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고구려 ·발해의 옛 땅이여!

항일유적답사기 (46) - 집안

등록 2003.06.28 14:16수정 2003.06.28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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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호태왕비) ⓒ 박도

고구려 ·발해의 옛 땅

통화를 지나 집안(輯安)으로 들어가자 산세가 점차 험해지고 산하 모양새가 우리나라와 비슷했다.

지난날 이 일대가 고구려․발해의 옛 땅이었던 탓일까? 국경이 가까울수록 어쩐지 한국적인 냄새가 물씬하다. 연어도 제 태어난 고장은 감각으로 알고 찾아온다는데 하물며 사람이 제 조국이 가까워 옴을 느끼지 못하랴.

산마루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나라 밖에서야 제 나라의 참 모습을 안다는 말처럼, 세계 여기저기를 가 보아도 우리나라 산하만큼 아름다운 나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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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유역의 국경지대 산비탈은 온통 인삼밭이었다.

몇 해 전에 유럽대륙을 둘러보았을 때도 느낀 바지만, 이번 중국대륙을 훑으면서도 우리나라 산하처럼 아가자기한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중국은 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땅덩어리가 넓다는 데 입을 다물지 못했을 뿐이었다. 국경 산악지대는 온통 인삼밭이다. 여기서 재배된 인삼이 한국시장에 흘러 들어가면, 한국 인삼 재배 농가에 막대한 타격을 줄 것 같았다. 이미 이런 징후가 나타나고 있는가 보다.

집안은 길림성 최남단 국경도시로 우리 독립군 참의부의 주된 근거지였다. 이 도시는 중국 땅이지만 서기 3년부터 427년까지 424년 동안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지였다.

그래서 이 도시에는 고구려의 성벽, 석각, 무덤, 벽화 등 문화 유적들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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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시를 누비는 삼륜오토바이 ⓒ 박도

차가 집안 시내에 머물자 오토바이를 개조해 만든 삼륜차와 택시 기사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김 선생과 왕빙은 집안 시내에서 쉬기로 하고, 나와 이 선생은 그들 중, 조선족 삼륜차 기사의 차에 옮겨 타고 광개토대왕비가 세워진 곳으로 갔다.

오토바이 기사는 이름이 심봉운(40)으로 자기 할아버지 고향이 울산이라고 했다. 이 도시에는 오토바이를 개조한 삼륜차가 주종을 이루고, 그 틈바구니에 일반 승용차와 마차들이 비집고 다녔다.

호기심에 삼륜차를 택하여 탔지만 언덕길에서는 속도를 내지 못하고 걸핏하면 체인이 벗겨져 시간이 택시보다 배는 더 걸렸다.

광개토대왕비는 집안 시내에서 약 4킬로미터 떨어진 대왕향(大王鄕)에 있었다. 입장료가 30원으로 외국인에게는 더 받는다고 했다. 나는 그때까지 광개토대왕비로 알고 있었는데, 비각의 현판에는 호태왕비(好太王碑)로 새겨있었다.

이 비석은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이 선왕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서기 414년에 이곳에다 세운 것이다. 비의 높이는 6.39미터에 무려 37톤이나 되는 4면의 현무암 바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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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 ⓒ 박도

4면에는 모두 1,775자의 비문이 새겨졌다고 한다. 이 비문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1884년 일본 육군참모부 포병중위로 첩보요원이었던 사까와 카게노부에 의해서였다.

첫 단추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일본은 한때 이 비를 일본에 가져가 국보로 삼아야겠다고 여길 만큼 비문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그것은 이 비문이 당시 일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고 있었던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마침, 나는 대학 2학년 때, 강만길 교수로부터 〈사적해제〉강좌를 수강한 적이 있었는데 꽤 여러 시간 동안 이 비문에 대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어, 이 비문에 대한 구구한 해석이 한일 역사학자 사이에 문제되고 있음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교활한 일본인이 이 비문의 글자를 훼손 날조하여, 자기네들이 4세기에 한반도 남단에 일본의 식민지를 건설하였다는 억지 주장을 합리화시킨 비열한 역사 왜곡이라고 비분하시던 모습이 선하다.

내 얕은 학식으로 비문을 몇 자 읽을까하여 비석에 다가섰으나 오랜 풍상에 마모된 탓으로 비문의 글자는 거의 해독할 수 없었다. 중국 정부에서는 역사적 유물로써의 가치와 관광 자원 보호를 위해 더 이상 마모를 방지하고자, 1982년 현재의 비각을 지어 비석을 보호하고 있다고 했다.

장군총(將軍塚)은 호태왕비에서 조금 떨어진 압록강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다. 5세기에 건립된 이 장군총은 고구려 제20대 장수왕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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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제20대 장수왕 무덤으로 추정되는 장군총 ⓒ 박도

장군총은 각 변의 길이가 31. 6미터의 정방형으로 1천여 개의 가공한 화강암을 7층 계단식으로 쌓아 올렸다. 맨 위층은 묘실이었는 데 관을 놓았던 석관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중국 인민정부에서 관리하고 있다지만 아무나 장군총을 오를 수 있어서 이대로 내버려둔다면 한낱 돌무더기에 지나지 않을 것 같아서 나그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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