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178

일지매 (1)

등록 2003.07.07 14:11수정 2003.07.07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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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일지매(一枝梅)


혈면귀수가 신임 장주가 된 이후 무천장에는 새로운 전통이 생겨났다. 매일 미시(未時) 무렵, 장주의 거처가 있는 무천장 후원에서 기녀 점고를 취하는 것이다. 대상은 산해관 일대에서 제법 명성을 떨치고 있는 육십여 개 기원의 모든 기녀들이다.


자고로 먹기 살기 바쁜 사람들은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하지만 기녀들을 상대할 만한 자들은 사정이 다르다.

그들은 먹고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뿐만 아니라 뭐 재미있는 게 없나 싶어 여기저기를 기웃거릴 정도의 여유가 있는 자들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적지 않은 은자를 지불하고 기녀들이 따라주는 술을 마실 수 있겠는가?

자고로 사람들이란 배부르고, 등 따스해지면 딴 생각을 하기 마련이라는 것이 혈면귀수의 지론이었다.

하긴 그 자신부터도 배부르고 등 따습기 전까지는 언감생심 무천장주가 되고 싶다는 생각조차 못했었다. 혹시 자신의 부정을 들켜 잘리지나 않으면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 어찌 눈 먼 은자들을 긁어모아 제법 배를 두드릴 만하였기에 음모를 꾸몄던 것이고, 그 결과 운 좋게도 현재의 자리에 앉은 것이 아니던가!


아무튼 그들 가운데 무림천자성에 좋지 않은 마음을 품은 자들이 있을지도 모르므로 불순한 자들을 색출해내기 위한 목적으로 기녀 점고를 취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내놓은 핑계일 뿐 실상은 쓸만한 계집을 골라 마음껏 즐기기 위함이었다.


혈면귀수는 장주가 된 직후, 인근 기녀 가운데 제법 소문난 기녀들을 하나 하나 불러들였었다. 물론 즐기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불러들인 기녀가 진짜 소문난 기녀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생각보다 인물이 떨어지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장주 체면에 아랫것들에게 물어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혈면귀수는 늙기는 하였지만 하물이 우마(牛馬)의 그것과 같이 장대(長大)하여 웬만한 여인들은 상대하기 곤란한 인물이다. 그래서 한번 그의 수청을 들은 기녀는 적어도 보름 동안은 운신(運身)조차 못 할 정도로 끙끙 앓아야 하였다.

기원이란 곳은 기녀들이 술자리에 나서지 못하면 은자를 벌어들일 수 없는 곳이다. 그리고 어느 기원이던 가장 인기 좋은 기녀가 보름이나 술자리에 나서지 못하면 몹쓸 병이라도 걸린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즉각 매출이 급감하게 되고, 예전의 매상을 올리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을 경주하여야 한다.

그렇기에 비록 상권을 움켜쥐고 있는 무천장주의 명이지만 슬쩍 다른 기녀로 바꿔치기를 하곤 하였었다. 그래서 혈면귀수가 소문난 기녀치고는 다소 인물이 떨어진다 느꼈던 것이다.

한참을 고심하던 혈면귀수가 생각해 낸 것이 바로 기녀 점고였다. 무천장 소속 무천상단에는 휘하 기원에 기녀가 몇이 있는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으므로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 없다는 것에서 착안한 것이다. 아주 바보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적어도 산해관 인근 지역에서는 제왕 부럽지 않은 호사란 호사는 몽땅 누리는 중이었다. 그 호사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웬만한 사내라면 알만한 그런 것들이다.

아무튼 산해관 인근에 있는 육십여 개의 기원은 모두 성업 중이다. 중원의 관문이다 보니 워낙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들 기원의 입장에서 보면 두 달에 한번은 기녀들을 몽땅 데리고 무천장으로 향하는 것이 몹시 귀찮은 일이다.

기녀 가운데에는 제 발로 걸어들어 온 여인도 있지만 개중에는 전혀 원치 않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인신매매라는 굴레에 얽매여 할 수 없이 기녀가 된 여인들도 상당수 있기에 단체 외출은 자칫 도주라는 사태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행렬에 기녀들을 감시할 매화부(梅花夫 :기둥서방)들이 즐비하게 동행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거부하면 기원의 문을 닫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하루 장사를 전폐(全閉)하고 무천장으로 향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뇌물도 준비해야 하는데 그 금액 때문에 모두들 고민이었다. 적으면 적다는 투정이 있을 것이고, 많으면 다음에도 많이 줘야하는 부담이 생기기 때문이다.

현재 기원의 수입 가운데 일정 부분은 무천장에 헌납하게끔 되어 있다. 기원 인근 건달이나 무뢰배들의 수탈로부터 보호하고, 취객들의 행패로부터 보호한다는 보호비 명목이다.

만일 이를 거부하면 강력한 제재 조치가 취해진다.

바로 옆 사방을 둘러가며 강력한 경쟁력을 지닌 기원이 생기기도 하며, 사람들이 드나들 입구에 깊은 구덩이가 파이고 냄새 고약한 인분(人糞)으로 가득할 때도 있다.

이렇게 되면 장사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어쩌랴?

힘으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기에 모든 기원들은 무천상단의 지휘를 받겠다고 자청(自請)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바쳐지는 은자는 무림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 쓰인다는 공식적인 상납금이고, 무천장주인 혈면귀수 개인에게는 따로 개별적인 뇌물을 상납하도록 요구받았다.

결국 버는 족족 무림천자성과 혈면귀수에게 바쳐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기원의 주인들로서는 이래저래 살맛 안 나지만 어쩌겠는가? 예전에 비하면 쥐꼬리만큼 밖에 되지 않지만 그래도 기원을 안 하는 것보다는 낫기에 싫어도 운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은자를 벌면서도 늘 표정에 그늘이 져 있었다.

하긴 애써 벌어들여 봤자 남 좋은 일 시키는데 기분 좋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재주는 곰이 부리고 은자는 누가 갖는다는 바로 그짝이었기에 늘 인상을 찌푸리고 다닌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기원 원주들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어리기 시작하였다. 모처럼 숨통 트일 건수가 생겼기 때문이다.

요즘 산해관 인근 기원들은 언제 협도당 사람들이 방문하나를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왔다 간 이후 몽땅 털렸다고 보고를 하면 적어도 반 년 동안은 상납금을 면제받기 때문이다.

몰론 보고를 하는 정의수호대원들에게 몇 푼 집어줘야 하는 번거로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야 몽땅 털렸다는 보고를 실감나게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무림천자성과 혈면귀수에게 바쳐야 할 액수와 정의수호대원에게 집어주는 액수가 천양지차(天壤之差)를 보이기 때문이다. 전자가 만 냥이면 후자는 백 냥이면 떡을 치고도 남으니 이런 장사는 백 번해도 무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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