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에게 인사한다, 인간이여!

로맹 가리의 소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등록 2003.07.17 07:54수정 2003.07.17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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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 그는 날고 있다. 한번 들으면 쉽게 잊혀지지 않는 독특한 그의 이름이 연상시키듯이, 그는 왜가리처럼 잿빛의 날개를 펼쳐 인간의 영토 위를 스치듯 지나치며 홀로 유유히 날아간다.

그가 상상력이라는 자신의 날개를 펼쳐 근접비행한 인간의 영토는 광대하고 그 영토 위에 세워진 인간의 세계는 실로 다양하다. 그러나 그 세계는 모두 병들어 있다. 병든 인간의 세계를 깊이 응시하는 그의 시선은 음울하면서도 쓸쓸할 수밖에 없다.


열 여섯 편의 단편소설을 모아 놓은 그의 소설집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는 인간의 영토 위를 근접비행한 그가 인간이라는 종(種)에게 바치는 신랄한 인사이다.

그가 태어난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는 이제 다른 이념 체제로 인해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새로운 인간(비둘기)이 등장하였으며(<비둘기 시민>), 독일에서는 나치즘이 남긴 상처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인간성의 파괴로 계속되고 있다(<어떤 휴머니스트>, <지상의 주민들>).

루마니아에서는 각기 다른 속셈을 숨긴 채 인간들이 전쟁을 하고(<고상함과 위대함>),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전쟁의 승자와 패자가 서로 자리바꿈을 한다(<역사의 한 페이지>).

영국에서는 인간들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높은 오해의 벽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고(<벽>), 프랑스에서는 진짜에 대한 열망이 인간을 한없이 소외시킨다(<가짜>, <킬리만자로에서는 모든 게 순조롭다>).

터키에서는 헌신적 애정과 예술가적 열망이 공존하지 못하고(<류트>), 이태리에서는 예술가로서의 내적 발견과 성취가 몰락으로 치부된다(<몰락>).

유럽 대륙의 이 모든 혼돈에 지친 그는 태평양 마르키즈 제도의 작은 섬 타라토라에서 잠깐 자신의 날개를 접지만, 이곳 역시 너무나 아름다운 자연 풍경의 이면에는 유럽 문명에 오염된 치유할 수 없는 허위가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도대체 순수는 어디에>).


그는 다시 날개를 펼쳐 태양이 솟아오르는 동쪽으로 향해 날아간다. 그가 도착한 신대륙 미국에서는 바야흐로 진화의 선두에 선 인간들이 인류의 새로운 국경을 개척하기 위하여 바다로 뛰어들고 있다. “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미합중국 대통령은 목청을 높인다(<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 있으라>).

하지만 그가 듣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라는 미명 아래 행해지는 과학의 실험실에서 들려오는 인간의 고통스런 비명이다. 유럽 대륙에 오랜 상처로 남아있는 전쟁과 홀로코스트의 악몽이 좀더 설득력있는 명분으로 그리고 이번에는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다시금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거기서 남으로 방향을 바꿔 아직도 원시의 땅으로 남아있는 중남미로 향한다. 그러나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아이티에서 그가 본 것은 좀처럼 반성할 줄 모르는 인간의 뻔뻔스러운 자만심이며(<영웅적 행위에 대해 말하자면>), 볼리비아의 고원에서는 영원히 깨질 수 없는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구도가 인간 사회의 아주 오래되고 본질적인 구조임을 목격한다(<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

절망한 그가 마지막으로 깃든 곳은 바로 페루의 외딴 해변이다(<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때가 되면 새들은 먼바다의 조분석 섬들을 떠나 이곳 한적한 바닷가로 날아와 좁은 모래사장에 떨어져 죽는다.

“어쨌든 한 가지 설명은 있을 거요. 언제나 한 가지 이유는 있는 법이니까”라고 그는 말하지만, 유럽인의 사고를 지배하는 가장 큰 가치인 과학은 이 새들의 죽음을 설명하지 못한다. 과학은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꿈들마저 전쟁과 감옥을 만드는데 쓰지 않았던가!

그래서 조금 시적이고 몽상적이지만, 영혼의 날아오름(진짜 비상)을 위해서는 차갑고 헐벗은 바위뿐인 조분석 섬들보다 부드럽고 따뜻한 모래가 있는 바닷가가 더 적합하기에 새들은 이 곳으로 날아와 죽는 것이라는 설명이 오히려 더 설득력을 갖는다.

그렇다면, 페루 해변의 모래 언덕 위, 카페의 주인이 된 소설속 사내 역시 죽기 위해 이곳으로 날아든 한 마리 새일 터이다.

새들의 죽음으로 지루하게 유예되던 그의 죽음의 순간이 결정적인 국면을 맞는 것은, 그가 구해준 무구하고 연약해 보이는 한 여인이 사실은 때묻고 병든 인간 세계로부터 날아든 한 마리 가짜 새에 불과하며, 그 가짜 새의 유혹을 피하지 못하고 덫에 걸려든 자신 역시 그녀와 다름없는 가짜 새임을 아프게 인식하면서부터이다.

로맹 가리는 끝내 말하고 있지 않지만,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끝나고 난 뒤 남는 돌연한 침묵 속에서 우리는 한 방의 총소리를 듣게 되며, 그 총소리는 새들이 페루의 바닷가에 와서 죽어가는 이유를 비로소 설명해준다.

로맹 가리, 그는 누구인가

한국의 독자들에게 <자기 앞의 생>이라는 소설과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프랑스의 작가 로맹 가리(Romain Gary)는 1914년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유태계로 태어나 프랑스 파리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 로렌 비행중대 대위로 참전해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종전 후에는 퇴역하여 외교관으로서 미국의 캘리포니아를 포함한 9개국에서 1961년까지 근무하였다. 이러한 그의 다채로운 인생 경험은 그의 소설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중에 쓴 첫 소설 <유럽의 교육>으로 1945년 비평가상을 수상하면서 일약 작가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그는 1956년에는 <하늘의 뿌리>로 콩쿠르 상을 수상하였고, 1975년에는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자기 앞의 생>으로 다시 한 번 콩쿠르 상을 수상함으로써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주요 작품으로는 <튤립>, <대낮의 복도>, <레이디 L>, <하얀 개>, <밤은 조용하리라>, <이 경계선을 넘으면 표는 유효하지 않습니다>, <여자의 빛>, <영혼의 동력> 등이 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그의 소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는 로맹 가리 자신이 진 세버그를 주인공으로 하여 영화로 만든 바 있다.
사내가 스스로에게 겨눈 총구는 동시에 로맹 가리 자신을 향한 것이었으며(로맹 가리는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로 하여금 방아쇠를 당기게 만든 것은 지금 이곳의 인간에 대한 환멸과 아직 오지 않은 인간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신체적으로 기형인 난쟁이 서커스단장의 입을 빌어 폭로하고 있듯이, 지금 이 세계의 인간들은 모두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나 기형이며, 그래서 진정한 인간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본능의 기쁨>). 지금 이곳의 인간은 그 자신의 선구자일 뿐 결코 완성된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로맹 가리가 그의 소설집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통해서 인간에게 보내고 있는 인사는 찬사가 아니라 비판이며 희망이 아니라 절망이다.

나는 너에게 인사한다, 인간이여! 로맹가리가 던지는 이 인사의 끝에 우리는 총소리를 듣는다. 그 총구는 우리의 가슴을 겨누고 있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문학동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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