이 계곡에는 독사가 많았었지. 그래서 우리들은 지게작대기로 풀숲 여기저기를 휘적이며 독사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을 한 다음 탐스럽게 잘 익은 줄딸기를 혓바닥이 검붉게 물들 때까지 따먹었고. 그리고 줄딸기밭뿐만 아니라 풀숲에 들어갈 때는 휘파람을 불지 못하게 했었지.

왜? 휘파람 소리를 내면 뱀들이 몰려온다고. 그래. 그때 우리는 풀숲에서 뱀이 우는 소리도 많이 들었어. 뱀이 우는 소리는 마치 찌르레기 우는 소리와 비슷했지. 하지만 우리는 찌르르르 찌르르르 하고 우는 그 소리가 찌르레기 소리인지 뱀이 우는 소리인지 금방 구분을 할 수가 있었어.


그래. 줄딸기를 따다가 독사에 물린 친구도 있었지. 그때 우리들의 응급처치는 이랬어. 우선 다 헤져 입지 못하는 옷을 찢어 만든 노끈으로 그 친구의 허벅지를 피가 통하지 못하도록 꽁꽁 묶었지. 그리고 입속에 상처가 없는 친구가 독사에게 물린 그 친구의 발목에 입을 대고 시커먼 피를 몇 번씩이나 빨아냈어.

"아빠! 그만 내려와."
"응, 그래. 다 땄어."
"우와! 이렇게 많이 땄어? 그냥 먹어도 돼?"
"그럼. 어때? 달착지근하고 맛있지?"
"응. 근데 아빠는 왜 안 먹어?"
"아빠는 조금 전에 많이 따먹었어."
"거짓말. 자! 아빠도 어서 먹어."


그래. 그때 우리 마을에는 의원이 없었지. 의원이라고는 우리 마을 바로 아래, 그러니까 4일마다 상남시장이 서는 그곳에 꼭 한 곳이 있었어. 차의원. 당시 상남면에서 유일하게 있었던 그 차의원은 지금의 종합병원과 같은 역할을 했었지. 당시 이 지역 사람들이 몸이 아파 참다참다 못 참으면 달려가는 곳이 차의원이었으니까.

그 친구도 결국 부모님의 호된 꾸지람을 들으며 차의원에게 맡겨졌지. 그리고 그날 밤 마을이 떠나가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그 다음 날 아침에 온몸이 퉁퉁 부어 학교마저도 결석했어. 그때부터 우리들은 물뱀이든 능구렁이든 독사든 간에 뱀이 눈에 띄었다 하면 짱돌이나 지게작대기로 뱀을 마구 짓이겨놓곤 했었지.

"바로 눕히나라(눕혀라). 죽은 비암을 뒤집어 놓으모 큰비가 온다 카더라."
"그라지 말고 땅에 묻어뿌자. 징그럽다 아이가."
"아이다. 이래 놔야 다른 비암들이 겁을 묵고 사람을 보모 도망갈끼 아이가."
"배도 고푼데 고마 구워 묵어뿌까?"
"비암을 구워 묵으모 몸에 이가 많이 생긴다 카더라."

a 아직 파란 열매를 매달고 있는 산딸기

아직 파란 열매를 매달고 있는 산딸기 ⓒ 이종찬

이야기가 너무 엉뚱한 곳으로 흘렀나. 각설하고. 당시 우리들이 따먹은 딸기는 주로 세 종류였다. 줄딸기, 그리고 우리들이 들딸기라고 부르는 딸기(정확한 이름은 아직도 모른다)와 산딸기였다. 그 중 가장 먼저 익는 딸기가 줄딸기였다. 줄딸기는 봄이면 보랏빛꽃이 피면서 넝쿨처럼 긴 줄기가 나왔다. 그리고 그 줄기에는 작은 가시가 수없이 붙어 있었다.

우리들이 들딸기라고 부르는 그 딸기도 작은 가시가 촘촘히 달린 넝쿨을 길게 뻗쳤다. 그리고 줄딸기처럼 보라색 꽃을 피웠다. 하지만 꽃 모양이 달랐다. 들딸기(?)는 주로 들판 근처나 냇가 둑에 많았다. 들딸기는 보기에는 참으로 먹음직스럽게 생겼지만 빠알간 딸기 속에 모래알과 같은 씨앗이 많이 들어있어 먹기에 조금 불편했다.

산딸기는 하얀 꽃을 피웠다. 하지만 줄딸기나 들딸기와는 조금 달랐다. 산딸기는 다년생 풀이 아니라 일종의 나무였다. 또한 산딸기는 줄딸기가 빨갛게 익어갈 때 파란 열매가 달렸다. 그리고 줄딸기가 사라질 때 쯤이면 빨갛게 익어가기 시작했다. 딸기맛도 줄딸기나 들딸기보다 훨씬 더 맛이 있었다.

"아나!"
"오메! 뺄간(빨간) 이기 뭐꼬. 혹시 뱀딸기 아이가."
"가시나 그것도 참. 내가 니한테 뱀딸기로 따 주것나."
"그 머스마 그것도 참. 그냥 해 본 소리다 아이가."
"누가 볼라. 퍼뜩 묵어라."
"누가 보모 우때서(어때서). 그라고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우리 이 참에 딴딴하게(단단하게) 약속해뿌자."
"뭐로?"
"이 다음에 커서 니캉 내캉 신랑 각시 해뿌자."
"......"

그래. 해마다 이맘 때면 빠알간 줄딸기처럼 입술이 빨갛던 그 가시나가 생각난다. 내가 주는 빠알간 줄딸기를 입에 넣으며 눈웃음 툭툭 던지던 그 가시나. 그 가시나도 지금쯤 그 빠알간 줄딸기를 먹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있을까. 아니면 그 가시나 꿈처럼 부잣집에 시집 가서 이런 가난한 추억 하나 쯤은 깡그리 잊어버린 채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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