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영산(靈山) 백두산을 가며

등록 2003.08.11 04:57수정 2003.08.11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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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 후반쯤이었을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고인이신 소설가 이문구 선생께서 나와 만난 자리에서 얼마 전에 백두산 다녀오신 얘기를 했다. 한국소설가협회 시행 사업의 결실로 백두산을 다녀올 수 있었다는 얘기였다. 그러며 그는 '평생의 원'을 풀었다는 말을 했다.


나는 이문구 선생의 그런 말을 들으며 깊이 공감을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절절한 아픔을 안고 분단의 질곡 속을 살아가는 지식인으로서 비록 통일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라도 백두산을 오르고 천지의 맑은 물에 두 손을 담가보는 일은 꿈에서도 품게 되는 비원이었을 것이다.

그 원을 풀었으니 그 감격은 그에게서 오래 지속이 되었을 터이다. 어쩌면 분단 상황 속에서 중국 땅으로 우회하여 백두산을 오른 것이기에, 그리고 통일된 겨레의 땅을 밟고 오르지 못한 아쉬움과 면구스러움이 너무도 컸기에 그가 스스로 자신을 위안하기 위하여 그런 과한(?) 표현을 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나는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면서 그가 조금도 부럽지 않았다. 나는 그런 식으로는, 다시 말해 중국 땅으로 우회하여 백두산을 오르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고 속으로 다짐했다. 언제든 통일이 된 다음에, 통일은 되지 않더라도 남북의 화해 기류와 교류가 활발히 진척되는 상황 속에서 기필코 겨레의 땅을 밟고 백두산을 오르리라는 생각이었고, 그것은 일종의 오기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15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에 꽤 많은 사람들이 중국 땅으로 우회하여 백두산을 다녀왔다. 그들에 의해 백두산 천지의 모습도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2000년 '6·15공동선언' 이후 남북 교류의 일환으로 이산가족 일부와 문화인들이 겨레의 땅을 통해 백두산과 한라산을 올랐고, KBS 특별취재팀이 백두산을 올라 천지를 배경으로 생방송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일들은 어느새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남한 사람들이 겨레의 땅을 통해 백두산을 오르는 일은 현재로서는 거의 난망한 상황이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라는 대 명제를 향해 참으로 어렵사리 여러 가지 형태의 남북 교류가 간헐적으로 시행되고 남북 경제협력 사업들이 조금씩 실체를 보여 주고는 있지만, 그럴수록 반작용적인 어려움도 커지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아무튼 겨레의 땅을 밟고 백두산을 오르는 일이 계속 난망한 가운데 세월은 쉬지 않고 무심히 흐르고 있다. 나도 어느새 오십대 중반의 세월을 살고 있고, 건강마저 잃었다. 열심히 매일같이 산을 오르며 건강 관리를 하고는 있지만, 당뇨와 고혈압 환자로서 늘 불안감을 안은 채 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대전평화방송에서 내게 '백두산 피정' 제의가 날아왔다. 여름방학을 맞아 8·15 광복절 즈음에 백두산을 올라 천지 앞에서 '기도'를 하자는 제의였다. 대전평화방송 사장이신 방윤석 신부님께서 당신이 지도신부로 관여하고 있는 대전교구 가톨릭문우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 회원들에게 제의를 한 것인데, 그것은 내게 확실한 '유혹'이었다.


이 제의를 받고 나는 여러 가지로 고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경제 사정이 넉넉하지 못한 것이야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지금은 온 나라가 심한 경제 불황을 겪고 있고, 죽을 지경에서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피부로 느끼고 있는 상황이었다. 가족 동반자살도 속출하는 요즘의 상황에서 너무 호사를 부리는 일, 죄를 짓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 고심 가운데서 나는 마침내 백두산 행을, 그것도 가족 동반을 결심하게 되었다. 아내와 두 아이까지 동행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동안 나는 거액의 보증 빚에 시달리면서도 소설가 명색과 문인단체 행사 덕분에 외국 나들이를 여러 번 한 탓에, 직장에 몸이 매여 아직 외국 여행 경험을 갖지 못한 아내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런 아내와 함께 올해 고1과 중1인 두 아이도 동행시키기로 한 것은 아이들에게 일찌감치 민족의 분단 상황을 실질적으로 체감시키며 민족의 영산 백두산의 천지 앞에서 민족 통일의 열망을 가슴에 깊이 아로새기게 해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한국천주교회는 해마다 8월이면 전국의 거의 모든 신자들이 사용하는 <매일미사> 8월호의 말미에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를 수록한다. 8월은 8·15 광복절이 있는 달이고, 8·15 광복절은 민족 분단의 역사가 시작된 날이기 때문이다.

나는 성당에서 전례봉사를 하며 신자들과 함께 그 기도를 바칠 때마다 마음이 참으로 절절하고 숙연해지는 것을 느끼곤 한다. 이미 1980년대 중반에 그런 기도문을 제정하여 하느님께 바치며 모든 신자들에게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기원하는 마음을 갖게 해주는 교회에 감사하는 마음이 참으로 크다.

대전평화방송 사장 방윤석 신부님에게서 받은 전문 중에 이번 중국 여행 행사의 명칭이 '백두산 피정'으로 되어 있는 사실에서 나는 쉽게 동참을 결심할 수 있었다. '피정(避靜)'이란 '조용히 자신을 살피고 기도하며 몸과 마음을 정화한다'는 뜻의 천주교 용어다. 11일부터 14일까지 갖게 되는 이번 '백두산 피정'에는 우리 네 명 가족을 포함하여 모두 18명이 참여한다고 한다.

나는 이번 여행이 나와 우리 가족과 일행 모두에게 진정한 피정이 되기를 소망한다. 백두산 천지에서, 그리고 윤동주 시비와 일송정과 두만강을 돌아보며 진심으로 하느님께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를 바치려고 한다. 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이번 '백두산 피정'으로 말미암아 참가자 모두의 가슴에 평화 통일에 대한 열망이 더욱 크고 확실해질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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