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아! 정말 대단하군."
침상에 벌렁 누운 채 다리를 흔들면서 책을 들여다보던 이회옥은 책을 덮으며 벌떡 일어났다.
그 책의 표지에는 백씨문집(白氏文集)이라는 글자가 쓰여있었다. 그렇다면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하나인 한유(韓愈)와 더불어 이두한백(李杜韓白)이라 불리던 낙천(樂天) 백거이(白居易)의 저서임이 분명하였다.
"흐음! 얼마나 애절한 비파(琵琶) 소리였으면 이랬을까?"
방금 전 이회옥은 취음선생(醉吟先生) 혹은 향산거사(香山居士)라 불리던 백낙천의 명작 비파행(琵琶行)을 읽고있었다.
마흔네 살 때인 원화(元和) 십 년, 백낙천(白樂天)은 어처구니없는 죄명으로 강주사마(江州司馬)로 좌천되었다.
강주(江州)는 천하에서도 알아주는 명산인 여산(廬山)의 바로 아래쪽에 위치해 풍광이 수려한 곳이다. 하여 그리 싫지는 않았지만 사마(司馬)란 관직은 관청에 나가봐야 뚜렷하게 할 일이 없는 그야말로 한직(閒職) 중의 한직이었다.
그가 뒤집어쓴 죄명은 일종의 월권죄였는데 시말은 이러했다.
장안(長安)에서 재상인 무원형(武元衡)이 백주 대낮에 자객에게 살해당하는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 재상이 죽었음에도 이상하게도 서둘러 범인을 체포하지 않는 조정의 처사에 의분을 느낀 백낙천은 천자에게 직접 상소(上疏)를 하였다.
그런데 당시는 상소도 아무나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간직(諫職:임금에게 충고하는 자리)에 있는 자만이 가능한 때였다.
백낙천은 의분을 못 이겨 나섰던 것인데 평소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반대파들은 간직을 통하지 않고 직접 상소한 것을 빌미로 이역만리 객지로 폄적(貶謫 :직급을 낮춰 귀양살이를 보내는 것)시켜 버린 것이다.
강주로 귀양살이를 온 다음해 어느 날, 백낙천은 심양(尋陽:구강)의 강가에서 손님을 전송하는 연회를 베풀고 있었다.
일부러 먼 곳에서 찾아왔던 죽마고우와의 헤어짐이 섭섭하여 이별의 잔을 기울인 것이다. 동석한 사람들과 함께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던 때 어디선가 나지막한 비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의 맑고 영롱함에 감탄한 백낙천은 하인으로 하여금 비파 타는 여인을 청하도록 하였다.
그녀는 뛰어난 솜씨로 비파를 타서 좌중을 숙연케 하였는데, 그 솜씨가 어찌나 뛰어난지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그녀가 탄주한 곡은 장안에서 유행하던 곡조로 강주 같은 벽지에서는 정말 듣기 어려운 곡이었다.
이를 의아하게 생각한 백낙천이 어찌 그 곡을 아느냐고 물었다. 이에 여인은 젊어서는 장안에서 제법 잘 나가는 기녀였으나 나이가 들어서 찾아주는 사람이 없음에 멀고 먼 강주까지 흘러 왔다고 하였다.
그녀는 쓸쓸히 강가에 홀로 앉아 비파를 타는 자신의 불행한 신세를 하소연하였다. 이에 백낙천은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고 강주에 좌천된 자기의 신세를 토로한 후 다시 한 곡을 부탁하였다.
여인이 다시 비파를 타자 그 소리가 더없이 애절하고 비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흐느끼며 슬퍼하였다. 한편 비파 소리가 계속되는 동안 백낙천은 붓을 들어 시 한 수를 지었다.
그것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同 是 天 涯 淪 落 人 (동시천애윤락인)
相 逢 何 必 曾 相 識 (상봉하필증상식)
우리는 똑같이 하늘가에 떠도는 신세.
설령 초면인들 그게 무슨 상관이랴
이날 밤, 장강 나룻가엔 단풍이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고, 하얀 갈대는 자그마한 미풍에도 흔들리고 있었다.
잔잔한 강물에는 휘영청 밝은 명월(明月)이 잠겨 있었고, 소쩍새는 피를 토할 듯 슬피 울고 있어 더 없이 고즈넉한 밤이었다.
백낙천이 일필휘지로 비파행을 지을 때 자리를 함께 했던 나그네와 동료 관리들은 끊어질 듯 끊어질 듯하면서 애절하게 울리는 비파 소리에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천하의 명시인 비파행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座 中 泣 下 誰 最 多 (좌중읍하수최다)
江 州 司 馬 靑 衫 濕 (강주사마청삼습)
좌중(座中)에 어느 누가 가장 서럽게 울었느뇨?
강주사마(江州司馬)의 푸른 소맷자락이 제일 흠뻑 젖었어라.
모두 육백열여섯 자로 이루어진 명시의 탄생이었다.
백씨문집에는 비파행이 어떻게 지어졌는지가 잘 기록되어 있었기에 이회옥은 귓가로 애절한 비파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그러던 중 문득 세상을 먼저 등진 부모의 영상이 떠오르자 이회옥의 눈은 금방 축축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굵은 눈물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동시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 부모의 슬하에서 사람을 받아도 시원치 않을 나이에 일가친척 하나 없는 세상에 내동댕이쳐져 온갖 고난을 겪은 자신의 신세가 가련하다 느낀 탓이다.
"휴우우…!"
잠시 후 이회옥은 읽고 있던 백씨문집을 서가에 꽂았다. 부친의 엄한 꾸지람이 들리는 듯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놈! 네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냐? 어서 정신을 차리거라."
준엄한 표정을 짓는 부친의 표정을 상기한 이회옥은 얼른 마음을 가다듬었다.
"맞아!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흐음! 어찌되었건 저 석탁을 누를 방법은 이 서가에 있어. 헌데 어디에서 찾지?"
지난 한 달 간 이회옥은 서가에 꽂혀 있는 서책 가운데 눈에 뜨이는 것을 뽑아 읽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곳은 학문을 닦는 문사들에게는 가히 보물창고라 불러도 좋을 만한 곳이었다. 유난히도 책을 좋아하던 이회옥인지라 생전 처음 보는 희귀본들에 정신이 팔려 있었던 것이다.
"어? 이건 뭐지?"
정신을 차려 나갈 방도를 찾아야겠기에 학문에 관한 책은 다시 꼽고 그렇지 않고 조금이라도 무공과 관련이 있다싶으면 따로 정리하던 이회옥이 멈춘 것은 백씨문집을 꽂아 넣은지 만 사흘이 지난날이었다.
지난 사흘간 한숨도 자지 않고 오로지 서책을 분류하는 일에만 매달려 있었기에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몹시 피곤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부친의 엄한 얼굴이 자꾸 떠올라 침상에 몸을 눕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벽곡단이 있기에 아사할 걱정은 없지만 여기서 마냥 있을 수만은 없다는 일종의 위기의식이 발현된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런 이회옥이 멈춘 것은 얼핏 본 한 문장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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