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의 본질인 태허(太虛)는 맑고 형체가 없는 것으로 선천(先天)이라 한다. 그 크기는 한정이 없고, 그에 앞서서 아무런 시초도 없으며, 그 유래는 추궁할 수도 없다.
맑게 비어 있고 고요하여 움직임이 없는 것이 기의 근원이다. 널리 가득 차 한계의 멀고 가까움이 없으며, 꽉 차 있어 비거나 빠진 데가 없으니 한 호리(毫釐)라도 용납될 틈도 없다.
그렇지만 오히려 실재(實在)하니, 이것을 존재하지 않는다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생성과 소멸하는 모든 것은 무한히 변화하는 기의 율동이다.
바람처럼 파도처럼 또 소나기처럼 밀리고 맥박치는 생(生)과 구름처럼 물방울처럼 사라지는 멸(滅)의 본체가 무엇이냐?
부침하고 율동(律動)하는 태허기(太虛氣)의 고탕이다.
따라서, 기는 우주를 포함하고도 남는 무한량(無限量)한 것이며, 하늘과 땅 사이 어디건 가득 차 있어 빈틈이 없으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한 존재이다.
또한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만물을 생성할 수 있으므로, 그것 이외에 어떤 원인(原因)이나 그 무엇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하략… >
"흐음!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이회옥은 얼핏 이해되지 않는 문장을 곱씹어 보았다. 뭔가 알 수 없는 현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흐음! 태허설(太虛說)? 누가 지은 거지? 서경덕? 누구지? 처음 보는 사람 이름인데? 서경덕이 누굴까?"
표지에 쓰인 태허설과 저자인 듯한 서경덕이라는 글씨를 보았지만 누구의 글인지 알 수 없던 이회옥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시선의 촛점이 흐려지고 있었다.
책장을 후루륵 넘기는 동안 스치듯 보았을 때 느껴졌던 어떤 현기가 무엇인지를 더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세상에…! 이건…?"
마치 득도한 고승이 참선을 하듯 그렇게 눈을 반개(半開)한 채 꼼짝도 않고 반나절이나 서 있던 이회옥은 감탄사를 터뜨렸다.
서경덕이 지은 태허설이라는 서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이회옥이 지금껏 지니고 있던 고정관념을 한 순간에 깨버리고 그야말로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깨우침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맞아! 내공심법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 사람들의 생각이 빚어낸 결과야. 그러니 꼭 그걸 따라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아암! 그렇고 말고… 그나저나 세상의 모든 공간에 음양이기가 충만해 있다고? 사람들이 그것을 보거나 느낄 수 없어 있는지 모른단 말이지? 좋아, 그렇다면 그것들을 체내에 갈무리하는 것이 바로 내공심법인데 그걸 꼭 갈무리해야만 쓸 수 있는 걸까? 그냥은 못 쓰나? 흐음, 뭔가 다른 방법도 있을 텐데…!"
이회옥은 나한기공주해를 통해 익힌 무공의 근본 원리를 하나하나 더듬고 있었다. 밖에서는 낮이 가고 밤이 지나갔지만 이회옥이 머물고 있던 다물연공관에는 변화가 없었다.
최소한의 수면을 취한 이회옥은 심한 허기가 느껴질 때야 자리에서 일어나 한 알의 벽곡단을 복용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눈을 반개한 채 머리 속에 뒤엉켜있는 무리(武理)를 더듬었다.
대략 삼백여 개의 벽곡단이 소모된 어느 날, 미동(微動)도 않고 있던 이회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릿속으로 수없이 명멸하던 여러 상념을 드디어 하나로 가다듬은 것이다.
"후후! 드디어 해냈어! 후후! 이제 난 마르지 않는 내공의 소유자가 된 거야. 남들은 내공을 체내에 갈무리한 뒤에 이를 끌어썼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어. 이 세상 어디에고 있는 무진장한 기(氣)를 필요할 때마다 끌어서 쓰면 되지. 후후후!"
한참 후 이회옥은 수없이 많은 병장기들이 걸려있는 병기대로 다가갔다. 연공관에 든 사람이면 누구나 하나씩은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을 잊지 않고 있었던 때문이다.
"어라? 봉은 없나? 후후! 봉을 깜빡 잃어버린 모양이군."
검도편부(劍刀鞭斧)는 물론 필추겸반(筆鎚鎌盤) 등이 고루 갖춰져 있었고, 분수자나 아미자 등 기형병기들도 망라되어 있었다. 그런데 유독 봉(棒)이 보이지 않았다.
봉과 비슷한 형상인 선장(禪杖)이 있기는 하였으나 길이가 짧았고 무게가 훨씬 더 무거웠다.
"흐음! 어디 숨겨놨나? 어디 보자. 봉아, 봉아 나와라!"
이회옥은 병장기들 뒤쪽에 있나 싶어 샅샅이 뒤졌으나 어디에도 봉은 보이지 않았다.
"흐음! 이상하네. 왜 봉이 없지?"
반나절이나 뒤졌지만 끝내 봉을 찾을 수 없던 이회옥은 입맛이 썼다. 지난 한 달간 오로지 봉만을 생각하고 하나의 무공을 창안했는데 막상 봉을 찾으려니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흐음!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도 써야 하나? 흐음! 창을 찾아서 자루만 빼면… 어라? 이거 뭐 이래? 창도 없잖아?"
그러고 보니 유일하게 봉과 비슷한 용도로 쓰일 수 있는 창 또한 보이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병기대를 샅샅이 살폈지만 끝내 봉이나 창을 찾을 수 없던 이회옥은 할 수 없이 묵직한 선장을 집어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내 병기대에 다시 놓여졌다.
봉이 가진 탄력을 전혀 낼 수 없는 물건이고 너무 무거우면 휴대하기 불편하다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병장기들이 다 있다고 하더니… 쯥! 봉하고 창은 잊어버린 모양이군. 참! 여기 들어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병장기 하나씩을 가져나갈 수 있다고 하였지? 그럼 봉이랑 창은 누가 가지고 나간 건가? 흐음! 그럴 수도 있겠군."
다른 건 다 있는데 유독 봉과 창이 없어 투덜거리던 이회옥은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 금빛 면구를 쓴 장한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봉이나 창을 애병으로 하는 사람은 도나 검을 사용하는 사람들에 비하여 현저하다해도 좋을 만큼 극소수이다.
그렇다고 아주 없는 것은 아니기에 누군가 먼저 들어왔던 사람이 가져갔다 생각한 이회옥은 혹시 봉을 대용할만한 물건이 없을까 뒤적였다. 그러던 어느 순간 이회옥의 눈에 이상한 물건이 뜨였다.
"어라? 이건 뭐지? 어쭈! 제법 묵직한데?"
이회옥이 들어올린 것은 병기대 아래쪽에 처박혀 있던 것이다. 둥근 금속으로 만든 그것은 가운데 구멍이 뻥 뚫려있었다.
"흐음! 이건 뭐로 만든 거지? 금이나 은은 아니고, 그렇다고 쇠나 구리도 아닌 것 같은데… 뭘까?"
이회옥은 연한 자색을 띈 금속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서 이리저리 살피던 중 두 개가 한 쌍으로 붙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이건 무엇에 쓰는 물건일까?"
그것은 용도가 무엇인지 알기 힘든 물건이었다.
"흠! 여기 있는 것들은 전부 병장기라 하였으니 분명 병장기의 일종일 텐데… 두 개가 한 쌍이나 손이나 발에 쓰는 것 같은데… 크크! 발목에 껴서 쓰는 병장기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고… 그럼 팔목에 차는 건가? 그래도 이건 너무 굵은데?"
아무리 살펴봐도 어떤 용도로 사용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던 이회옥은 비환(臂環 :팔찌)치고는 폭도 두툼하고 구멍의 크기도 컸지만 장난스럽게 팔목에 끼워 보았다.
그러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갑작스럽게 줄어들면서 예리한 금속음이 터져 나왔다.
철컥!
"아앗! 헉, 이런…! 휴우…!"
오그라들면서 손목이 잘리는가 아닌가 싶어 황급히 잡으려던 이회옥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팔목 굵기로 줄어든 이후 아무런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휴우! 이게 뭐지?"
일단 팔목이 잘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이회옥은 팔찌처럼 채워진 그것을 자세히 살폈다.
"흐음! 이건 무슨 문양이지? 구름 모양만 잔뜩 새겨져 있네. 어라? 이건 무슨 글자 같은데…"
이회옥은 넘실대는 구름 문양이 잔뜩 새겨진 중심부에 아주 작은 글씨가 음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고대에 사용되던 예서(隸書)로 쓰인 글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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