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으로서 글쓰기, 온 몸으로 사유하기

김훈 에세이 <자전거 여행>

등록 2003.07.24 12:57수정 2003.07.24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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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용
김훈의 <자전거 여행>에 실린 글들은 정직하다. 화려한 언어와 수사학으로 치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전거 여행>이 아름다운 산문집으로 상찬 받는 것은 바로 그의 정직한 글쓰기에 연유한다.

그는 자신이 느낀 바만을 말하고, 자신의 사유에 입각해서만 글을 쓴다. 헛되이 자신의 감상을 과장하지 않는 그의 글은 짧은 단문으로 끊어지며, 여행기에 으레 나올법한 감탄사가 보이지 않는다. <자전거 여행>에서, 나그네의 여수(旅愁)나 낭만(浪漫)은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찾을 길이 없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자신의 글을 '가엾은 수사학'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그가 예의상 말하는 겸손이 결코 아니다. 그의 글을 이끌어나가는 힘은 '수사학'이 아니라 '사유'이기 때문이다.

"산하 굽이굽이에 틀어앉은 만물을 몸 안쪽으로 끌어당겨 설(設)과 학(學)으로 세우곤 하는 그의 사유"는 짧은 단문으로 끊어지는 그의 문장과 문장 사이를 매끄럽게 이어준다. 그래서 그의 글은 문장으로 읽히지 않고 문단으로 읽힌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접합부의 이음새를 말끔하게 꿰매는 그의 빛나는 사유는 "생태학과 지리학과 역사학과 인류학과 종교학을 종(縱)하고 횡(橫)한다." 그럼에도 그의 글은 현학적이지 않다.

그것은 그가 남의 글을 빌려오는 경우에도, 자신의 사유로 그것을 새롭게 해석해내어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난 다음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는 남의 글을 '인용'하지 않고 '참조'할 뿐이다. 그는 온전히 그가 쓰는 글의 주인이다.

<자전거 여행>에서 김훈을 온전히 그가 쓰는 글의 주인으로 만드는 것은, 그가 길을 갈 때 온전히 그 길의 주인으로서 가기 때문이다. 김훈과 함께 전국의 산천을 누빈 자전거 '풍륜(風輪)'은 다름 아닌 바로 그 자신이다.


풍륜의 두 바퀴는 김훈의 순결한 몸의 동력을 받아 정직한 몸의 속력으로 세상을 저어나간다. 엔진의 속력이 아닌 몸의 속력으로 가는 그에게 길은 순종하며 세상은 숨겨진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그 또한 길 앞에서 겸손하기 때문이다. 길은 길 앞에서 교만하지 않은 사람만을 주인으로 섬기는 법이다.

풍륜이 자신의 온 몸을 길에 갈아 굴러갈 때, 그는 자신의 온 몸을 세계 속에 갈아 사유한다. 머리로만 사유하지 않고 온 감각과 마음을 열어놓고 온몸으로 사유한다.


우리가 한묶음으로 말하는 봄꽃들과 봄나물들은 그의 사유의 힘 앞에서 비로소 제 이름들을 갖기 시작하고, 우리가 구별하지 못하는 소금과 차의 맛과 향기는 그의 사유의 힘 앞에서 비로소 그 미묘한 차이들을 드러낸다. 그의 사유의 힘 앞에서는 심지어는 술을 억수로 마시고 난 다음날 아침에 누는 불우한 날똥까지도 낱낱이 파헤쳐진다.

그는 자신의 온몸으로 세상을 사유하기에, 그의 글에는 가정법이 없으며 추측이 없으며 머뭇거림이 없다. 그의 글은 단단하고 구체적이며 단정적이다.

그의 엄결하고 섬세한 사유는 '지금, 여기' 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로까지 이어진다. 그의 사유 속에서, 일본 영화 <카게무샤>에서 보여지는 일본 무사들의 장식적인 갑주는 서울 세종로 네거리의 이순신 동상의 투박한 갑옷과 대비된다. 그 대비 속에서 그가 이끌어내는 이순신의 내면풍경은 이미 그에게 동인문학상을 안겨주었을 정도로 섬세하다.

그의 사유 속에서, 7세기 <삼국사기> 속의 피비린내 나는 무기의 역사는 <삼국유사> 속의 만파식적이라는 악기의 꿈으로 위무된다. 그래서 그가 5ㆍ18 민중항쟁 20주년을 맞는 광주의 망월동에서 발견하는 것은 원한과 치욕이 아니라 밥과 사랑이다.

그의 사유 속에서, 머리 뒤통수 가마에서 햇볕 냄새가 나는 섬진강변 마암분교 아이들의 앞날은 꽃피는 미래이다. 그 미래가 있는 한, 섬진강 상류 산간 마을에까지 밀려온 IMF 위기는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다.

그런데, 망설임이 없는, 그래서 단호하게까지 보이는 그의 사유가 닿지 못하는 곳이 있었단 말인가? 서문에서 읽는 그의 고백은 나를 놀라게 한다.

그는 고백한다. "만경강 저녁 갯벌과 거기에 내려앉는 도요새들의 이야기를 쓰던 새벽 여관방에서 나는 한 자루의 연필과 더불어, 말하여질 수 없는 것들의 절벽 앞에서 몸을 떨었다"라고. "나는 백전백패할 것이다"라고.

그의 순결한 몸이 만질 수 없는 것, 그의 빛나는 사유가 닿을 수 없는 곳은 과연 무엇일까?

아마도 그는 8000미터 낭가 파르바트의 눈 덮인 산정에서 발견되곤 하는 도요새의 얼어붙은 시체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리라. 만경강 넓은 갯벌, 뻘 속의 보이지 않는 먹이를 향해 쉴새없이 부리를 내리꽂아야 하는 도요새의 모습에서 자신의 운명을 읽은 것이리라.

그래서 그는 "아, 아무 것도 만질 수 없다 하더라도 목숨은 기어코 감미로운 것이다, 라고 써야 하는가"라고 되묻는다.

2000년 52살의 여름에 김훈이 겨우 쓴 <자전거 여행>을 2002년 38살의 봄에 나는 겨우 읽었다. 그리고 일년이 지나 다시 읽었어도 그의 물음에 나는 아직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다만 그가 서문의 마지막에 써 놓은 말, "사랑이여, 이 문장은 그대가 써다오"를 "삶이여, 이 문장은 그대가 써다오"로 고쳐 읽을 뿐.

자전거여행 (합본 특별 한정판)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문학동네,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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