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벌판에 뿌린 민족의 씨앗

항일유적답사기 (41) - 경학사

등록 2003.06.20 11:04수정 2003.06.20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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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요람지, 삼원포 ⓒ 박도

삼원포

우리 일행은 석주 이상룡 선생이 망명 초기에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경학사(耕學社)의 옛 터를 찾고자, 유하현 삼원포진 인민정부를 찾아갔다. 길을 잘 모를 때는 그 고장의 인민정부를 찾아 안내 받으면 가장 정확했다.

거기서 안내를 받은 후, 마침 청사 앞에 반점이 있어 늦은 아침을 들고자 들어갔다. 반점 이층 창문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니 길 건너편 같은 지붕의 두 간판이 재미있게 눈에 띄었다.

좌측 가게는 치과 병원〔牙館〕, 우측 가게는 만두집〔餃子〕인데, 치과 병원이 만두집보다 훨씬 더 초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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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와 만두집(만두집이 더 번듯하다) ⓒ 박도

내가 두 가게를 카메라에 담자, 곁에서 이 선생은 “중국에서는 의사의 수술용 칼이 정육사의 개돼지 잡는 식칼보다 못하다.〔醫刀不如屠殺刀〕”라는 말이 있는바, 의사를 비롯한 고급 전문직의 수입이 노동자보다 우대 받지 못하는 사회라고 했다.

전승향 조선족 소학교 김성봉 교원은 잠깐의 대화에서도 네 달째 봉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그분의 차림이나 표정에서 궁색함을 엿볼 수 있었다.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발상지이다.

1910년대 삼원포 일대의 중요 독립기지로써 경학사, 부민단, 한족회, 신흥학교(후 신흥무관학교), 신흥학우단(신흥학교 교직원과 졸업생들이 조직한 단체), 서로군정서, 백서농장 등이 들어서서 독립 운동을 맹렬히 하였으니, 이곳을 독립운동 발상지요, 요람지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삼원포는 세 골의 물이 합한다고 붙여진 지명이다. 땅이 기름지고 물이 흔하면, 농사 특히 벼농사에 아주 적합한 곳이다.

이런 좋은 조건의 땅에 ‘독립운동 기지화’ 문제는 1910년 9월 초순, 신민회의 대표로 서간도 지역을 답사한 이동녕 이회영 등의 제의에 따라 그해 12월, 김구(金九) 등이 참여한 신민회 전국 간부회의에서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이듬해인 1911년 2월 이회영 집안 40여 명을 비롯하여, 안동의 유림 이상룡 김대락 김동삼 집안들이 잇따라 정착함으로 이곳 삼원포 일대에 독립운동기지 사업이 추진되기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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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학사가 있었던 추가가 마을, 언저리 기름진 벼논 때문인지 여느 마을보다 부촌이었다. ⓒ 박도

이분들이 망명한 이유는 신민회 사건 판결문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 백성들을 다수 이주시켜 이곳에다 토지를 구매하고 촌락을 만들어 새로운 영토로 삼고 민단을 세워서 학교와 교회를 설립하며 나아가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을 실시하여 기회를 타서 조선 독립전쟁을 일으켜서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한다.”

이들 망명지사들은 독립운동의 전략과 함께 재만 한인의 교육․산업․권리 문제 등의 해결에 고심하였다.

이들은 그해 4월 유하현 삼원포의 대고산에서 3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노천 군중대회를 열었다. 이 노천 군중대회에서 이동녕을 임시의장으로 선출하여 다음의 5개항을 의결하였다.

첫째, 민단 자치기관의 성격을 띤 경학사를 조직할 것
둘째, 전통 도의에 입각한 질서와 풍기를 확립할 것
셋째, 개농(皆農)주의에 입각한 생계 방도를 세울 것
넷째, 학교를 설립하여 주경야독의 신념을 고취할 것
다섯째, 기성군인과 군관을 재훈련하여 기간장교로 삼고 애국청년을 수용하여 국가의 동량 인재를 육성할 것.

이 결의에 따라 경학사를 조직하여 내무․농무․재무․교무의 4개 부서를 두었다. 사장에는 이상룡이 추대되었으며, 내무부장에 이회영, 농무부장에 장유순, 재무부장에 이동녕, 교무부장에 유인식이 임명되었다.

경학사는 민단 자치기관이었다. 경학사를 설립한 주요 인물들은 신민회의 간부들이었다. 신민회의 주요 목적 가운데 하나가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무관학교의 설립이었으니 그 취지에 따라 경학사가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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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학사 창설 노천 군중대회를 열었던 대고산 ⓒ 박도

경학사

경학사의 옛 터를 찾기 위해 삼원포에서 서쪽으로 갔다. 이곳은 평야지대로 마을이 드문드문 있었다. 집집마다 해바라기가 담을 넘어 활짝 낯선 이방인을 반기는 듯했다.

우리 일행은 두 차례 길을 물은 끝에 대고산 아래 추가가 명성촌에 이르렀다. 지금은 40여 호가 몰려 사는 한촌으로 정적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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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학사 옛 터와 대고산을 증언해주는 추가가 마을의 김명빈 씨(오른쪽) ⓒ 박도

조선족을 찾았더니 마침 김명빈(46)씨가 집안에서 나와서 그간의 마을 유래를 들려주었다. 당신도 어릴 때 어른들로부터 조선 독립지사들이 대고산 아래에다 경학사를 설립하였다는 얘기를 많이 들은바 있다면서, 대고산 아래를 가리키면서 그 일대라고 일러주었다.

그 새 많은 세월이 흘러 경학사의 유적은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경학사가 창설된 지가 이미 90년 전의 일이다. 우리나라도 많이 변했지만 중국도 격변의 세월이었다. 정권도 국가 체제도 여러 번 바꿨다. 다른 민족이 세운 경학사를 90년 동안 그대로 둘 리가 없을 게다.

미리 짐작은 했지만 무심한 대고산을 바라보며, 우리 조상들이 피땀을 흘리며 가꾸었을 마을 앞 들판과 일대의 모습을 부지런히 카메라에 담고 마을을 벗어났다.

들판에는 벼들이 싱그럽게 자라고 있다. 원래는 황무지와 다름없었던 이 들판을 개간하고 벼농사를 보급한 것은 당시 우리 조상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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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 삼성에는 어디를 가나 해바라기가 지천으로 흔하다. ⓒ 박도

광개토대왕비를 보기 위해 집안(輯安)으로 가면서 경학사 사장 이상룡이 낭독한 ‘경학사 취지서’를 음미해 보았다.

“…… 아아! 슬프다 한민족이여, 사랑해야 할 것은 한국이로다. 땅이 없으면 무엇을 먹고살며, 나라가 없으면 어디서 살겠는가? 내 몸이 죽으면 어느 산에서 묻힐 것이며, 우리 아이가 자라면 어느 집에서 살게 하겠는가? …

차라리 칼을 빼어 자결하고 싶어도, 내 몸 죽여 도리어 적을 기쁘게 할 염려가 있다. 곡기를 끊어 굶어죽고 싶어도, 나라를 팔아먹고 이름만 사게 되는 일이니 어찌 차마 하겠는가? 눈물을 흘리며 하늘 끝까지 치욕을 받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힘을 길러 끝내 결과를 보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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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현 삼원포 평야, 우리 조상들의 피땀으로 일궈낸 벼논들이다. ⓒ 박도

이에 남만주 땅에다 여러 사람의 뜨거운 마음을 합하여 하나의 단체를 조직하니 이름을 ‘경학사’라 한다.

… 끓는 솥의 고기가 아무리 파닥거린들 무슨 희망이 있으며, 화롯가의 제비는 아무리 외친들 얼마나 시간이 있으랴.

오라, 오라! 우리 집단을 보전하는 것이 곧 우리 민족을 보전하는 것이요, 우리 경학사를 사랑하는 것이 곧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라.

오라! 오라! 기러기 떼지어 날고 서풍은 날을 재촉하는 듯하지만, 금계(金鷄)가 한 번 울어대면 곧 동녘 하늘이 밝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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