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이 옆에서 지켜주는 아이

고마운 아이, 종미

등록 2003.06.22 12:44수정 2003.06.24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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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아이들이 있습니다. 수백t의 힘으로 밀면 겨우 1g의 무게로나 반응을 보일까말까 하는, 조금은 부족하고 이기적인 아이들 때문에 힘들어할 때 말없이 따뜻한 눈빛을 보내오는 아이들. 우리 반 종미가 바로 그런 아이입니다.

백 번을 잘해주다가도 한 번 정도는 준엄하게 잘못을 지적을 해주는 것이 사랑이라 생각하여 충고를 하려고 들면 왜 나만 가지고 그러느냐고 따지며 금세 표정을 바꿔버리는 아이들. 그때 입은 마음의 상처가 오래가지 않는 것도 종미처럼 마음씀씀이가 넉넉하고 고운 아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각하는 습관이 고쳐지는 듯하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버린 두 아이 때문에 너무 신경을 쓰다보니 제 때 생일축시도 못 챙겨주고, 해서 많이 섭섭했을 텐데도 출장을 다녀와서 메일을 열어보니 오히려 위로의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매 시간마다 뵙던 선생님의 얼굴을 오늘 못 보니깐 보고 싶네요. (…) 선생님. 애들이 선생님 속 썩혀도.. 힘내세요! 소리 없이 옆에서 지켜주는 저희들이 있으니까요.'

'소리 없이 옆에서 지켜주는'

이 표현은 제가 그 아이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 들어 있던 글귀이기도 합니다. 편지를 쓰다보니 은연 중에 그 말이 생각났는지도 모르지요. 아무튼 학급에는 자주 말썽을 피우거나 자꾸만 어긋난 길로 나가 담임을 힘들게 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런 담임을 '소리 없이 옆에서 지켜주는' 고마운 아이들도 있습니다.

문제는 '소리 없이 옆에서 지켜주는' 고마운 아이들에게 오히려 교사의 시선이 덜 머물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탈행동이 잦은 학생들을 준엄한 잣대와 매로 다스리면 시간은 많이 절약되지만 인간관계가 깨질 위험이 있어서 끈질긴 대화로 아이들을 설득하다 보면 정작 잘 하고 있는 아이들이 손해를 보는 일이 생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학생들 개개인과 얼마나 깊은 관계를 맺고 그들의 삶에 바람직한 영향을 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보다는, 우선 결석 지각생이 없는 무사고의 학급을 만드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없이 급한 불을 먼저 꺼야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핸가는 담임 중간평가라는 이름으로 쪽지 상담을 했는데 한 아이로부터 '선생님은 문제아들만 편애한다'는 충격적인 내용의 쪽지를 받았습니다. 그 후로는 그런 잘못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으리라 굳게 마음을 먹어보지만 썩 잘 되지만은 않습니다.


올해 우리 반에는 단골 지각생이 두어 명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늦잠을 자는 습관을 고치지 못한 터에 부모가 함께 살지 않거나 아침 일찍 직장을 나가는 관계로 잠을 깨워줄 사람이 없는 아이들입니다.

그들에게 매를 대거나 미움의 시선을 던지는 것보다는 스스로 잘못된 습관을 고쳐 나가도록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지도하다 보니 조금만 일찍 등교를 해도 저도 모르게 반가운 기색을 보이고 맙니다. 그것이 다른 아이들에게는 차별대우로 비춰질 것 같아서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습니다.

"매일 1교시가 끝나면 지각생 보고를 해야하는데 그것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는 말도 못하게 큽니다. 그래도 제가 지각하는 아이들에게 미운 마음을 먹지 않는 것은 여러분이 이렇게 학급을 잘 지켜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지각생이 세 명 네 명 늘어난다면 저도 어쩔 수 없이 매를 들게 되고 지각하는 아이들에게도 미운 마음을 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너무도 고맙고 소중합니다."

또 이렇게 말을 하기도 합니다.

"솔직히 그 애들에게 미운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가정적으로 힘들지만 누구보다도 생활에 충실하고 착실한 학생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어렵다고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은 잘못입니다. 다만, 여러분보다는 부족한 부분이 있어서 선생님이 조금 더 기다려주는 것뿐입니다. 선생님이 잘하고 있는 거지요?"

어찌 보면 반 아이들에게 동의를 구하고 지각하는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는 셈인데, 바로 그때 따뜻한 긍정의 눈빛을 보내오는 아이가 바로 종미입니다. 그런 고마운 아이에게 제가 해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생각해보니 딱 두 가지가 있긴 합니다.

한 달 전쯤, 특기적성교육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학교 근처 포장마차에서 떡볶이와 탕수육을 사준 적이 있습니다. 종미 말고도 미라와 주영이가 함께 있었습니다. 셋 다 모두 성실하고 학업성적도 좋은 아이들인데, 바로 그 점 때문에 저와 많은 시간을 나누지 못한 억울한 아이들이기도 합니다.

출석을 부를 때나 이름을 불러주고 눈길을 주었을 뿐, 복도에서 만나도 살가운 눈길 한번 제대로 주고받지 못했습니다. 하루에 주어진 많지 않은 시간을 거의 대부분 문제가 있는 아이들과의 대화시간으로 써버리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보다는 너무 잘 하고 있는 아이들이기에 안심을 해버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섭섭해하기는커녕 저를 위로하고 지지하는 눈빛을 보면 어린 제자이지만 고개가 숙여집니다.

종미에게 해준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지난 주 학교에서 지리산 피아골도 수련회를 갔는데 섬진강에서 보트를 타고 레프팅을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험한 코스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열 명이 한 모둠이 되어 2시간 반 동안을 쉬지 않고 노를 저어야 낙오하지 않고 목적지에 당도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완주 기념으로 토끼풀로 꽃시계를 만들어 손목에 채워주었던 것입니다. 혼자만 받은 것이 아닌데도 종미는 고맙다는 말을 깎듯이 했습니다.

그런데 저녁 시간에 식당에서 만난 종미의 손목에는 꽃시계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비록 가짜시계지만 오래 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에 섭섭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이 꽃시계 차는 것을 쑥스러워할 수도 있겠다 싶어 그냥 넘기려 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어 마음을 졸이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종미야, 손목에 선생님이 채워준 꽃시계가 없네?"

"방에 잘 놔두고 왔어요. 씻고 나서 다시 차려구요."

저는 그 상냥한 대답이 너무 고마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수백t의 무게로 밀면 겨우 1g의 무게로 반응을 보이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1g 밖에 주지 못한 사랑을 수백t의 눈빛으로 되돌려주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모두 다 사랑하는 저의 제자들입니다. 다만, 제가 받는 사랑의 양보다는 그들 자신의 넉넉한 사랑을 위해 저는 모든 제자들의 사랑을 받는 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지금 종미와 저는 메일을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자주 나눌 수 없는 대화를 메일을 통해서 나누기로 한 것입니다. 다음은 바쁘다는 핑계로 하루 늦게 메일로 급히 보낸 생일 축하시입니다. 월요일에 예쁘게 코팅을 해서 전해주려고 합니다.

너의 따뜻한 눈빛

지금은 새벽 3시 22분
눈을 뜨자마자 널 생각한다
어제도 널 생각하며 잠이 들었지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그것, 널 생각하며 잠이 들고
널 생각하며 잠에서 깨어나고
오늘은 너의 날이니까

잠에서 깨어나면서 문득
아, 한 번도 살아 본 적이 없는
오늘이구나, 새로운 날이구나!
넌 알까?
새로 산 신발을 차마 신지 못하고
겨드랑이에만 끼고 다녔던
그 가난했던 시절의 행복을

한 번도 신어본 적이 없는
새로 산 신발 같은 이 아침을
너의 겨드랑이에 끼고 행복하기를!
늘 있었던 헌 아침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라고
하나님이 기회로 주신 새 아침이기를!

너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말은
바로 그것, 네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
그 한 마디를 오래 기억하렴
그것이 너를 낳아주신
부모님에 대한 가장 큰 효도가 되겠기에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것이기에

고마운 종미!
선생님 힘들고 지쳐 있을 때
조용히 날 바라보던 너의 따뜻한 눈빛
오래 오래 잊지 않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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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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