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청룡무관에 있을 때에는 하루에 적어도 두 시진 이상 독서를 하였고, 선무분타에 부임한 이후에도 시간만 나면 서책을 들여다보며 살았었다.
심지어는 금강암 유람을 갔을 때에도 오십여 권에 달하는 서책을 담은 묵직한 서궤를 등에 지고 갔었다.
서책을 읽으면 심심함이 없고, 모르는 것을 새롭게 알게되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삼국지(三國誌) 위서(僞書) 왕숙전(王肅傳)의 주(注)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후한 헌제 때 동우(董遇)라는 학자가 있었다.
그는 유달리 학문하기를 좋아하여 어느 곳을 가든지 항상 책을 곁에 끼고 다니면서[手不釋卷] 공부를 하였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어느새 헌제의 귀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헌제 역시 학문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동우의 학자다운 면모에 반하여 그를 황문시랑(黃門侍郞)으로 임명하고 경서를 가르치도록 하였다.
동우의 명성이 서서히 알려지면서, 세간에는 그의 제자가 되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고 해서 아무나 제자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먼저 책을 백 번 읽어라. 백 번 읽으면 그 의미를 저절로 알게 된다[讀書百遍意自現]."
이 말을 이해하면서도 어떤 이는 볼멘소리를 했다.
"책을 백 번이나 읽을 만한 여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자 동우는 이렇게 말했다.
"세 가지 여분을 갖고 읽어라."
"세 가지 여분이라니요? 그것이 무엇인지요?"
"겨울과 밤, 그리고 비 오는 때를 말한다. 겨울은 한 해의 여분이고, 밤을 한 날의 여분이며, 비 오는 때는 한 때의 여분이다. 그러니 이 여분을 이용하여 학문에 정진하면 된다."
이회옥이 마땅한 스승도 없으면서도 어렵지 않게 지식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동우가 말한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意自現)이 그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려운 내용의 글이라도 반복해서 읽다보면 정확한지는 알 수 없으나 나름대로의 깨우침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접해보지 못한 서책을 보면 이회옥은 눈빛을 빛냈다.
그것은 목마른 사람이 시원한 물을 갈구하는 눈빛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단순히 서책을 소장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내용을 깨우치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이 순간 이회옥의 눈빛은 반짝이고 있었다.
한참 후 그가 다른 석실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입안 가득히 물고 있던 벽곡단으로 인한 심한 갈증 때문이었다.
"흠! 물이 있어 다행이군."
찰랑대는 작은 샘으로 갈증을 면한 이회옥은 다른 석실을 열어보았다. 그곳에는 평범한 침상이 있을 뿐이었다.
나머지 석실 모두를 둘러본 결과 연공관에는 몇 권인지 알 수 없는 서책과 수백여 종에 달하는 병장기들, 그리고 벽곡단을 담아 놓은 단지들과 마셔도 마셔도 줄지 않는 옹달샘, 그리고 피곤한 몸을 뉘일 수 있는 침상이 전부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혹시 석탁을 누르지 않고도 나갈 수 있는 기관 같은 것이 있는 가를 살펴보기 위하여 만 하루 동안 벽과 바닥을 더듬어보았다. 하지만 토목기관술에 능하지 못한 그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나갈 방법은 하나뿐이다.
연공관 안에서 어떻게든 석탁을 눌러 상판이 바닥에 닿게 만드는 방법을 찾는 것이 그것이다.
"방법은 여기 있는 서가에서 찾아야 해. 어휴! 언제 이 많은 것들을 살펴보지? 젠장! 미치고 환장하겠구먼…"
이회옥은 수없이 많은 서책들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서가에 꼽혀 있는 서책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를 알아보려면 일일이 뽑아보지 않으면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제기랄! 방법이 없지. 어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방법이 없던 이회옥을 가장 가까이 있는 서가에 있던 서책을 뽑아 들었다. 그것은 장자(莊子)였는데 청룡무관에 있을 때 보았던 것인지라 곧바로 꽂아 넣었다.
다음에 뽑아든 것은 고문진보(古文眞寶)였다. 이것은 주(周)나라 때부터 송(宋)나라 때에 이르는 고시(古詩), 고문(古文)의 주옥편(珠玉篇)을 모아 엮은 책이다. 황견(黃堅)이 편저했는데 이것은 전집(前集)과 후집(後集)으로 나뉘어 있다.
모두 십 권으로 이루어진 전집에는 권학문(勸學文), 오언고풍단편(五言古風短篇), 오언고풍장편, 칠언단편(七言短篇), 칠언장편, 장단구(長短句)와 가(歌), 행(行), 음(吟), 인(引), 곡(曲) 등 십 체(體) 이백십칠 편의 시가 실려 있다.
후집 역시 십 권으로 되어 있는데 사(辭), 부(賦), 설(說), 해(解), 서(序), 기(記), 잠(箴), 명(銘), 문(文), 송(頌), 전(傳), 비(碑), 변(辯), 표(表), 원(原), 논(論), 서(書) 등 십칠 체 육십칠 편의 문장이 수록되어 있다.
학문을 익히려는 서생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보아야 할 주옥과 같은 문장의 집합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닌 서책이었다.
선 채로 이것을 훑어보던 이회옥은 몇 차례나 고개를 끄덕였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인 명문장을 보았을 때였다.
다음에 뽑아든 두툼한 서책은 산서성(山西省) 여릉(廬陵) 사람인 호해산인(湖海散人) 나본(羅本)이 저술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라는 서책이었다.
처음 몇 장을 넘겨보던 이회옥은 그것을 들고 침상으로 향하였다. 서서 읽기엔 너무 두터운 서책이었고, 내용 또한 흥미진진하였기 때문이었다.
나관중(羅貫中)이라고 불린 나본은 시내암(施耐庵)과 수호지(水滸誌)를 공저하였고, 수당연의(隋唐演義), 잔당오대사연의(殘唐五代史演義), 평요전(平妖傳) 등을 저술한 사람이다. 이외에도 조태조용호풍운회(趙太祖龍虎風雲會) 등을 저술하였다.
자신이 왜 다물 연공관에 있는지도 까맣게 잊은 채 삼국지연의를 모두 독파하느라 걸린 시간은 꼬박 열흘이었다.
그만큼 재미있었던 것이다.
문득 정신을 차린 이회옥은 다시 서가를 뒤졌다.
혹시 무공 비급이나 기관을 열 수 있는 기관토목술에 대한 서책이 있는가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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