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 입구에서 출구까지 배타고 한 시간

[까탈이의 세계여행] 라오스 여행기 5 - 탐 롯 콩로

등록 2003.08.23 11:20수정 2003.08.25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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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힌 마을에서 절구질 하는 할머니와 어머니와 손녀.
나힌 마을에서 절구질 하는 할머니와 어머니와 손녀.김남희

폭포를 찾아가는 길에 만난 나비떼들의 회합.
폭포를 찾아가는 길에 만난 나비떼들의 회합.김남희
눈을 뜨니 5시. 오늘은 라오스의 숨겨진 비경이라는 탐롯콩로(Tam Lot Kong Lo)동굴로 떠나는 날이다. 특별히 할 일도 없고 볼 것도 없어 세계에서 가장 심심한 수도로 꼽히는 비엔티엔에서 열흘 가까이 빈둥거리며 놀다가 이제야 다시 짐을 꾸린다.

빽빽한 스케줄에 맞춰 이른 아침부터 밤늦도록 돌아본 후 다음날 다시 짐을 꾸려 이동하는 유격 훈련식의 여행. 이런 여행은 게으른 체질 탓에 원래 잘 못하는 나이지만, 이번에는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느리게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


루앙 프라방에서 열흘, 비엔티엔에서도 아흐레를 머물렀으니 말이다. 그동안 함께 다닌 에이미는 돈을 찾으러 태국에 가야 하기에-놀랍게도 라오스나 캄보디아에는 단 한 대의 현금지급기도 없다!-우리는 라오스 남부 팍세에서 일주일 후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잠시 헤어진다.

그사이 한 달짜리 비자가 만료돼 보름간 더 비자를 연장하고, 탐롯콩로에 함께 갈 일행을 구하느라 이제야 움직이게 된 것이다. 이번 여행의 동반자는 일 년 예정으로 동남아 여행을 나온 한국인 대학생 성룡이.

우리는 숙소 앞에 서 있는 툭툭을 타고 터미널로 간다. 6시 정각에 출발한 락사오행 버스는 11시 20분에 나 힌(Ban Na Hin) 마을에 우리를 내려놓는다. 이 마을에 숙소라고는 딱 두 개.

그중 한 곳인 시소판 게스트 하우스로 간다. 작은 구멍가게를 같이 운영하는 주인 아줌마께 방을 보여달라고 하니 방은 단출하다. 모기장이 달린 싱글 침대 두 개와 벽에 걸린 선풍기가 가구의 전부고 화장실과 샤워는 공용이다.

방값을 물으니 40000킵(4800원)을 달라고 하는데 주인 아줌마의 영어 실력이 놀랍다. 외국인을 위한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는 아줌마가 영어라고는 정말 단 한 마디도 못 하신다. 방값에 대한 의사소통이 손가락을 이용해 겨우겨우 가능할 뿐이다.


예쁘게 웃으며 깎아 달라고 하니 20000킵으로 방값이 떨어진다. 짐을 풀고 우선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본다. 마을의 끝에서 끝까지 도는데 걸린 시간은 이십 여분. 그 사이 더위는 온 몸에 착 달라붙어 고통스러울 정도다.

나폭 마을의 어린 동생을 돌보는 아이. (왼쪽) / 나폭 마을 강 어귀의 나룻배.
나폭 마을의 어린 동생을 돌보는 아이. (왼쪽) / 나폭 마을 강 어귀의 나룻배.김남희
마을 도로에는 사람보다 닭과 칠면조들이 더 많이 돌아다닌다. 목과 다리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길고 울음소리도 거친 칠면조에게 이유 없는 반감을 가진 내가 한마디한다.


"칠면조는 정말 징그럽게 생기지 않았니? 울음소리도 닭처럼 카랑카랑한 맛은 없이 탁하고 거칠기만 하고."

성룡이의 무심한 듯한 대답이 나를 친다.
"아마 우리가 닭을 먼저 알았기 때문에 그럴 거예요. 우리에겐 닭이 더 익숙하니까. 칠면조를 먼저 알았다면 닭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겠지요."
동물을 대하는 내 태도에도 어쩔 수 없는 편견과 틀이 잡혀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다.

하물며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말해 무엇하리. 내가 좋아하는 신영복 선생의 말씀이 생각난다.
"여행이란 단순한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자신이 쌓아온 생각의 성(城)을 벗어나는 것"이라는 말.
서른 해 넘게 내가 쌓아온 성을 쉽게 벗어날 수는 없겠지.

강변에서 지나가는 우리배를 향해 손 흔드는 가족
강변에서 지나가는 우리배를 향해 손 흔드는 가족김남희
단지 이 긴 여행을 통해 내가 꿈꾸는 것 하나는 이 성에 아주 미세한 균열 하나를 낼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벗어날 수 없다면, 다른 생각과 느낌들이 드나들 수 있는 작은 틈이라도 만들 수 있기를 바랐는데. 그 길의 멀고도 험함을 이렇게 다시 깨닫는다.

숙소로 돌아와 아줌마께 덥다는 시늉을 하니 가겟방을 가리키며 누워서 한숨 자라신다. 아줌마가 시키는 대로 방바닥에 드러누우니 시멘트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시원하다. 돗자리 위에서 두 시간 동안 낮잠을 달게 자고 일어나니 우리뿐인 줄 알았던 숙소에 카멜라라는 영국 여자아이가 들어 있다.

카멜라도 동굴을 가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기에 내일 함께 출발하기로 한다.
"덥다, 더워" 중얼거리며 마당을 어슬렁거리다보니 잔디 위로 앵두만 한 붉은 열매들이 소복이 떨어져 있다.
상처 없는 놈으로 골라 집어 먹어보니 새콤달콤한 게 제법 먹을 만하다.

바닥에 떨어진 열매들을 주워먹고 있는데 주인아줌마가 긴 장대를 갖다주신다. 그 장대로 마당의 나무 열매를 신나게 따먹으며 배를 채운 후 이 동네의 유일한 볼거리라는 폭포로 트레킹을 나선다. 숲 사이로 난 오롯한 길을 따라 두 시간이나 걸었지만 폭포를 찾을 수가 없다.

먼저 다녀온 카멜라가 폭포라고 부를 수도 없을 정도로 작은 폭포라고 하더니 그래서 못 찾는 건지 우리 눈앞에는 도무지 폭포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 결국 폭포는 보지도 못하고 돌아오니 가게 앞마당에서 동네아이들이 배드민턴을 치고 있다.

콩로 마을로 가는 길에는 이렇게 강둑을 뛰어 따라오며 우리들에게 손을 흔드는 아이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콩로 마을로 가는 길에는 이렇게 강둑을 뛰어 따라오며 우리들에게 손을 흔드는 아이들을 자주 볼 수 있다.김남희
아이들과 어울려 배드민턴으로 땀을 뺀 후 찬물에 샤워를 한다. 한결 개운해진 몸과 마음으로 근처 식당에 들어가 저녁을 먹는데 롯 콩로 동굴에서 막 돌아온 4명의 서양 배낭족들과 마주쳤다. 듣던 대로 동굴은 상상 이상으로 훌륭하다는데 가는 길이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복잡하고 어렵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가다 보면 다 알게 될 거야. 걱정하지마"라고 답한다. 그 사이 거센 비가 시원하게 쏟아진다.

6시에 일어나 시장에서 과일을 사서 툭툭을 기다린다. 기사 아저씨가 요금으로 세 명에 30000킵을 달라기에 깎고 또 깎아 25000킵에 협상. 사람과 짐을 가득 실은 툭툭은 비포장도로를 한 시간 가까이 달려 반 나폭(Ban Na Pauk) 마을에 우리를 내려놓는다. 이곳에서 배를 갈아타고 반 콩로(Ban Kong Lo)까지 가야 한다.

선착장에 도착하니 사공 아저씨들이 나무 아래 모여 잡담을 하고 있다. 동굴 근처 마을인 반 콩로까지 가는 배삯을 물으니 40달러를 부른다. 영어는 전혀 통하지 않기에 흙바닥에 나뭇가지로 숫자를 써가며 협상을 한다. 아무리 애원을 해도 30불 이하로는 절대 안 가겠다고 튕긴다.

남 힌 분(Nam Hin Bun), 롯콩로 동굴 주변의 마을들을 외부세계와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인 힌 분 강은 이 지역 사람들의 생명수로 목욕을 하고, 밥을 짓고, 빨래를 하는 모든 생활이 이 강물로 이루어진다. 양동이에 물을 길어 가는 한 여인.
남 힌 분(Nam Hin Bun), 롯콩로 동굴 주변의 마을들을 외부세계와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인 힌 분 강은 이 지역 사람들의 생명수로 목욕을 하고, 밥을 짓고, 빨래를 하는 모든 생활이 이 강물로 이루어진다. 양동이에 물을 길어 가는 한 여인.김남희
"그럼 우리도 할 수 없죠 뭐."
아저씨들께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트렉터나 픽업 트럭을 찾아보기 위해 마을로 들어선다. 마침 한 중년 부부가 트랙터를 몰고 눈앞을 지나간다. "반 콩로! 반 콩로!"를 외치니 고개를 저으며 뭐라고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라오어로 말을 한다.

하늘을 가리킨 후 손으로 파도 치는 모양을 만들고, 다시 트랙터를 모는 몸짓을 한 후에 고개를 젓는 아저씨의 복잡한 수신호를 종합해 분석해보니, 우기가 시작돼 길이 망가져 도저히 못 간다는 뜻 같다.

결국 배가 유일한 수단이다. 우리도 손짓과 몸짓을 다 동원해 "이 근처에 배를 가진 집이 어디인가요?"를 물으니 알아들은 아저씨가 한 집을 알려준다. 그 집으로 찾아가 자고 있는 주인 아저씨를 깨워 가격을 묻는다.

잠시 머리를 긁으며 고민하던 이 아저씨, 종이에 힘차게 "25불!"을 쓴다. 다시 힘겹게 할인을 시도해보지만 장시간의 협상결과는 24불. 결국 1불 깎았다.

물소 가족의 휴식.
물소 가족의 휴식.김남희
아저씨가 기름을 넣고, 배에 설치할 엔진을 꺼내 들고 오는 사이 우리는 남의 집 평상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이 마을에 하나뿐인 콘크리트로 지은 집이다. 평상에 앉아 집 안을 흘끔거리니 아침을 먹던 아줌마가 들어오라며 손짓을 한다.

약간의 기대를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가니 역시, 밥을 먹으라며 주저앉힌다. 이런 일은 절대로 거절하지 않는 나이기에 신이 나서 카멜라와 성룡이까지 불러 밥상머리에 달라붙는다. 상 위에는 라오스인들의 주식인 찰밥에 반찬이라고는 딱 두 가지.

그래도 손으로 찰밥을 떼어 조물거리며 나물무침의 국물에 찍어먹는 맛은 꿀맛 이상이다. "음, 맛있어." "야, 이거 맛있는데." 다들 신음소리 비슷한 감탄사를 뱉으며 먹느라 정신이 없다.

동네 꼬마들 모두 모여라! 비상 소집이다! 콩로 마을.
동네 꼬마들 모두 모여라! 비상 소집이다! 콩로 마을.김남희
밥을 먹고 나니 카멜라는 사탕을 나눠주느라 온 동네 아이들을 몽땅 불러모았다. 온 동네 꼬마들의 전송을 받으며 드디어 배에 오른다. 일행은 사공과 우리 셋, 아침에 같은 툭툭을 타고 온 청년까지 다섯 명.

다섯 명이 일렬로 앉으면 꽉 차는 작은 쪽배에 목욕탕 의자 같은 납작한 나무 받침을 깔고 앉으니 배는 "부르릉 부릉" 소음을 내며 출발한다. 길 양편으로는 카르스트 지형의 석회절벽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물가에서 놀던 아이들은 우리 배가 지나가면 일제히 손을 흔들며 "사바디(안녕!)"를 외친다. 세 시간이 걸린다더니 배는 네 시간 가까이 지나서야 콩로마을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다시 배를 타고 동굴로 들어가야 하는데 왕복 배삯이 70000킵이라며 한 푼도 안 깎아준다.

언제 만들었는지 영어로 '공정가 70000킵이'라고 적힌 피켓까지 들고 온다. 성룡이가 조급한 티를 내서는 안 된다며 수영이나 하자기에, 물가에서 놀고 있으려니 아저씨가 다시 와 60000킵을 부른다. 그 이하로는 절대로 안 될 것 같아 결국 보트에 올라탄다.

이 배의 사공은 두 명. 한 명은 앞에서 엄청나게 커다란 전지가 달린 전등으로 길을 비추고, 한 명은 후미에서 배를 몬다. 5분쯤 가니 물가에 입을 벌린 동굴이 나온다. 여긴 물살이 세서 우리는 걸어서 동굴 입구로 이동하고, 아저씨들은 배를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며 동굴로 올라온다.

콩로 마을 어귀의 풍경.
콩로 마을 어귀의 풍경.김남희
입구는 넓고도 깊다. 동굴 입구로 들어선 후 다시 배를 타고 동굴 탐험을 시작한다. 아직 본격적인 우기가 시작되지 않아 물이 부족한 탓에 우리는 중간중간 배에서 내려 걸어서 이동을 하고는 한다.

이 동굴은 가장 높은 곳의 높이가 100미터, 가장 넓은 곳의 너비도 100미터에 가까울 정도의 엄청난 규모로, 동굴의 입구에서 출구까지는 엔진이 달린 배를 타고 한 시간을 가야 한다.

30분쯤 가니 배를 세운 아저씨들이 횃불과 전등을 들고 따라오라고 한다. 횃불을 따라 동굴의 상부로 올라가니 여기저기 솟아오르고 내려앉은 종유석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자연이 만든 천연의 불탑들이다.

우리는 구석구석 횃불을 비춰가며 감동에 찬 신음을 마구 내지르며 어쩔 줄 모른 채 돌아다닌다. 아저씨들의 재촉으로 아쉬운 마음을 남기고 돌아서니 이제 마을로 돌아갈 거란다. 동굴 끝까지 가자고 했더니 그럼 70000킵을 내야 한단다.

결국 10000킵 더 내기로 하고 동굴을 빠져 나오니 반 싱래 마을이다. 이곳에서 잠시 쉰 후 다시 배를 타고 동굴 안으로 들어와 콩로 마을로 돌아오니 5시. 동굴을 왕복하고 돌아오는데 3시간이 걸린 셈이다.

물살이 센 동굴 입구를 배를 끌고 거슬러 올라가는 사공.
물살이 센 동굴 입구를 배를 끌고 거슬러 올라가는 사공.김남희
이 마을에서 숙박할 의사가 없는 우리는 서둘러 배에 오른다. 어느새 해는 저물기 시작하고, 물가에는 하루일을 마친 사람들이 몰려와 몸을 씻는다. 몸을 씻던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하늘에는 별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한다.

어두워지자 반딧불이들이 하나둘씩 떼를 지어 하늘로 날아오른다. 제 몸에서 빛을 내며 날아오르는 무수한 반딧불이들. 강원도 삼척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 반딧불이를 잡아 호박꽃 안에 넣고 호박등을 만들어 놀고는 했는데. 멀고 낯선 땅에서 보는 반딧불이들이 내 마음을 고향으로 몰고간다.

잠시 후 물가에는 어둠이 깊이 내려앉고, 우리는 불빛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강물을 거슬러 간다. 배는 내 작은 손전등 불빛에 의지해 속도를 최대한 낮추고 항해를 한다. 결국 저녁 8시가 넘어서야 아침에 보트를 탔던 나폭 마을에 도착한다. 예상대로 툭툭은 내일 아침에나 있다고 한다.

여관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마을에서 어디 가서 잘 것인가를 놓고 잠시 고민하다 결국 아침을 얻어먹었던 집으로 찾아간다. 재워달라고 부탁을 하니 대문간에 걸린 'Kirhi Travel'이라는 작은 간판을 가리키며 세 사람이 40000킵을 내라고 한다. 30000킵에 자기로 하고 집 안으로 들어선다.

동굴 안은 종유석들이 형성한 탑들로 가득 차 있다. 플래쉬 없이 횃불만으로 찍느라 흔들렸다.
동굴 안은 종유석들이 형성한 탑들로 가득 차 있다. 플래쉬 없이 횃불만으로 찍느라 흔들렸다.김남희
짐을 내려놓고 나니 아줌마가 꽁치통조림과 죽순 무침으로 밥상을 차려주신다. 망고와 사탕 몇 개로 하루를 보낸 후라 허겁지겁 밥을 밀어넣는다. 늦은 저녁을 먹고 나서 씻으려고 보니 이 집에도 수도는 없다. 빗물을 받아놓은 커다란 대야의 물을 떠 겨우 양치만을 하고 화장실을 물으니 화장실도 없다.

이 집은 이 마을에서 제일 부잣집인데다가 TV와 비디오, 선풍기, 냉장고도 갖추고 사는 집인데 화장실이 없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얘기인가? 아무 데나 가서 볼일을 보라는 아줌마의 몸짓에 난감해하고 있는데 여섯 살 먹은 이 집 딸 능앗이 내 손을 잡고 집을 나선다. 따라가니 집 앞의 절로 들어가더니 절 한 켠의 화장실에 나를 데려다준다.

화장실 앞에서 나를 기다려 준 능앗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니 아줌마가 마루에 모기장을 걸어주신다. 10시간 넘도록 작은 통통배의 목욕탕 의자 같은 좌석에 쪼그리고 앉아 보낸 후라 몸은 곧 쓰러질 듯 피곤한데 잠은 오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집이 마을에서 TV를 갖고 있는 거의 유일한 집인 탓에 온 동네 아이들과 어른들이 다 몰려들어 비디오를 보느라 좁은 마루에 서른 명 가까운 사람들이 들어찼다.
TV의 소음도 소음이지만 서른 명의 사람들이 내뿜는 몸의 열기로 인해 잠이 오지 않는다. 게다가 카밀라와 내가 들어간 분홍색 모기장은 완벽한 '보온 모기장'이다.

싱래 마을로 이어지는 동굴의 출구
싱래 마을로 이어지는 동굴의 출구김남희
바람이 단 한 줄기도 통하지 않도록 완벽하게 차단된다. 성룡이에게 설치해준 파란색 모기장은 바람이 솔솔 통해 새벽녘에 추웠다는데 우리가 덮고잔 모기장은 구멍이 하도 촘촘해 숨쉬기가 갑갑할 정도였다.

카밀라는 아줌마들이 총각을 편애하는 건 전 세계 어디나 똑같다며 농담을 한다. 밤 내내 주르르 흐르는 땀을 닦느라 뒤척인다. 새벽 무렵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아침에 눈을 떴는데 그치지 않고 있다.

아침밥을 먹으면서 올케가 보내준 한국엽서를 능앗에게 보여주었더니, 눈 덮인 불국사 사진을 보다가 이게 뭐냐고 묻는다. "이건 날씨가 아주 추울 때 하늘에서 폴폴 내리는 눈이라는 거야"라고 손짓발짓을 동원해 설명을 하지만 능앗은 도저히 이해를 못하는 눈치다.

하긴 성인들도 살면서 몸소 보고 겪은 것만을 겨우 이해할 수 있을 뿐인데, 한 번도 눈을 본 적 없는 이 어린 능앗이 어떻게 이해를 하겠는가. 아침을 먹고 능앗과 라오스 글씨를 쓰며 놀고 있으려니 아줌마가 툭툭 출발 시간이 되었다고 알려준다.

하룻밤 사이에 정이 담뿍 든 능앗과 놋에게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선다. 아직도 부슬부슬 내리는 이 비는 더 있으라는 이슬비일까, 어서 가라는 가랑비일까?

오후의 잔양이 쏟아져 들어오는 동굴을 빠져나오는 나룻배.
오후의 잔양이 쏟아져 들어오는 동굴을 빠져나오는 나룻배.김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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