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용봉향로(龍鳳香爐)
"으윽! 으으윽! 아악! 허억! 으으으윽!"
"흐흑! 부방주님, 이제 그만하세요. 지금은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 쉬었다 하세요. 흐흑! 이러다 큰일나시겠어요. 흐흐흑!"
"아, 아니오. 누가 보던 안 보던… 으으윽! 으으으윽!"
무릎으로 걷고 있는 장일정의 무릎은 시뻘건 선혈과 흙먼지가 뒤범벅이 되어 엉망이었다. 그가 가고있는 곳은 무천의방의 담장 안쪽에 마련되어 있는 호젓한 산책로이다.
이 길은 환자들을 보살피느라 운동할 시간이 없는 무천의방 의원들을 위하여 약 십여 년 전에 조성된 길로 비가 와도 신발이 젖지 않도록 촘촘하게 돌을 박아놓은 포장도로이다.
두 사람이 간신히 지날 만큼 좁게 만들어져 있지만 좌우에 기기묘묘한 기암괴석과 온갖 향기를 뿜는 기화요초들이 심겨져 있고, 수목 또한 우거져 있어 제법 운치가 있는 길이다.
따라서 천천히 걸으면 피곤한 심신이 조금이라도 이완될만한 그런 곳이었다. 이 세상 어느 곳의 산책로와 견주어도 조금의 손색이 없는 그런 길이다. 따라서 무천의방 소속 의원들이 많이 이용할 것 같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아마 이 길을 애용하는 의원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신임 방주가 된 속명신수 담천우가 산책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냉정하고, 괴팍하면서도 냉혹한 성품인 그는 무엇이든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였다. 워낙 승부욕이 강해 남에게 지고는 못사는 성미 때문일 것이다.
담천우가 이 길을 산책로로 애용하기 시작한 것은 처음 만들어진 직후부터였다. 사실 이 길은 그가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내놓아 조성된 길이었다.
처음 길이 만들어졌을 땐 무천의방의 의원들이 너도나도 이 길을 애용하였다. 그런데 그때부터 별일도 아닌데 불이익을 당하는 의원들이 속출하기 시작하였다.
전에는 실수를 해도 낡은 의서(醫書)를 필사(筆寫)하거나 병부(病簿)를 다시 만드는 등 귀찮은 일을 시키는 정도였다.
그런데 산책로가 만들어진 이후부터는 가혹하다면 가혹한 체형(體型)으로 다스려지곤 하였다.
팔 년 전, 의원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오른손이 잘려지는 형벌에 처해지고 무천의방 밖으로 내침을 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그가 그런 형벌을 당한 이유는 마땅히 뜸으로 다스려야 할 환자를 침으로 다스려 치료기간이 조금 길어졌다는 것뿐이다.
그렇다고 치료가 안 된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걸리긴 했어도 환자는 멀쩡히 걸어나갔던 것이다.
사실 이런 일은 의가(醫家)의 상사(常事)라 할 수 있는 일인지라 크게 다스림을 당하고말고 할 것도 없는 사소한 실수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목이 잘려지는 형벌을 당하고, 무천의방에서 제명 당하는 불명예를 당한 진짜 이유는 속명신수 앞길을 가로막고 산책을 하였다는 것뿐이다.
그때 이후 이 길을 이용하는 의원은 속명신수 한 사람 뿐이었다. 물론 그의 심복이나 마찬가지인 몇몇 의원들이 가끔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나마 속명신수와 동행할 때뿐이었다.
아무튼 표면이 거친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이 길은 몹시 울퉁불퉁한데, 워낙 사용자가 적어 처음 만들어진 상태 그대로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길을 만들 때면 거친 것도 매끈하게 하는 법이건만 이 길이 이런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진료를 하다보면 잠시도 쉬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상태가 위중한 환자가 있거나, 환자들이 밀려드는 경우가 그렇다.
이럴 때면 쉬지 못하는 것은 물론 끼니를 거르거나 아예 한 사흘 동안 눈도 못 붙이는 경우가 있다.
특히 내원 소속 의원들이 이런 경우를 가끔 겪는데 성주 일가 중에 환자가 있을 때가 바로 그렇다. 시간이 있음에도 일부러 병상을 떠나지 않고 그야말로 지극 정성으로 보살핀다.
승차(陞差 :진급)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거나, 아니면 푸짐한 은상을 기대하기 때문에 일부러 그러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경우 의원들은 심각한 피로감을 느끼게 되고,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되면 병을 얻게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길을 울퉁불퉁하게 만든 것이다. 사람의 발에는 반사점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인체 내부의 장기와 연관이 있어 여기를 자극하면 내장 운동이 활발해지는 등의 효과를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반사점을 자극함으로서 피로를 풀려고 일부러 울퉁불퉁하게 길을 닦은 것이다. 이 길은 걷기만 하면 체중에 의한 지압 효과를 보게되어 묵은 피로가 풀리는 그런 길인 셈이다.
신발을 싣고 걸어도 발바닥이 강한 자극을 받을 정도인데 장일정은 그런 길을 무릎으로 걷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관문을 늦게 통과하는 바람에 무천의방의 부방주가 된 장일정은 취임과 동시에 선서를 해야 했다. 무림천자성에 절대 충성할 것이며, 모든 규율을 철저히 따르겠다는 것이다.
이 세상 어떤 조직이든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규율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배울 만큼 배웠다는 사람들의 집단인 황궁 한림원(翰林院)이라 할지라도 결코 예외일 수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집단이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상명하복(上命下服)과 충성이다. 무천의방의 규율의 역시 그렇다.
다만 다른 집단과 차이점이 있다면 제법 삼엄하다는 것이다. 사소한 실수가 환자의 생명을 좌우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무천의방을 자세히 살펴보면 내원과 외원으로 나뉜다.
내원은 방주가 총괄하는데 무림천자성 수뇌부들과 그들의 식솔에게 병이 있을 때 진료를 나간다. 따라서 무천의방 소속 의원들 가운데 가장 의술이 뛰어난 자들로 채워져 있다.
외원은 부방주가 책임지고 운영하는데 일선에서 온갖 전투에 참여하는 정의수호대원들은 물론 무림천자성의 하인 등을 진료하는 곳이다. 이곳은 내원에 들지 못한 의원들이 배속되어 있다.
외원은 내원에 들기 위한 수련과정인 셈이다. 워낙 환자가 많은 데다가 별의별 환자가 다 있기에 임상 경험을 얻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다 하여도 과언이 아닌 곳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무천의방의 의원들은 총 이천여 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백여 명만이 내원 소속이고, 나머지 일천팔백여 의원들은 외원 소속이다.
숫자상으로 외원이 월등하게 많기에 한가하다 생각할 수도 있으나 실상을 전혀 그렇지 않다. 의원들의 수효가 아홉 배 많은 대신 환자들의 수효는 거의 오십여 배에 달하기 때문이다.
심한 때에는 거의 백여 배에 달하는 날도 있다.
두창(痘瘡 :천연두)이나 대풍창(大 瘡 :문둥병, 한센씨 병)과 같은 전염병이 돌거나 대규모 전투를 벌인 직후가 그런 날이다.
그런 날은 숨쉴 틈도 없이 환자가 밀려들기에 외원 소속 의원들은 그야말로 뭐 보고 뭐 털 시간도 없을 정도이다. 아무튼 오늘도 외원 소속 의원들은 격무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다.
오늘 장일정이 이런 형벌을 받고 있는 이유는 상처를 치료한 후 이를 보호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붕대(繃帶) 때문이다.
상처 입은 부위는 예민하기 때문에 삼베처럼 면이 거친 천은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심한 통증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값비싼 비단을 사용할 수도 없다.
부드러워 좋기는 하지만 워낙 고가(高價)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로 사용되는 것이 바로 목면(木棉)이다. 목면은 면화(棉花)에서 얻은 실로 짠 천으로 흡수성이 좋고, 그런 대로 통기성(通氣性)까지 지니고 있어 상처를 감싸는 데 더 없이 좋았다.
이러한 붕대를 내원에서야 한번 쓰고 버리지만 외원에서는 한번 쓰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웬만하면 세탁을 한 후 재사용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외원을 찾는 환자가 워낙 많기 때문에 사용되는 양 또한 무척 많으므로 많은 비용이 지출되자 그런 규칙을 만든 것이다.
이런 규칙을 만든 사람은 전임 부방주인 속명신수이다. 이렇게 하여 절감된 비용은 모두 그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다.
무천의방을 생각해서 만든 규칙이 아니라 순전히 제 배를 불리기 위하여 만든 규칙인 셈이다.
아무튼 목면으로 만든 붕대는 다 좋은데 이것에 배어든 핏물이나 고름을 빼내기가 무척 힘들다는 단점이 있다.
아무리 열심히 빨아도 완벽하게 빠지지 않는다. 하여 새것이 아니면 누리끼리한 색상을 띄기 마련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무척이나 지저분해 보이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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