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조상의 발자취를 쉬 찾을 수 있으랴

항일유적답사기 (36) - 소과전자촌

등록 2003.06.11 10:00수정 2003.06.11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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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이 운명한 소과전자촌, 70년만에 후손이 족적을 더듬었으나 쉬 찾을 수 없었다. ⓒ 박도

서란(舒蘭)으로 가는 길

7시 정각, 우리 일행을 태운 승용차는 장춘 시가지를 벗어나 길림(吉林)으로 가는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이 도로는 개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쾌적한 아스팔트 도로였다. 도로 위 금세 그어놓은 차선에는 페인트가 묻어날 듯 산뜻했다. 왕빙은 새 고속도로에 신이 나는양, 가속 페달을 마구 밟았다. 속도계는 120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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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지평선에 펼쳐진 옥수수밭 ⓒ 박도

막 솟아오른 아침 햇살 사이로 지평선이 끝없이 펼쳐졌다. 도로 언저리가 온통 옥수수 밭이요, 벼논이었다. 한 시간 30여분을 달리자 길림시 톨게이트가 나왔다. 왕빙은 요금 내는 곳에서 일단 정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통과했다. 군인 신분의 특권의식을 마구 발휘했다.

그가 어찌나 성급했던지 차단목도 올리기 전에 차가 통과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앞 차창에 손상이 갈 뻔했다. 나는 뒷좌석에서 김 선생에게 좀 천천히 달리게 주의를 주라고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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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 톨게이트 ⓒ 박도

“이 친구들 우리말 잘 듣겠어요? 요즘 내 집 아이들도 아비 말을 잘 안 듣는 세상에, 제 상관이면 몰라도 이국 사람의 말은 듣겠느냐?”하면서 “이 친구가 이렇게 달려주지 않으면 오늘 일정을 다 답사할 수 없다”고 김 선생은 오히려 왕빙이 시원스럽게 달려준 걸 고마워했다.

우리가 탄 승용차 번호 판이 군용에, 현역 군인이 운전하는 차라서 통행료를 낼 필요도, 경찰들의 검문도 전혀 없었다. 왕빙은 길을 잘못 들면 아무 데서나 후진하거나 회전하였다.

이런 자질구레한 시간을 절약할 수 있기에 짧은 답사기간이나마 여러 지역의 유적지와 도시를 둘러볼 수 있었다. 하지만 길을 달리면서 여러 번 목격한 바, 이곳에서도 과속으로 뒤집힌 차, 중앙선 침범으로 서로 충돌해서 사고를 낸 차가 많았다. 그런데도 모두들 나만은 예외라고 교통 법규를 위반한 채, 달리고 달린다. 지구촌 곳곳이 문명병을 몹시 앓고 있었다.

8시 40분, 길림시를 가로질렀다. 시내 한복판 공장에 있는 큰 굴뚝에서는 매연을 무지막지하게 내뿜었다. 굴뚝도 하나가 아닌 셋으로, 제철소의 거대한 굴뚝이었다. 그 매연으로 길림시 온 도시가 희뿌옇게 흐렸다. 중국은 지금 한창 개발도상국으로, 경제 제일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아직은 환경공해 문제에는 무딘 모양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생긴 매연이 중국대륙뿐 아니라, 계절풍을 타고 한반도와 일본열도, 미주대륙까지 미친다니 공해문제는 전세계적인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길림 시가지를 벗어나자 네거리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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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길흥 조선족 밥집 간판 ⓒ 박도

마침 조반 전이라 시장하던 참에 ‘경주 길흥 술집〔吉興朝族飯店〕’이란 간판이 눈에 띄었다. 서란으로 가는 길도 확인할 겸, 그 밥집에 들어섰다.

밥집 아가씨는 우리 일행이 첫 손님인지 우리말로 무척이나 반겼다. 내가 아가씨에게 경주에 가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한국 땅을 밟아본 적도 없다고 하면서 할아버지 고향이 경주인데, 할아버지는 벌써 돌아가셨다고 했다.

밥반찬이 나왔다. 깻잎·멸치볶음·겉절이·땅콩조림 따위로 낯익은 반찬이었다. 출국 후 오랜만에 제대로 된 한식 음식을 맛보았다. 한식 반찬으로 밥을 먹자 입맛이 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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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으로 가는 길 옆의 시원한 수양버드나무 가로수 ⓒ 박도

아침밥을 맛있게 먹고 지도를 펼치고서 갈 여정을 점검했다. 넓디넓은 만주 지역에 지도를 보고 찾아가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비교적 자세하다는 길림성 지도는 축적이 팔십만 분의 일이라서 소과전자와 같은 작은 마을은 지도상에는 나오지도 않았다. 김 선생과 왕빙은 밥집 주인에게, 이웃 가게 주인에게 물어서 길을 확인하고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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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으나 넓은 만주 땅에서 항일 유적지를 찾는 일은 솔밭에서 바늘 찾기처럼 어렵다. 지도를 펴들고 소과전자촌을 찾기 위해 현지 촌민들에게 길을 묻는 김중생 선생 ⓒ 박도

서란으로 가는 길은 이차선 아스팔트길로 도로 양옆에는 한 아름이 넘는 수양버드나무 가로수가 늘어져 있었다.

어떻게나 나뭇가지가 우거져 늘어졌는지 도로에서 하늘만 빠끔히 보일 뿐이었다. 무척이나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도로였다.

서란으로 가는 중간에 마을이 나오면 이따금 차를 세우고 길을 확인했다. 그때마다 나는 차에서 내려 그곳 풍물을 카메라에 부지런히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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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의 나그네를 수줍게 맞는 나귀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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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장수 두 호로(胡老) ⓒ 박도

어느 마을에서는 동네에 무슨 경사스러운 일이라도 있는 듯, 마을 주민이 모여 중국 고유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와 춤을 즐기기도 했으며, 어느 촌가의 길옆에는 나귀 두 필이 가로수에 묶인 채 이방의 나그네를 수줍게 맞았다.

길림을 떠난 지 한 시간만에 서란에 이르렀고, 다시 오상(五常)으로 가는 길로 달렸다. 도중 길가에 예순은 족히 넘었을 두 노인이 복숭아를 비닐봉지에 담아 팔고 있었다.

그분들에게 길을 묻자 소과전자촌을 자세하게 가르쳐 주었다.

소과전자촌

10시 30분, 여러 차례 길을 물은 끝에 마침내 소과전자촌에 이르렀다. 1932년 5월 12일에 석주 선생이 운명하시고, 남은 가족들이 그 해에 이곳을 떠나 귀국하였으니, 이 선생은 유족으로 67년만에 처음으로 찾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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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과촌 표지석, 답사 기행 중 가장 반가운 것은 지명이 쓰인 표지석이다. ⓒ 박도

이 선생은 감개가 무량한 듯, 석주 선생 손부요, 당신 어머니 허은(許銀) 여사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를 펴 들고 당신 조상 발자취를 확인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그 새 70년 세월이 지났으니, 어찌 그 발자취를 쉬 찾을 수 있으랴.

이 마을 집들은 여느 마을과는 달리 그 새 모두 새로 단장되고 골목길도 반듯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마을 주민에게 조선족이 사느냐고 물었더니, 오래 전에는 살았지만, 지금은 한 사람도 살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를 증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가 계셔서 동행했더라면…….” 이 선생은 혼잣말처럼 되뇌며 눈시울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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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은 여사의 수기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 소리가>를 펴들고 어머니의 족적을 더듬는 이항증 선생, 다행히 어머니가 물을 긷던 지난날의 우물터는 찾았다. ⓒ 박도

어머니 생존 때에는 한중 국교가 정상화되기 전이고, 그 후 국교가 정상화 된 후로는 노령으로,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서 만주 방문을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었다고 했다.

자나깨나 그리던 만주 땅 ― 경황 중이라 친정 부모님에게는 작별 인사조차도 남기지 못하고 훌쩍 떠난 그곳을 당신 생전에는 끝내 밟지 못하고 어머니 허은 여사는 1997년 눈을 감았다.

다행히 골목길 가장자리에 당신 어머니 발길이 무수히 닿았을 우물터가 아직도 폐허로 남아 있어서 이 선생은 그 언저리를 맴돌면서 어머니를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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