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장일정 제왕비를 얻다.
"휴우우! 가, 감사합니다. 장주!"
"쯧쯧쯧! 그나저나 괜찮은가? 더 걸을 수 있겠는가? 못 걷겠으면 말하게. 노부가 힘닿는 데까지 업어 줌세."
떨어지려던 청년을 끌어올린 백발 성성한 노인은 측은하다는 듯 나직이 혀를 찼다. 이때 바람 불어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휘날리자 순간적으로 노인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누가 깎기라도 한 듯 각진 그의 턱과 백발, 백염은 비록 남루한 의복을 걸치고 있고, 봉두난발이었지만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위풍당당한 기도를 흘려내고 있었다.
그는 막대한 공금을 횡령한 죄목으로 하옥된 전임 산해관 무천장주인 사면호협(獅面豪俠) 여광(呂廣)이었다.
그는 늙어 죽을 때까지 수인(囚人) 생활을 하여야 하는 무기수(無期囚)이다. 그가 횡령하였다는 공금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다는 혈면귀수의 보고에 어디에 은닉(隱匿)했는지를 알 수 있을 때까지 무기한 하옥하라는 명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억울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어쩌겠는가!
일사천리로 하옥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무림천자성의 수뇌부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를 위한 변론을 하거나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로부터 단 한 푼도 뇌물로 받은 적이 없으니 죽거나 말거나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엔 무림천자성의 명예를 드높였다면서 마땅히 상을 내려야 한다던 일부 장로들조차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그가 빼돌린 공금을 뇌물로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하옥된 이후에도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기에 사면호협은 죽어서도 팔열지옥갱을 떠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감춘 것이 없으니 은자가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사실 그뿐만이 아니라 팔열지옥갱에 하옥된 죄수들 대부분이 무기수이다. 방금 떨어질 뻔했던 청년이 가장 형량이 짧은 데 앞으로 오십팔 년이 지나면 출옥된다고 한다. 그의 현재 나이 이십이 세이니 나이 팔십에나 세상 구경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만일 그 안에 죽어버린다면 끝내 팔열지옥갱을 떠나지 못하니 그 역시 무기징역형에 처해진 무기수나 다름없었다.
청년은 정의수호대원 중 일 인이었는데 치정(癡情) 때문에 직속상관을 살해한 죄로 하옥되었다고 한다.
그는 유복한 집안의 자식으로 세상에 태어난 이래 단 한 번도 허기라는 것을 느껴보지 못한 채 성장하였다고 한다.
그는 소문난 대식가로 하루에 반드시 세 끼 이상을 먹었는데, 아침에는 상어의 지느러미로 요리한 홍소대군시(紅燒大群翅)나 새우를 술에 담가 만드는 화염취하(火焰醉蝦) 같이 해산물을 중심으로 한 음식을 주로 먹었다고 한다.
점심때에는 금방 젖을 뗀 새끼 돼지를 주요 원료로 하는 소유저(燒乳猪)를 즐겨 먹었다고 하였다. 이 요리는 조리방법에 따라 마피유저(麻皮乳猪)와 광피유저(光皮乳猪), 그리고 도문유저(圖紋乳猪)로 나뉘는데 맛이 일품이라고 한다.
저녁때 가장 많은 양을 먹었는데 자라와 암탉을 주원료로 한 강소성 일품요리인 패왕별희(覇王別姬)나 북경압(北京鴨 :오리구이) 같은 요리를 즐겨 먹었다고 한다.
또한 매 끼니마다 백호은침(白毫銀針), 백모단(白牡丹), 용정(龍井), 동정벽라춘(洞庭碧螺春), 황산모봉(黃山毛峰), 군산은침(君山銀針), 몽정감로(蒙頂甘露) 같은 일품차(逸品茶)가 곁들여졌다.
특히 저녁에는 모태주(茅台酒), 분주(汾酒), 오량액(五糧液), 검남춘(劍南春), 고정공주(古井貢酒), 강소양하대곡(江蘇洋河大曲), 동주(董酒)같은 술을 즐겨 마셨다.
워낙 많이 먹고 마셔댔기에 그의 한 끼는 일반 양민 가족이 열흘이나 보름 먹을 은자를 지불하여야 하였다.
그러면서도 끄덕 없었던 것은 무천장주를 부친으로 둔 덕이다. 부친이 막대한 은자를 긁어 긁어모아 거부의 반열에 올랐기에 이런 호사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그가 한낱 기녀 때문에 그만 직속상관을 죽이는 바람에 하옥된 것이다.
이후 하루에 두 끼, 그것도 전에는 쳐다보지도 않았을 거친 음식만 배급하자 한 동안은 음식을 거부했다.
세상에 매를 참을 수 있는 장사는 있어도, 졸음이나 굶주림을 견뎌낼 장사는 없는 법이다.
결국 배급된 음식을 먹기 시작하였는데 세상에 태어난 이래 그처럼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다 하였다.
그런데 그는 늘 양이 부족하다고 징징댔다. 하여 배급된 것을 다 먹어치우고도 혹시 누가 남기는 사람이 없나 두리번거리곤 하였다. 먹을 것이라곤 배급되는 것뿐이니 음식이 남을 리가 있겠는가? 그렇기에 식사시간이 끝나면 뭔가 먹을 만한 것이 없나를 찾아다니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그러다가 음습한 동혈 속에서 꿈틀거리는 이름 없는 벌레를 잡아먹기도 하였고, 어쩌다 길을 잘못 든 쥐를 잡아먹기도 하였다. 그래도 양이 차지 않자 급기야 흙을 퍼먹었다. 그게 꼭 오리구이처럼 보였다고 한다.
결국 심한 배앓이를 하는 바람에 지난 며칠 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해 심신이 몹시 쇠약해진 상태였다.
그렇기에 제대로 걷지도 못한 것이다. 사면호협은 이런 전후 상황을 알기에 주의를 기울였고 덕분에 그를 구하게 된 것이다.
"자, 장주님! 소생은 괜찮습니다."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는 듯 가벼운 한숨을 쉰 청년은 고맙다는 듯 연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한편,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새파랗게 젊은 청년을 업어주겠다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아무도 웃지 않고 있었다. 웃기는커녕 모두의 시선에 싸늘함이 배어 있었다.
만일 한 사람이 절벽으로 떨어질 경우 나머지 사십구 명이 버틸 수 있다면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떨어지게 되면 바로 앞이나 뒤에 있던 사람에게 영향을 주게 되고 이럴 경우 백이면 칠팔십은 그 사람들도 떨어지게 된다. 워낙 먹은 게 부실하기 때문에 제대로 힘 쓸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다.
이것이 연속하여 작용되면 자칫 오십 명 모두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불상사가 벌어질 수 있다. 따라서 하마터면 죽을 뻔했기에 이렇듯 싸늘한 시선으로 노려보는 것이다.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다시 말해 살아서 어떤 고난을 겪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낫다는 말이다.
현재 모든 죄수들은 지금은 비록 수인(囚人)의 신분이지만 성주의 사면령(赦免令)이 떨어지면 원직에 복귀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기에 아무리 힘들어도 참는 중이었다.
투옥된 모든 죄수들을 방면하는 대 사면령이 떨어지는 시기는 신임 성주가 취임할 때뿐이다. 소문에 의하면 얼마 전 철룡화존이 아들인 철기린을 차기성주로 임명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은 멀지 않은 미래에 성주 이, 취임식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예고하는 행위이다. 그렇기에 조만간 사면령이 떨어질 것이라 예측하고는 어서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이런 판국에 다른 사람 때문에 죽게되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하여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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