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179

일지매 (2)

등록 2003.07.08 14:45수정 2003.07.08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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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산해관 인근의 모든 기원은 하루에 얼마를 벌어들였는지를 도저히 속일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누군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세작(細作 :첩자)들이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속였다가 발각되면 아예 작살이 나기에 곧이곧대로 수입 신고를 하는데 그러면서 누가 세작일까를 아무리 살펴봐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기원의 원주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무림천자성의 치밀함과 간교함에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무림천자성이 상권을 완전 장악하기 전과 같은 부(富)를 축적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지만 협도당이 다녀가면 사정이 많이 달라진다. 오백냥을 털리고도 오만냥이나 털렸다고 해도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협도당은 기원이나 전장, 혹은 도박장과 같은 곳을 주로 턴다. 이곳에서는 은자를 주로 가져가는데 때로는 싸전(쌀가게)이나 비단전(비단가게)을 털기도 한다.

모두 무천장에 막대한 상납금을 지불하는 점포들이다.

그래서 이들을 잡기 위하여 정의수호대원 전원이 눈에 불을 켜고 있으나 협도당원들이 워낙 신출귀몰(神出鬼沒)한 데다가 이들을 보았다는 제보자가 전혀 없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언제 어디에서 나타날지 전혀 모르기에 신출귀몰하다 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제보자가 전혀 없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협도당 사람들이 가져간 은자나 양곡, 혹은 비단이 헐벗고 굶주린 빈촌에 뿌려진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전에 사면호협이 장주일 때에는 빈촌 사람들도 굶지는 않았다. 굶지 않을 만큼 구휼(救恤) 양곡을 배급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혈면귀수로 바뀐 후에는 단 한 톨의 양곡도 구황곡(救荒穀 :가뭄이나 장마로 인한 흉년에 기근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나뉘어지는 곡물)으로 지급된 바가 없다.

그렇기에 민심이 완전히 돌아선 것이다.

반면 협도당원들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니 현상금이 걸려있지만 제보가 있을 리 만무한 것이다. 게다가 전에 있었던 사건 하나 때문에 제보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예전에 무천장에서는 공금을 횡령한 죄목으로 무림지옥갱에 하옥된 사면호협의 여식인 추수옥녀를 잡아들일 수 있도록 제보하는 자에게 막대한 현상금을 지불한다고 공포한 적이 있었다.

그때 어떤 양민이 객잔에 있던 여인을 추수옥녀 여옥혜라면서 신고한 적이 있었다. 즉각 정의수호대원들이 출동하였고, 그녀는 현장에서 생포되었다. 그리고는 곧 국문이 시작되었다.

장형(杖刑)에 이어 압슬형(壓膝刑)이 처해졌고, 주리까지 틀었으나 여인은 자신이 추수옥녀가 아니라는 말만 되풀이하다 죽어버리고 말았다. 너무도 가혹한 고문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녀는 정말 추수옥녀와 닮았다. 그래서 그녀의 수발을 들어주던 시비들조차 구별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녀는 누군가를 닮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목숨까지 잃은 것이다.

그녀가 죽은 후 추수옥녀를 잡아들인다는 방은 거둬들여졌다. 죽은 여인이 그녀라고 굳게 믿은 것이다.

이에 신고를 한 양민은 현상금을 요구하였으나 무천장에서는 현상금 지불을 거절하였다. 죽은 여인이 자신이 추수옥녀가 아니라는 말을 하였으므로 그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핑계일 뿐이었다.

혈면귀수가 그녀를 잡아들이려고 한 진짜 목적은 그녀를 품어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혹시 감춰 둔 은자가 있나 싶어서였다.

그런데 워낙 공개적으로 일이 진행되다보니 그럴 틈도 없는 상황에서 그만 죽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약속했던 현상금을 지불하려니까 아깝다는 생각에 못 주겠다고 버틴 것이다.

한편, 막대한 현상금으로 팔자를 고칠 생각에 잔뜩 부풀어 있던 양민은 있는 욕 없는 욕을 하며 돌아다녔다.

현상금을 타면 갚을 요량으로 고문이 진행되는 며칠 동안 엄청나게 술을 퍼마셨는데 그 술값을 계산하자니 전 재산을 처분해야할 상황이 되었기에 홧김에 떠들고 다닌 것이다.

이 소리를 들은 혈면귀수는 즉각 그를 잡아들일 것을 명했고 그는 결국 절름발이가 되고 나서야 간신히 풀려났다.

감히 무림천자성을 욕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쪽 다리를 잘라버린 것이다. 물론 다시는 현상금 이야기를 꺼낼 수 없도록 겁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너무도 억울하다 느낀 제보자는 자신이 당한 부당한 처사를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대자보에 써붙여 놓고는 목을 매달아 자진해 버렸다. 이러니 제보가 전혀 없는 것이다.

아무튼 협도당에 의하여 이십여 기원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보고를 받은 혈면귀수는 귓구멍에서 연기가 솟아날 지경으로 분기탱천했었다. 자신의 주머니로 들어올 막대한 금액이 허공에서 사라진 것과 같다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랴?

신출귀몰한 협도당원들은 언제 어디에서 나타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고, 제보자는 전무하니 잡아들일 방법이 없는 것을!

협도당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녀갔다는 증표로 묵향(墨香) 그윽한 매화 한 송이를 그려놓고 간다.

그래서 협도당을 다른 말로 야래향(夜來香)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밤에만 왔다가는 데 묵향이 그윽하기에 붙은 별호였다.

"뭐 하느냐? 지금 당장 가서 그 멍청한 산해기원의 원주라는 놈을 잡아 들여라."
"조, 존명!"

보고를 하면서도 언제 불호령이 떨어질까 두렵다는 듯 잔뜩 응크리고 있던 정의수호대원은 명이 떨어짐과 동시에 복명을 하고는 그대로 신형을 날렸다.

곤혹스런 순간들이 지나고 이제야 살았다는 듯 그의 신법에는 쾌속함이 배어있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본 혈면귀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지난달을 회상하였다.

지난 달 보름 무렵, 산해기원의 원주는 점고를 받으러 왔다가 장사가 안 되었다면서 다른 기원에서 바치는 상납금의 반도 되지 않는 은자를 내놓고 갔다.

산해기원은 썩 장사가 잘 되는 곳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손해를 보는 곳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기원의 규모는 산해관에 위치한 다른 기원보다 크면 컸지 결코 작지 않은 규모이다.

따라서 그가 내놓은 상납금은 기대의 반에 반에 반도 되지 않는 그야말로 쥐꼬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을 족치지 않은 것은 금월이라는 동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본시 명망 높은 학사 집안의 규수였던 그녀는 곤궁(困窮)한 가세(家世)와 병석에 누운 노모를 구완하기 위하여 스스로 기원을 찾은 재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조신하게 수업을 받은 결과 금기서화(琴棋書畵)에 뛰어난 솜씨를 지닌 그녀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결정적인 것은 그녀가 청백지신이었고, 최근 보기 드물었던 명기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애교는 또 어떠했던가!

덕분에 혈면귀수는 지난 한 달간 오로지 금월이만 품으며 지냈다. 어제 병든 노모를 보고 오게 해달라며 애원하지만 않았다면 아마 더 오랜 기간 동안 품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녀가 있었기에 산해기원의 상납금이 작았으나 아무 소리하지 않고 넘어갔던 것이다.

"퉤에! 이놈, 오기만 해 봐라. 아예 요절을 내주고야 말겠다. 뭐? 도둑맞을 것은 있고 본좌에게 상납할 은자는 없다고? 흥! 멍청한 놈. 바치기 싫으면 싫다고 그러지… 이놈! 오기만 와 봐라. 다리몽둥이를 댕강 분질러 버리고야 말겠어. 케에에엑! 퉤에!"

오늘 따라 유난히도 멀리 나가는 가래침을 힐끗 바라보는 혈면귀수의 두 눈에는 살기가 어리고 있었다.

얼마 전, 황도(皇都)에서 열리는 약령시(藥令市)에 맞춰 조선에서 오던 상인들이 산해관 외곽 대흥안령산맥 일대에서 지니고 오던 홍삼을 모조리 빼앗기는 사건이 있었다.

아무리 소탕하려 해도 소탕할 수 없던 산적들의 소행이었다.

이에 무림천자성 총단에서는 산해관 일대의 치안을 소홀히 하였다는 이유로 경고장을 보내온 바 있었다.

만일 한번 더 이런 일이 벌어지면 즉각 봉고파직(封庫罷職)은 물론 장(杖) 일백과 더불어 오지로 유배되는 형에 처해질 것이니 극도의 주의를 기울여야 신상에 이로울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천하의 상권을 장악한 무림천자성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 상인들이 가지고 오는 홍삼은 막대한 부를 얻게 해주는 것이다.

그런 그것을 모조리 빼앗겼으니 그만큼 손해를 본 셈이다.

홍삼은 일 년에 한 번밖에 오지 않으니 벌충하고 싶어도 벌충할 방법이 없다. 게다가 강탈당한 것들은 정상적으로 유통되지 않고 밀거래 되기 때문에 이익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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