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적· 관동군·독립군의 각축장이었던 만주 벌판

항일유적답사기 (44) - 합니하

등록 2003.06.26 10:06수정 2003.06.26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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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적

중국의 마적은 그 역사가 뿌리 깊다.


그 기원을 몽고족·달단족(타타르 족, 중앙아시아에 살던 몽고족의 한 부족) 같은 유목민족의 침입 약탈에서 시작되었다는 설과 한(漢) 나라 말기 망명객들의 약탈 행위에서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마적의 역사는 자그마치 2천년이나 된다.

이들 마적들이 마구 날뛰던 시기는 주로 왕조 말기 왕권이 쇠약하거나 정치가 부패하고 사회가 불안할 때였다.

근세에 와서는 청조 말에서 1940년대까지 화북·동북 일대에는 마적단들의 군웅할거 시대로 매우 극성을 부렸다. 원래 마적들은 그 지방의 악덕 관리나 다른 지방의 군벌들의 착취와 약탈 행위로부터 주민을 보호했지만, 한편 이들이 다른 지역을 침입할 때는 비적(匪賊)과 똑같이 약탈과 폭행을 일삼았다.

a 지난날 마적 관동군 독립군의 각축장이었던 풍운의 만주 벌판

지난날 마적 관동군 독립군의 각축장이었던 풍운의 만주 벌판 ⓒ 박도

만주의 정치·군사는 이 마적과 떼어놓을 수 없을 만큼 그들의 활동 무대였다. 이들 마적들은 때를 만나 성공하면 군벌로 출세하여 천하를 호령하였고, 때를 만나지 못하면 도적으로 마을을 털고 다녔다.

한때 중화민국 대원수였던 장작림도 마적단 두목이었고, 괴뢰 만주국 총리 장경혜도 친일 마적 훈견호의 부하였고, 흑룡강성 군벌 마점산도 마적 출신이었다.


일제는 자기네 대륙낭인·장사패들을 만주 마적단에 침투시키거나, 친일 마적단을 새로 조직하거나, 아니면 토착 마적단을 매수하여 대륙 침략에 교묘하게 이용하였다.

일제는 이들을 이용하여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 훈춘사건 때도 이들을 매수하여 경신참변을 일으켰고, 9.18 만주사변 때는 일본 관동군이 장작림을 폭살시킴으로써 전쟁을 일으켜 마침내 만주를 자기들의 손아귀에 넣었다.


또한 일제는 친일 마적단을 이용해서 만주에 거주하고 있는 우리 독립투사와 가족들을 토벌케 했다. 하지만 이들 마적 중 일부는 일제의 간계에 놀아나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만주사변과 괴뢰 만주국 수립에 반발하여 강력한 반만 항일 세력을 구축하였다.

이에 노동자 농민들이 대량으로 호응하여, 항일 전선에 참가한 무장 인원만 한때 30만명에 이르기도 했다. 지난날 만주는 마적과 일제 관동군, 우리 독립군들이 서로 각축을 벌였던 풍운의 대륙이었다.

합니하

통화(通化)로 가는 도중, 정겨운 강을 만났다. 김 선생은 차를 세웠다. 이 강이 그 유명한 합니하(哈泥河)라고 했다. 이른 새벽부터 달린 승용차의 엔진 열도 식힐 겸, 강가에서 잠시 쉬었다.

고대 문명 발상지가 모두 강가이듯 우리 독립운동 요람지도 거의 다 강을 끼고 있었다. 압록강을 건넌 망명객들은 농사짓기 좋은 곳을 찾다보니 이 합니하 유역에 많이 몰려 살았다.

a 이름도 정겨운 합니하, 우리 독립군 요람도 이 강 유역에 흩어져 있었다.

이름도 정겨운 합니하, 우리 독립군 요람도 이 강 유역에 흩어져 있었다. ⓒ 박도

만주 독립운동사를 보면 이 합니하 강 이름이 심심찮게 자주 나온다. 신흥무관학교 전신인 신흥강습소도 합니하 유역이었고, 우리 독립군 부대 최초 군영(軍營)이었던 통화현 팔리초구 소베차의 백서농장(白西農庄)도 이 강 상류에 자리 잡았다.

백서농장은 백서(白西)라 함은‘백두산의 서쪽’을 뜻함으로 농장이 아니라 군영인 바, 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렇게 붙여진 이름이다.

1914년 가을부터 신흥학우단과 부민단 간부들은 신흥학교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하는 군영을 설치하기로 하였다.

이들 간부들은 소베차 지역 일대에 벌목을 시작하여 병영을 만든 후, 1917년부터 신흥학교 1회부터 4회까지 졸업생 일부와 신흥학교 각 분교와 노동강습소에서 훈련된 385명을 입영시켰다.

“이곳은 사람의 발자취가 닫지 않은 원시 밀림 지대로써 곰 멧돼지 오소리 등 산짐승이 득실거리는 깊은 산골짜기였다. 이곳에 막사를 짓고 큰 뜻을 품은 동지들이 모여들어 새와 짐승을 벗삼아 스스로 밭 갈고 나무하는 농사꾼이 되어 도원결의(桃園結義)의 굳은 맹세를 방불케 하였다”라고 원병상은 <신흥무관학교>에서 그 당시를 묘사하였다.

백서농장의 장주(庄主)는 일송 김동삼 선생으로 애초 설립 배경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중·일간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이 기회를 틈타서 독립전쟁을 펼치려다가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장차 대일 무장투쟁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이곳은 교통이 불편해서 1919년 3.1운동 후 한족회의 총회 지시로 문을 닫았다. 여기에 배속된 이들은 곧 상해임시정부의 관할 아래에 있었던 서간도 지구 군사기관인 서로군정서로 확대 개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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