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의 개과천선에는 이유가 있었다

부끄러움과 구원

등록 2003.06.15 09:27수정 2003.06.20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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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시내 서점에 들렸다가 산책 삼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한 제자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반가움에 와락 손을 붙잡고 오랫동안 놓아주지 않은 것은 제가 아니라 그 제자였습니다.

저를 바라보는 눈빛 또한 강렬하여 그 옛날 제가 그를 바라보던 간절한 눈빛을 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철이 들고 어른이 된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그는 잡았던 손을 푸는가 싶더니 저를 힘있게 껴안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6년 전, 그는 5교시만 끝나면 어김없이 학교를 무단 이탈하는 이른바 문제아였습니다. 그가 만약 심리적인 장애를 겪고 있었다면 부적응아라는 말이 더 정확할 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교사로서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하여 그를 지도해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땡볕에 얼굴이 익을 정도로 함께 운동장을 돌아보기도 하고, 도망간 아이를 다시 붙잡아와 교정이 깜깜해질 때까지 계단에 앉아 얘기를 나누다가 밤하늘의 별을 보며 헤어진 날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날도 그는 5교시가 끝나자 예외 없이 학교를 빠져나갔습니다. 다음날 조회 시간에 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그에게 내린 최종 처방은 일종의 '홀로서기'였습니다. 저는 그에게 보름 동안(그 기간이 열흘인지 보름인지 확실치 않았는데 제자가 보름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의 시간을 주었고, 그 기간 동안 어떤 행동을 해도 벌을 주거나 간섭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후 그의 담임교사로서 제가 한 일은 매일 아침 그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한 뒤, 앞으로 보름이 되려면 며칠이 남았는지 앵무새처럼 반복해서 말해준 것뿐이었습니다.

거기에 자신 말고는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으니 부디 홀로서기에 승리하기를 바란다는, 현실성이 없어 보이는 말을 덧붙인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 기억들이 그에게도 남아 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너 혹시 기억나니? 선생님이 너에게 열흘인가 보름인가 기회를 주었었지?"
"보름이었습니다, 선생님."

"그래, 기억하고 있구나. 그런데 그 보름 동안 네가 어떤 생각을 하며 지냈는지 몹시 궁금했거든. 네 친구들 말로는 넌 대학생이 되어서도 강의를 빼먹은 적이 없었다지. 언제부터 마음을 돌리게 된 거냐?"


사실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 조금은 어색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생생하게 기억하는 일을 까마득히 잊고 있거나 희미해진 기억을 더듬는 모습을 보는 것도 유쾌한 일은 아니어서 내심 망설이다가 물어본 것인데 그 대답이 뜻밖이었습니다.

"거의 마지막 날까지 도망을 갔어요. 그런데 용택이가 저랑 같이 도망을 간 적이 있는데 용택이만 운동장을 돌게 하시고 저에게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요. 그후에도 계속 도망은 갔지만 그 생각이 자꾸만 나면서 처음으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그의 말을 듣다가 그의 입에서 발음된 '부끄럽다'는 단어에 귀가 번쩍 트였졌습니다. 그러면서 뭔가 확연히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를 구원한 것은 바로 부끄러움이었구나. 만약 성급한 마음으로 그를 억압하거나 멸시했다면, 마음에 미움을 품기라도 했다면 그의 부끄러움이 빛을 잃을 뻔했구나.'

늦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자리를 옮겨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말수도 워낙 적고 어딘지 안색도 어두워보이던 과거와는 달리 그는 생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또 그렇게 살고 있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문득 개과천선이란 단어가 떠올라 제자 몰래 속웃음을 머금기도 했습니다. 그는 저와 헤어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용택이도 선생님 무척 보고싶어해요. 언제 같이 한 번 찾아뵐게요."

용택이는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입니다. 지금도 해묵은 교무수첩에는 그 해 그가 읽은 일곱 권의 책이름이 날짜와 함께 빼곡이 적혀 있습니다.

그는 섣불리 주먹질을 하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권투를 배운 경력 때문인지 은연중에 최고의 주먹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 만큼 책과는 거리가 먼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니 학기초에 책을 권하는 담임 선생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쳐다 볼만도 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저는 그에게 끈질기게 책읽기를 권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제 안에 그려진 어떤 그림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제가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그려 주어야할 최소한의 밑그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교육이 상품화되고 학교에서 배운 지식들이 재화 축적이나 신분 상승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학교교육이 포기해버렸거나 소홀히 하고 있는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저는 책을 매개로 제자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것이지요.

인간적인 좋은 면을 많이 지니고 있으면서도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듯한 그 제자에게 저는 돈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위해 삶을 바치고 있는 책 속의 주인공들을 만나게 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헌신과 열정, 그리고 진정한 용기에 슬그머니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그런 구원의 순간과 마주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한때는 문제가 있었던 아이들도 어떤 계기를 만나기만 하면 놀라운 변화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부끄러움에 대한 감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런 소중한 자기 성찰의 도덕적 능력이 학교의 업적중심의 조급함 때문에, 혹은 지나친 타율적 억압이나 간섭에 의해서 빛을 잃게 된다는 것이지요. 교육에서 이보다 더 큰 손실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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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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