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말, 공단내 최초로 '문학회'를 만들다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97> 공장일기(3)

등록 2003.07.24 12:50수정 2003.07.24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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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내 문학에의 꿈은 캄캄한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는 해와 같았다/월미산 해돋이

내 문학에의 꿈은 캄캄한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는 해와 같았다/월미산 해돋이 ⓒ 경상남도

"니 잠깐만 이리 좀 와 봐라."
"이… 이게 무슨 책입니까?"
"쉬잇! 들키모 바로 잽혀 간다. 그라이 퍼뜩 훑어만 봐라."
"아니, 이런 내용을 시로 써도 되는 깁니꺼?"
"그기 진짜 시다."


그 당시 나는 창원공단 내 **전광사에서 현장 노동자로 일하면서도 문학을 향한 나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날마다 이어지는 야근과 철야근무 속에서도 짬을 내어 마산에 있는 이선관 시인을 자주 찾아갔다. 이선관 선생은 한 살 때 백일해 약을 잘못 먹어 뇌성마비에 걸린 장애인이자 내 고등학교 선배였다.

이선관 선생은 늘 말투가 어눌하고 걸음걸이조차 어정쩡했다. 하지만 이선관 선생 주변에는 시인, 소설가, 문학지망생 등을 비롯한 일부 의식 있는 지식인들이 많이 들끓었다. 또 깡통을 들고 밥을 빌어먹는 거지에서부터 구두닦이, 잡상인 등도 장애인의 몸으로 시를 쓰고 있는 이선관 선생을 몹시 존경하고 있는 듯했다.

이는 세월이 조금 더 흐른 뒤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마산 사람들이 이선관 선생 주변에 들끓을 수밖에 없었던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당시 이선관 선생은 서슬 퍼런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아래서도 몹시 강한(?) 시를 쓰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군사독재정권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무시무시(?)한 시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그렇다" 로 시작되는 '헌법 제1조'를 비롯한 '동포여'를 '똥 퍼여'로 풍자한 이선관 선생의 그런 시들은, 당시 교과서적인 시쓰기에 충실했던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또한 그때 이선관 선생이 나를 산호동에 있는 집으로 불러내, 구석진 방에서 몰래 보여주었던 월북시인 임화, 조명암, 오장환 등의 시집은 내게 문학의 새로운 눈을 뜨게 해주었다.

a 철야근무를 마치고 아침에 퇴근한 날, 공장 옆을 가로지르는 남천둑에 누워

철야근무를 마치고 아침에 퇴근한 날, 공장 옆을 가로지르는 남천둑에 누워 ⓒ 이종찬

바다에서
둔탁한 소리가 난다
이타이 이타이


설익은 과일은 서리가 무서워
우박처럼 떨어져 내린다
이타이 이타이

새벽잠을 설친 시민들의
눈거풀은 떨어지지 않는다
이타이 이타이


비에 젖은 현수막은
바람을 마시고 춤을 춘다
이타이 이타이

아아!
바다의 유언
이타이 이타이

(이선관 '독수대.1' 모두)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이선관 선생은 당시 한일합섬과 자유수출(수출지유지역)에서 마산 앞바다로 흘러내리는 오염물질을 바라보며 우리나라 최초로 환경시를 쓰기 시작했다. 게다가 내가 보기에는 도저히 시의 소재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마산 시민들의 자잘한 삶의 이야기들을 꼼꼼하게 시로 형상화하여 수시로 지역신문에 발표했다.

그랬다. 당시 프레스실에서 밤을 낮으로 삼아 안전사고와 씨름하던 나는, 내 문학에 대한 식견을 넓힐 수 있는 유일한 출구가 이선관 선생이었다. 또한 이선관 선생은 낭만주의 문학과 허무주의 문학에 푹 빠져 있었던 내게 참여문학이라는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다. 삶의 문학이야말로 진정한 참의 문학이라는 것을.

그해, 마산 시내 고등학교 문예반을 갓 졸업한 예비 사회인들이 모여 "윤슬문학동인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 문예반 활동은 하지 않았다. 그저 내 나름대로 <경남신문>이나 <국제신문>의 학생 투고란이나 <독서신문> 등에 수시로 시를 발표하고 있었다.

그중 마산에서 발행되는 <경남매일>(지금의 경남신문)은 다른 신문과는 달리 게재된 시에 대한 평가를 실었다. 시에 대한 평가는 주로 박재호 시인이 맡았었는데,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이미 고인이 되신 박재호 시인에게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 올린다.

a 남천문학의 밤

남천문학의 밤 ⓒ 이종찬

나는 그것이 인연이 되어 "윤슬문학동인회" 회원이 되어 그들과 자연스레 어울렸다. 그들은 강신형, 김명희, 박영주, 우무석, 유영국, 임정애다. 우리들은 그 모임의 결실로 <윤슬>이란 동인지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후 이 모임의 이름은 정진업 시인의 조언으로 "사향문학동인회"로 바뀌었다.

당시 활약했던 이들 중 대부분은 현재 시인 또는 문예활동가가 되어 이 지역 문학운동의 핵심이 되어 있다. 그중 박영주는 연극을 하다가 문예활동가가 되어 있고, 임정애는 지금까지도 무엇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하여튼 박영주는 사십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도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다고 한다.

그때 우리는 매주 또는 격주에 한번씩 다방 한 귀퉁이나 중국집에 모여 창작한 시를 서로 읽고 돌려가며 평가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열심히 하면서도 늘상 뭔가가 부족하고 허전했다. 왜냐하면 나의 처절하다시피한 공장생활과 우리 구성원들이 창작한 시와는 너무나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시가 이런 것이 아닌데, 라는 막연한 감정이 싹트고 있었다. 게다가 이선관 선생의 시와 월북시인들의 시를 읽으면서 더욱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일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그 허전함과 부족감을 달래기 위해 공장 게시판에다 "시심"(詩心)이란 이름을 내걸고 문학지망생들을 모집하는 공고를 냈다.

그 공고를 낼 때 정말 힘들었다. 당시 총무과에서는 형사가 살인사건 조사를 하듯이 모집공고를 내고자 하는 배경에서부터 목적, 활동인원, 사업계획 등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물었다. 하지만 나는 대충 교과서식으로 둘러대었다. 어둡고 침침한 작업현장에 시의 아름다운 향기를 퍼뜨리는 것이 주된 목적이라고.

그러한 힘든 과정을 거쳐 마침내 창원공단이 생긴 이래 최초로 "시심문학동인회"라는 사내 문학회가 탄생되었다. 그리고 이 때 가장 큰 도움과 격려를 해주신 분이 공작부에 근무하던 황복현 선생(당시 과장)이었다. 시를 아주 잘 썼던 황복현 선생은 공장 안에서도 내게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자신의 일처럼 나서서 도와 주었다.

a 남천문학의 밤을 마치고/오른쪽 첫 번째가 이선관 시인

남천문학의 밤을 마치고/오른쪽 첫 번째가 이선관 시인 ⓒ 이종찬

이듬해, 그러니까 1979년에 접어들면서 나는 사내 문학모임에는 한계가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그 틀을 과감히 깨버리기로 했다. 사실, 이때 내가 공장에 근무하면서 조금만 마음을 달리 먹고 총무과와 타협했더라면 나는 그 공장에서 현장이 아닌 사무실에서 근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내 소박한 양심이자 한계였다.

그때부터 나는 창원공단을 대표하는 공단문학의 모임을 만들고자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하지만 대부분의 공장에는 문학모임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우선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도 억지로 끌어모아야만 했다. 그리고 기존의 "시심문학동인회"는 사내모임으로 남기면서 창원공단 내 사내문학모임의 단체인 "남천문학회"를 새롭게 만들었다.

"남천문학회"는 처음에는 많은 참여가 있었으나, 날이 갈수록 사람들이 자꾸만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단체의 목적이나 활동계획이 불순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지역을 더욱 넓혀 마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갯물(경남대학 문학모임), 갯벌(수출자유지역 문학모임), 사향(마산시내 고교 문예반 졸업생 모임), 개나리(경남여상 문학모임, 황선하 시인 지도)와의 지속적인 교류와 연대행사를 개최했다.

나는 그렇게 공장생활 1년을 보내고 2년째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묘한 허전함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도 내 가슴을 회오리바람처럼 그렇게 휑하니 빠져나가는 것일까. 그러나 그것은 그해 10월부터 꼬투리를 보이기 시작하더니, 이듬해 봄에 접어들면서 곧 결론이 났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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