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이념-세대를 초월한 만남

항일유적답사기 (50) - 선양(Ⅰ)

등록 2003.06.29 13:44수정 2003.07.06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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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이념 세대를 초월한 어깨동무 (중국군 하사관 왕빙과 함께) ⓒ 박도

선양

11시30분, 긴 여로 끝에 선양〔瀋陽〕에 도착했다.

이따금 내리던 비가 선양 시내에 들어서자 굵은 빗줄기로 변했다. 조선족 거리인 서탑가(西塔街) 녕대빈관에 여장을 풀었다.

꼬박 나흘 동안 신세를 지고 정이 들었던 운전 기사인 왕빙과 헤어질 시간이었다. 이번 동북 항일 유적지 답사를 편안하고 시원하게, 짧은 기간 예상보다 더 많은 유적지를 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왕빙의 운전 솜씨와 그의 젊음 덕분이었다.

그는 우리와 동행하면서 조금의 불평도 피로감도 보이지 않고, 내가 사진 촬영을 위해 여러 번 달리는 차를 세워도 싫은 기색 없이 멈춰줬던 순박하고 해맑은 청년이었다.

나는 왕빙과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아 많은 대화는 나누지 못했지만, 마음과 마음이 통한 탓인지 그가 마치 내 아들처럼 귀엽고 믿음직했다. 그와 나는 무슨 이념의 차이기 있을까?

서로 다른 체제에서 산다는 것뿐, 사람의 근본은 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어지기 직전, 나와 그는 굳은 악수를 나누고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서로간 나이를 초월하여 스스럼 없이 어깨동무로 기념촬영도 했다.

그는 장대비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온종일 장춘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 선생은 그의 노고에 감동된 듯 주머니를 털어 주셨다. 언제 다시 만날 인연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의 정이란 국경도 피부색도 초월하게 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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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8 기념탑 ⓒ 박도

한편으로는 어릴 때부터 중국군이면 무조건 나쁘다는 주입식 교육의 해독이 오래 남아 사물을 바로 보지 못하는 실례를 몸소 겪었다.

이심전심이었는지 그와 나는 몇 차례나 손을 흔들었다. 그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나는 그의 여운에 취해 그가 사라진 뒷모습을 한참동안 그렸다. 사람의 정이란 이런 걸까?

객실에 오른 후 샤워를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금세 기분이 산뜻해졌다. 밖은 비가 계속 쏟아지지만 객실에서 빈둥거리기에는 좀이 쑤셨다. 12시10분에 빈관을 나와 선양 시내 답사 길에 올랐다.

9·18 기념탑

먼저 택시로 선양시 북쪽 왕화가〔望華街〕에 있는 '9·18 기념탑'으로 갔다.

이곳은 만주사변의 불길이 치솟은 발화 터다. 돌로 만든 10미터 높이의 탑에는 '1931年 9月小 18 星期五 農曆辛未年'이라는 비극의 그 날 달력을 크게 새겼고, 책을 펼친 모양의 탑 군데군데에는 총알 자국과 대포를 맞은 자국처럼 홈을 파고 구멍을 뻥 뚫어놓았다.

9·18 만주사변의 치욕을 잊지 말자는, 총알과 대포알이 중국인의 가슴에 상처를 남겼다는 뜻으로 조각한 모양이었다.

전시실 1층 벽에는 새겨진 '勿忘國恥'(물망국치 : 나라의 치욕을 잊지 말자)이라는 글이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우리나라나 중국이 모두 일본에게 당한 동병상련의 마음인가 보다.

1931년 9월 18일 밤 10시경, 선양(당시 봉천) 북쪽 류타오후(柳條湖)의 만주 철로가 누군가에 의해 폭파되었다. 그것은 일본 관동군의 참모 이타카키가 계획적으로 일으킨 것으로, 1928년 6월 3일에 있었던 장작림 폭사사건의 재판이었다. 그러나 일본 관동군은 이를 중국군의 소행이라고 생트집을 잡아 만주 전역에서 군사행동을 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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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기념탑 ⓒ 박도

이튿날 일본 관동군은 봉천성·북대영(北大營)·봉천 비행장을 수중에 넣고, 이어서 랴오닝성·길림성을, 이듬해 2월 5일에는 하얼빈을 점령함으로써, 일제는 동북 전지역을 장악하였다. 그런 후 그해 3월 괴뢰 만주국을 건립하여, 마침내 1934년 3월에는 청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溥儀)를 자기네 꼭두각시로 만들어 만주국 황제로 등극시켰다.

이 만주사변은 우리 독립군 진영에도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일제는 자기들의 식민지 강화를 위하여 1932년 봄부터 조선족이 모여 사는 집단부락에 대해 미친 듯이 토벌을 감행하여 수많은 참상을 빚었다. 이때부터 독립군 진영에서는 더욱 더 중국공산당과 연합작전을 강화했다. 독립전사 중에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기도 했고, 일부는 빨치산투쟁으로, 일부는 일제에 투항하기도 하고, 고국으로 잠입하기도 했다.

전승 기념탑

다음은 선양역으로 갔다. 선양역 일대는 러일 전쟁 전에는 러시아의 조차 지역으로 선양역을 비롯한 일대 건물들이 지금도 대부분 러시아 풍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러일 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1905년 미국 포츠머스에서 체결된 '러·일 강화조약'에 따라 일본에 넘어가 버렸다. 그러다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다시 중국 정부에 돌아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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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양 역 ⓒ 박도

선양역 광장에는 전승기념탑이 높게 서 있는바, 탑의 꼭대기 탱크가 포문을 러시아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동행한 김 선생은 중국이 '자기네를 해방시켜준 러시아에 감사하다는 뜻'을 표시하기 위해 그렇게 만들었다고 설명을 해 주었다.

선양역 앞 만두집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부근에 있는 공안국을 찾아 나섰다. 장대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공안국은 선양역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음에도 정확한 위치를 몰라 여러 사람에게 물어갔더니 결과적으로 한바퀴 돈 셈이라 쓴웃음을 지었다.

그 새 옷이 쫄딱 젖어 버렸다. 정문 앞에는 경비원이 떡 버티고 있어서 그의 눈을 피해 길 건너편에서 재빨리 카메라의 셔터를 눌렸다. 경비병에게 정직하게 부탁하면 십중팔구는 찍지 못하게 할 테고, 아니면 책임자의 허락을 받아오라면 그 날 일정은 말짱 도루묵이 된다.

대체로 중국인들은 일을 빨리 처리해주지 않고 무조건 기다리게 한다. 이편에서 지치게 한다. 그래야 그들이 유리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천수동 임장에서 이미 경험한 바 있음)

이곳은 1925년 6월 11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三矢)와 봉천성 경무국장 우진(于珍) 사이에 맺어진 이른바 '미쓰야 협정(원명 不逞鮮人의 取締 방법에 관한 조선총독부와 봉천성 간의 협정)'
이 체결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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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양공안국 ⓒ 박도

이 협정의 주요 내용은,

제2조. 중국 관헌은 각 현에 명령을 내려 중국에 거류하는 조선인이 무기를 휴대하고 조선에 침입하는 것을 엄금한다. 이를 범한 자는 체포하여 일본 관헌에게 인도한다.

제3조. 불령선인 단체를 해산하고 그들이 소지한 총기를 수색하여 이를 몰수하고 무장을 해제한다.

제5조. 일제가 지명하는 불령단 수령(독립군 우두머리를 말함)을 체포하여 일본 관헌에게 인도한다.

이 협정으로 당시까지 항일 독립군에 대하여 비교적 방관적 태도를 취하던 동북의 군벌들이 적극적으로 독립군을 탄압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수많은 독립군들이 중국 관헌에 체포되어 일제의 관헌에게 넘겨졌다.

또한 일제의 관헌들은 중국 군경과 합동하여 독립군을 검거 색출하여 한국으로 압송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우리 독립군들은 이 협정으로 더욱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항전은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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