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秦)나라 때의 전서(篆書)는 이전의 그림 문자 형태를 기호화시켰지만 제법 문자 모양을 갖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둥글둥글한 모양에 획수가 번잡하였다.
전서의 그런 모습은 한자(漢字)의 원형이나 초기 의미를 파악하는데는 매우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문자로써 사용하기에는 복잡하고 불편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고자 획수를 대폭 줄이고 필사(筆寫)에 편하도록 둘레를 각지게 변형시켜 전체적으로 사각형 모양으로 변형시킨 서체가 바로 예서이다.
이것은 노예도 사용하기 편하도록 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이전의 서체에 비해 많이 간소화된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비슷한 필획을 통괄하여 하나로 정리했기에 원래 지니고 있던 상형적인 요소는 많이 사라졌다.
처음과는 모양이 너무 변해 예서체만으로는 원래 뜻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기에 한자 서체를 논할 때 이를 특별히 예변(隸變)이라고 부른다.
아무튼 팔찌에 새겨진 글씨가 너무 작았으며 심하게 마모되어 식별하기가 몹시 곤란하였으나 안력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이회옥이었기에 간신히 알아낼 수 있었다.
"태, 극, 구, 명, 환(太極救命環)? 태극구명환이 뭐지? 흐음! 구명은 목숨을 구한다는 뜻인데… 이게 뭘까?"
한참을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이리저리 살피던 이회옥은 갑갑함을 느끼고 팔찌를 빼려고 하였다. 그런데 방법이 없었다.
손목 쪽으로 밀어내리자 오그라들면서 팔목에 아주 고정되어 버렸는데 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쭈? 이게 안 빠져? 이이이익! 끄으으응! 에잇! 야아아압!"
이날 이회옥은 팔찌와 씨름을 하였다. 그러나 다음 날이 되도록 그것은 빠지지 않았다.
다음 날, 팔찌 빼기를 포기한 그는 골라놓은 서책들을 한켠에 쌓아놓고 세상에서 제일 편한 자세로 엎드렸다. 그리고는 하나 하나 살피기 시작하였다.
* * *
"성주님!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공격해야지."
"그래도…, 지금 나섰다가는 무림의 지탄을 받을지도…"
무림천자성 제일호법인 무영혈편 조경지는 자신을 노려보는 듯한 구부시의 냉랭한 표정 때문에 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마치 오금이저려 한 발짝도 더 내디딜 수 없을 때 같이 곤혹스러웠으나 애써 말을 이으려 하지 않았다. 속 좁기로 유명한 철룡화존 구부시의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좋을 일보다 나쁠 일이 훨씬 많다는 것을 그간의 경험을 통하여 알기 때문이다.
지난 며칠 간 무림천자성의 수뇌부들은 어쩌면 향후 무림의 향방을 바꿔 놓을지도 모를 정도로 중대한 결정을 하기 위하여 심각한 표정으로 회의를 거듭하였다.
회의의 주제는 월빙보 정벌(征伐)이었다.
자신의 말에 토를 달려하였던 조경지를 잠시 째려보았던 구부시는 배석한 수뇌들을 한 바퀴 둘러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자, 이제 회의는 그만…! 이 정도면 회의는 충분하게 했소. 본좌는 오늘부터 이 문제로 더 이상 회의할 생각 없소. 월빙보 정벌은 시행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소. 그러니 그렇게 알고 공격준비를 철저히 하도록!"
"존명!"
철룡화존 구부시의 일갈에 지금껏 가타부타 말이 많던 무림천자성 수뇌부들의 입이 일제히 닫혔다.
"그리고 조 호법이나 고 전주가 계속해서 명분, 명분 했는데… 흑령재녀!"
뭔가 말을 하려던 구부시는 잠시 말을 끊고 흑령재녀 나이수를 바라보았다. 이에 그녀의 고개가 즉각 꺾였다.
"흑령재녀, 성주님의 부름심을 받잡습니다."
"지금부터 본좌가 말하는 대로 무림에 발표하도록!"
"말씀만 하십시오."
"흠! 몇 가지가 있는데 이를 잘 정리하여 발표하도록!"
"존명! 세이경청(洗耳敬聽)하겠습니다."
"첫째, 월빙보는 본성 세무각(世貿閣)을 폭파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내게 하였던 아부가문 문주 금금존자 오사마에게 자금과 병장기를 지원한 문파이다. 따라서 공격받아 마땅하다."
"……!"
"둘째, 월빙보는 대량살상 병기를 보유하고 있을 수도 있어 극히 위험하다. 따라서 제지를 받아 마땅한 문파이다."
"……!"
"마지막으로 월빙보의 보주 흑염수사 후세인은 포악한 성품을 지닌 폭군이다. 따라서 제거 당해 마땅하다."
"……!"
"허험! 이상이다. 참, 이번 공격에 본성은 물론 소림사도 전면에 나서기로 하였다. 따라서 굳이 명분으로 무림을 설득할 필요가 없다. 왜 인줄 아느냐?"
"……?"
거만한 자세로 태사의에 앉아 오만한 표정으로 말을 하던 구부시는 수하들의 집중된 시선에 기분이 좋은 지 괴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크크! 강자존(强子存) 약자멸(弱者滅)이 무림의 대원칙이기 때문이다. 아참! 무림의 전 문파에 알려야 할 것이 하나 또 있다."
"……?"
"만일 이번 공격에 딴지를 걸고 나오는 문파들이 있다면 다음 순서는 그들이 될 것이라는 것을 주지시키도록! 이상이다."
"존명!"
말을 마친 구부시가 돌아서자 무영혈편 조경지를 비롯하여 무비수사 고파월과 오각수 도날두 등 수뇌부들의 허리가 직각으로 꺾였다. 다들 만족할만한 결과라 생각하는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으나 조경지와 고파월의 얼굴에는 수심이 어렸다.
장차 벌어질 어마어마한 일 때문에 걱정되서였다.
회의 도중 얼마만한 병력을 사용하느냐로 갑론을박(甲論乙駁)을 할 때 구부시는 천하 각지에 흩어져 있는 정의수호대원들 가운데 정확히 절반을 동원하라는 명을 내렸다.
총단 소속은 물론 무림에 산재한 모든 무천장 소속 정의수호대원 가운데 반씩을 동원하라 한 것이다.
이 정도만 해도 중원의 어떤 문파라 할지라도 완전하게 박살낼 극강한 전력(戰力)일 것이다. 나머지 반만으로도 천하를 장악하는 데에는 전혀 이상이 없을 정도이다.
그들 가운데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순찰원 소속에게는 일천이백여 마리에 달하는 대완구를 지급하라 하였다.
이 정도 인원과 전력이라면 월빙보는 물론 어쩌면 일월마교나 화존궁 역시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질 막강한 전력이다.
이것으로도 부족하다 여겼는지 최근에 개발한 모든 병장기들을 총동원 시키라 하였으며 유사시를 대비하여 천뢰탄까지 준비하라 하였다. 여차하면 아예 먼지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속내를 숨기지 않은 것이다.
"흐음! 성주님의 명이 떨어졌으니 준비야 하겠지만 성주께서 하신 말씀만으로는 그들을 공격할 명분이 부족하오."
"그러게 말이오. 최근 들어 월빙보는 종전의 태도를 바꿔 구파일방이 공동으로 보낸 조사단에게 순순히 협조한다 들었소이다. 전에는 얼씬도 못하게 하던 문주의 거처까지도 개방하였으며, 일부 악랄한 병장기는 스스로 파괴하였다고 하오. 이런 판국에 공격을 하면 무림의 지탄을 면키 어려운데…"
"흐음! 그래서 월빙보에서 대량살상 병기가 나오는가를 확인한 후에 공격해도 늦지 않다고 말씀드리려고 했던 것이외다."
고파월의 말에 조경지가 맞장구를 쳤다. 둘 가운데 조경지는 이번 공격을 극력 저지하는 자세였고, 고파월은 언젠가 공격은 하되 좀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면서 다소 유보적인 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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