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183

일지매 (6)

등록 2003.07.14 13:34수정 2003.07.14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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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호! 책을 읽으렴. 책 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단다. 책 속에는 선인들의 금과옥조(金科玉條)도 있고, 세상만사의 이치가 가득 담겨 있단다. 뿐만 아니라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들도 많이 있지. 호호! 너도 읽어보면 알게 될 거야."

유라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하고는 엉킨 머리카락을 푸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 순간 사라의 머릿속으로는 지난 세월이 섬전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과 같이 자신이 머리카락이나 의복, 혹은 장신구에 정신이 팔려있는 동안 유라는 늘 책을 쥐고 있었다.

가히 수불석권(手不釋卷)이라 할 만하였다.

그 결과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白痴)처럼 느껴지고 언니는 만사무불통지(萬事無不通知)인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치잇! 알았어. 나도 읽으면 될 것 아냐.'

잠시 후 둘은 구룡폭이 있는 곳으로 쏜살처럼 쏘아져 가고 있었다. 부정형인 바위들 투성이였지만 마치 평지를 달려가듯 거침이 없었다. 일월신법을 익힌 덕분이었다.



같은 순간, 구룡폭 주위를 지나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다 떨어진 허름한 마의(麻衣)를 걸치고 있었고, 용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흐트러진 머리는 봉두난발이었다.

게다가 굶기를 밥먹듯 하였는지 모두들 마른 멸치처럼 비쩍 말라 있었으며, 기운이 없는지 흐느적거리면서 걷고 있었다.

그들의 발목에는 도주를 방지할 목적으로 채운 족쇄(足鎖)를 차고 있어 걷는 것이 몹시 불편해 보였다.

한 눈에 보기에도 중죄를 지은 죄수들의 행렬이었다.

그런 그들의 뒤에는 세상 만사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듯 한가롭게 주위를 휘휘 둘러보는 장한이 있었다.

아마도 죄수들을 호송하는 책임자인 모양이었다.

그의 좌측 가슴에 새겨진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 검으로 미루어 무림천자성 소속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동안 말 없이 따르던 그는 무리의 선두가 좁은 통로로 진입하자 손목에 감고 있던 채찍을 풀어내며 입을 열었다.

"자, 지금부터 너희들의 좌측을 봐라."
"……!"

"보이는가? 본좌가 재어본 바에 의하면 높이가 무려 사백 장이나 된다. 따라서 떨어지기만 하면 뼈도 못 추린다."
"……!"

"너희는 지금 모두 족쇄를 차고 있으며 한 줄로 된 사슬에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정신 못 차리고 있다가 하나가 떨어지면 몽땅 저승의 고혼(孤魂)이 될 수도 있다."
"……!"

장한의 말에 지금껏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오십여 명은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일제히 벽 쪽으로 붙어 섰다.

까마득한 절벽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장한의 말대로 떨어지면 뼈조차 가루가 될 그런 절벽이 있었던 것이다.

"좋아! 말을 알아 듣으니 좋군. 좋아, 좋아! 지금부터는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며 전진한다. 알아들었지?"
"존명!"

죄수들이 일제히 복창하자 마음에 든다는 듯 장한의 고개가 아래위로 끄덕여졌다.

이곳은 포악무도한 죄를 저질렀거나 기타 중죄를 지은 무림인들을 가둬두는 무림지옥갱이라는 곳이다.

세인들은 무림천자성이 주관하는 무림지옥갱이 오직 하나뿐인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제는 둘이다.

하나는 무림천자성과 상관없는 자들이 하옥되는 지옥갱이다. 전에 이회옥이 하옥되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다른 하나는 무림천자성과 관련이 있던 자들이 죄를 지었을 때 하옥되는 팔열지옥갱이라는 곳이다.

이것은 보통 지옥갱보다 훨씬 더 아래에 위치해 있다.

땅 속으로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기온이 높아진다. 따라서 팔열지옥갱이 보통 지옥갱보다 훨씬 더 후덥지근하다.

습도도 높기 때문이다.

이러한 팔열지옥갱은 보통 지옥갱과 다른 점이 있다.

첫째, 전혀 작업을 하지 않는다. 워낙 후덥지근하여 숨쉬기도 힘들므로 작업을 하려해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죄수들은 족쇄를 차고 있어야 하며, 한 줄에 오십 명씩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용변을 볼 때에도 풀어주지 않는다.

셋째, 일년에 네 번 바깥 공기를 쐴 수 있다. 다시 말해 석 달마다 외부 공기를 마음껏 흡입할 기회가 부여된다는 것이다.

이런 배려를 하는 이유는 비록 영어(囹圄)의 몸이기는 하지만 어찌되었건 무림천자성의 식솔이었다는 이유 때문이다.

어쨌거나 죄수들 가운데에는 평범한 정의수호대원도 있지만 무림천자성의 수뇌부에 속하던 자들도 있다. 그런 그들의 뇌리에는 외부에서는 알아서는 안 될 비밀이 들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비밀 유출을 방지할 목적으로 보통 지옥갱보다 훨씬 더 열악한 환경 속에 가둬두고 늘 오십 명씩 묶어 두는 것이다.

보통의 경우 어떤 조직을 배반한 자는 죽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들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조차 없는 자들이다. 뭔가 얻어 낼 것이 있기에 죽이지 않고 가둬두었기 때문에 감시가 삼엄하였다.

오늘은 팔열지옥갱에 하옥된 이백여 죄수들 가운데 한 조가 숨쉬러 나오는 날이다. 워낙 답답한 곳에 갇혀 있다보니 이렇게 나오는 것을 숨쉬러 나오는 것이라 표현하는 것이다.

행렬이 좁은 통로를 거의 통과할 즈음이었다. 갑작스럽게 한 인영이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절벽 쪽으로 신형이 기울었다.

그는 죄수치고는 유난히 뚱뚱하였다.

턱 밑에 또 다른 턱이 있는 듯 살이 늘어져 있었고, 배는 임산부보다도 더 불러 있었다. 그러나 그의 하체는 상체와 사정이 많이 달랐다. 어떻게 육중한 상체를 지탱하는지 신기할 정도로 비쩍 말라 있었던 것이다. 보나마나 게으른 천성 때문에 먹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은 결과일 것이다.

어찌되었건 상체가 워낙 육중하기에 편평한 길에서도 살짝만 헛디뎌도 넘어질 판인데 급경사인 비탈길을 오르려 하였으니 그 자체가 무리였던 모양이다. 억지로 비탈길을 오르려다 헛디디는 바람에 절벽 쪽으로 쓰러진 것이다.

"허억! 아아아악!"
"아앗! 조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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