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덫 걸려 옥사한 '남만의 맹호'

항일유적답사기 (45) - 김동삼

등록 2003.06.27 10:10수정 2003.06.27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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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 김동삼 선생 (하얼빈 일본 영사관 지하 감방에 수감 중일 때)

남만의 맹호

후세 사가들은 독립운동 초기 만주의 3대 무장항쟁 지도자로 김동삼(金東三), 오동진(吳東振), 김좌진(金佐鎭) 장군을 꼽는다.

독립운동의 방법은 여러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독립운동가에게 군자금을 대는 일, 외교로써 국권회복에 이바지하는 일, 우리말과 글을 지키는 일, 독립군에게 주먹밥을 만들어 주고 잠자리를 마련해 준 일 등, 모두 당시로써는 위험을 무릅쓴 눈물겨운 항일운동이다.

하지만 포악 무도 간악한 일제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방법은, 그들과 정면으로 총칼을 들고 맞서 싸우는 무장 투쟁이었다. 그분들은 이 방법만이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믿고 행동했다.

어떤 이는 세계 정세를 모르는,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무모한 투쟁이었다고 말할 지 모르겠지만, 총칼로 나라를 빼앗은 흉악 무도한 일제 무리에게 도의나 양심으로 호소해 보았자 쇠귀에 경 읽기요, 그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헤이그 밀사사건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또 외세에 의존해서 국권을 회복한다면 광복 후 또 다른 외세의 지배에 놓이게 된다. 오늘 우리의 현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당시 일제와 맞서서 무장 투쟁을 벌인다는 것은 당랑거철(螳螂拒轍)로 사마귀가 수레를 막는 무모한 투쟁이요, 승산 없는 전쟁이었다. 그것도 내 나라가 아닌 남의 땅, 갖은 악조건 속에서의 무장투쟁은 상상을 초월한 가시밭길이었다.

이분들은 무슨 대가를, 훈장을 바라고 투쟁한 것이 아니다. 이 땅의 한 백성으로, 한 유생으로 나라를 빼앗겼으니 마땅히 백성이 된 도리로, 도적으로부터 나라를 찾아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만일 이분들의 빛나는, 피 흘린 투쟁사가 없었다면 오늘 우리는 얼마나 참담한 심정일까?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어찌 말할 수 있으며, 민족 정기를 어찌 논할 수 있으랴.

일송 김동삼은 1878년 경북 안동의 유림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義城), 본명은 긍식(肯植), 호는 일송(一松)이었는데, 뒷날 만주로 망명하여 동북삼성의 독립운동단체와 독립운동지도자들을 대동 단결시키기 위해 당신 이름까지 동삼(東三)으로 고쳤다.

일송은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후예로 한학 수학에 전념하며 소년기를 보냈다. 청년기에 일제 침략이 노골화되자 개신 유학자로 국권 회복을 위한 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일송은 비분강개하여 안동지방의 보수 유림의 완고한 풍습을 혁파하고 자주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신서적도 많이 읽고 여러 개화사상가들과 접촉하였다.

일송이 29세 되던 1907년, 이상룡․유인식 등과 같이 사립 협동학교를 설립하고 교감으로 취임하여 청년들에게 신교육을 가르쳤다.

협동학교 교직원과 학생들이 단발을 하자 보수 유림의 거센 반발에 부딪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를 극복하여 후일 3․1운동에는 협동학교가 안동 의거의 중심이 되었다.

1910년, 일송은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합방되자 국내에서 국권회복운동에 한계를 느낀 나머지 이듬해 협동학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한 후, 신민회의 해외 독립기지 건설에 동참하여 뜻 있는 동지들을 인솔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에 정착한 일송은 우선 민단 자치단체인 경학사에서 조직과 선전을 맡았다. 일송은 매일 백여 리나 되는 벌판을 뛰어다니면서 북간도 서간도 각지에 흩어진 동포를 찾아다니면서 독립운동에 협력을 호소하였다.

당신의 차림은 어깨에 담요 한 장을 메고 한푼 짜리 만주 전병으로 요기하면서 겨울에도 ‘싸이헤’라는 만주인 여름신발을 신고 강행군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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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독립군들의 무장 투쟁 주무대였던 조중 국경지대 ⓒ 박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송은 중․일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이 기회를 틈타서 일제와 독립전쟁을 펼치려고 백서농장을 세웠다.

하지만 중․일전쟁의 불발로 수포로 돌아가자 후일을 대비했다. 이 무렵 일송 선생은 대종교에 입교하였는데, 이것은 조국 광복을 위한 민족 정신의 함양 때문이었다.

1918년 일송은 만주와 러시아 등지에 망명하고 있던 지사들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여 김교헌(金敎獻)․조용은(趙鏞殷 : 조소앙)․김규식(金奎植)․이상룡․여준․김좌진․이동녕 등 39명이 연서하여 대한독립선언서〔통칭 무오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 선언서는 1919년 2월에 발표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기초된 것은 1년 전으로 3․1운동에 앞서 해외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인 의미가 매우 크다.

기미독립선언서가 비폭력적인 독립운동을 지향함에 견주어 무오 독립선언서에서는 “…육탄 혈투(肉彈血鬪)하여 독립을 완성할 것이다.”라고 무장 독립투쟁의 의지를 보인 점이다. 이 선언서로 만주 러시아 일대의 동포들에게 독립심을 한결 드높였다.

이후 일송은 서로군정서 참모장(1919년), 대한통의부 총장(1922년), 상해국민대표회 의장(1923년), 전만통일의회 의장(1924년), 정의부 참모장(1925년) 등 독립운동의 요직을 두루 맡았다.

서로군정서 참모장 당시 무장 투쟁을 안양교도소에 보관된 일제의 기록에 따르면, 일송의 지령으로 국경을 넘어 일경과 싸워 체포된 것만 7건 19명에 이르며, 13명의 일경을 사살했다.

정의부 참모장 때인 1925년 3월부터 국내 진공을 개시하여 3월 19일에는 초산의 일경 추목주재소와 옹암주재소를 습격하여 일경 5명을 사살하고, 무기 다수를 노획하여 적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그 해 7월 4일에는 7명의 독립군이 평민으로 가장하여 평안북도 철산의 차련관주재소를 습격해서 일경 4명을 사살하고 무기 전부를 접수했다. 또, 8월 18일에는 벽동 일경 여해출장소를 습격해서 일경 3명을 사살하고 출장소를 불태웠으며 무기 전부를 탈취했다.

이로써 독립군의 용맹은 국내에 크게 떨치게 되었고, 일제는 ‘독립군’이라는 말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했다. 이 모든 무장 투쟁을 진두 지휘하면서 몸을 아끼지 않았던 일송 선생은 ‘남만의 맹호’라는 별칭을 얻었다.

일제의 덫에 걸린 맹호

일송은 1926년에는 2월과 8월 두 차례나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임명되었으나,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취임하지 않았다.

1928년에는 길림에서 정의부 대표로 김좌진․이청천 등과 함께 참의부․정의부․신민부의 삼부 통합회의 진행을 맡았고, 그 해 12월에는 혁신회의 의장을, 1928년 5월에는 민족유일당 조직운동에 착수하여 수석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일송의 위대한 점은 무장 항일투쟁에만 있는 게 아니라, 언제나 독립군 여러 계파의 통합과 그 분열을 막는데 앞장 선 점이다. 일송에게는 국권회복의 지름길은 이념과 사상을 초월한 독립운동 계파의 통합만이 지상 명제였다. 일송은 언제나 통합 운동에 선봉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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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밀정 밀고로 체포된 일송 선생이 온갖 고문을 받았던 하얼빈 일본 영사관 ⓒ 박도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 일본군이 만주 동북지역으로 침략해 오자, 길림성 독군 희흡(熙洽)으로부터 일송에게 한중 연합군 설치를 추진하자는 제의가 왔다.

이에 일송은 동지들과 길림으로 가서 한중 합작으로 항일연합전선을 펼 것을 의논하고 하얼빈으로 돌아오던 중, 일제의 밀정 밀고로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었다. 일제 관헌은 일송을 체포하는 데 혈안이 되어 사방에 거미줄처럼 밀정들을 풀어뒀던 것이다.

일제는 하얼빈 일본영사관 지하감방에서 일송에게 갖은 고문과 악형을 서슴지 않았다. 일체의 차입이 허락되지 않음은 물론 전기 고문, 양팔을 등뒤로 묶어 공중에 매달고 코에 물을 붓는 등, 참혹하기 짝이 없는 온갖 고문을 다했다.

일송은 갖은 고문에도 함께 투쟁한 동지의 이름을 결코 팔지 않았다.
일송은 국내로 압송되어 신의주법원에서 10년형의 판결을 받고 서울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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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주선으로, 일송 선생 손자 김중생 선생과 <한용운 평전>을 쓴 고은 시인이 덕수궁 대한문에서 만났다.(2002. 9) ⓒ 박도

언제나 독립전선 선봉장에서 몸을 아끼지 않았던 일송이지만, 그러나 당신 나이는 이미 중로를 넘겼고, 일제의 고문과 좌절된 항일운동에 대한 울분으로 건강이 날로 악화되어 감옥생활 6년 되던 해인 1937년 3월 3일에 옥사했다.

그때 가족은 모두 만주에 있었고, 일제의 야만성이 극도에 이른 때라 친지 중에 누구 한 사람 나서서 시신을 염습할 이가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만해 한용운이 나섰다. 당시로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죽음을 무릅쓴 용기였다.

만해는 일송의 시신을 수습하여 당신이 거처했던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 옮겨 장사를 치렀다. 이는 일찍이 만해가 만주 망명 시절에 일송을 만나 뵙고 받은 인품에 대한 감명과 독립투사에 대한 의리 때문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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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백화점 ⓒ 박도

“김 선생이시여, 김 동지여, 이 산하를 두고 가시다니! 이 산하 어디 가서 큰 인물을 찾겠습니까? 김 동지여!”

“이제 이 나라에는 인물이 없게 되었어. 일송 김동삼 동지 만한 인물이 어디 있어.”

일송의 시신을 껴안은 만해의 절규였다. 그때 일송 선생 장례식에 참배한 인사로는 정인보․김병로․홍명희․이인 등 민족의식을 지닌 20명 안팎이었다고 <한용운 평전>에 전한다.

11시 50분 통화현(通化縣)을 지났다. 통화는 꽤 큰 도시로 고층 건물도, 백화점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아가씨들의 차림새도 미니스커트, 핫팬티 차림이 많았다. 개방의 서구화 물결이 물씬거리는 거리였다.

이 통화는 초기 한인들의 이주한 길로 나라 잃은 많은 망명객들의 발자취가 남겨진 곳일 뿐 아니라, 이곳 역시 남만 독립군단의 군사 근거지이자 활동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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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시 중심가, 삼륜오토바이가 눈에 많이 띄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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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시가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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