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215

악인은 지옥으로 (5)

등록 2003.08.27 14:57수정 2003.08.27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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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은 만 이틀이 지난 후에야 눈을 떴다. 그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기에 처음엔 물만 마실 수 있었다.

그러다가 차츰 연자탕 같은 음식을 먹게 되었고, 상처는 차츰 아물어 가고 있었다. 열흘 째 되던 날 청년은 반쯤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때 자신을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준 호옥접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하였다. 그리고 더 이상 폐를 끼치면 안 된다면서 가겠다고 하였으나 호옥접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아직 보름이 되지 않았기에 상처는 완전하게 아물지 않은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아물던 상처가 터지면서 덧나게 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지금보다 더 오랜 기간 동안 침상에 누워만 있어야 하기 때문에 못 나가게 한 것이다.

청년은 호옥접이 믿을 만한 의원이라는 생각에 자신의 뜻을 굽혔다. 그는 바로 이회옥이었다.

죽림을 벗어난 직후 거듭된 공격에 맥없이 당하던 중 기발한 방법으로 배루난을 저승사자에게 보낸 그는 전신이 상처투성이가 되었다는 것도 잊은 채 관도를 따라 걸었다.

살인을 저질렀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걸어온 길에는 두 줄기 선혈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상처에서 솟은 선혈이 걸을 때마다 땅에 떨어진 것이다.

실혈이 심하면 제아무리 고수라 할지라도 목숨을 잃는다는 것을 간과한 그는 가랑비가 점차 폭우로 변해간다는 것도 잊고 걷고 또 걸었다.


그러던 중 거듭된 뇌성벽력에 문득 정신을 차린 그는 쏟아지는 비를 피하기 위하여 가까운 장원으로 다가갔다.

장원의 대문에 기대있던 그는 스르르 문이 열리자 뒤로 쓰러졌고 이에 안간힘을 쓰며 일어서려다가 그만 혼절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보고 호옥접이 달려와 구해준 것이다.

"궁금한 게 또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하하!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모르는 것 빼고는 다 아니까 아무거나 물어 보십시오. 아는 한도 내에서 말씀드리리다."
"예에…? 호호! 모르는 것 빼고 다 안다고요? 호호호!"

따끈한 찻잔을 들어 올리던 이회옥은 호옥접의 교소에 싱긋 미소를 지었다. 둘은 정신을 잃었던 이회옥이 신지를 회복한 이후 하루 종일 같이 있으면서 수많은 대화를 나눈 바 있었다.

금기서화(琴棋書畵)에 관한 대화는 물론 사서삼경이나 제자백가, 하도낙서(河圖洛書)에 이르기까지 실로 그 범위가 방대하였고, 깊이 또한 제법 깊은 고담준론이었다.

호옥접은 수많은 서책을 읽었지만 체계적으로 학문을 닦은 바가 없다. 따라서 읽기는 하였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굉장히 많다고 하였다.

이 말에 호기심이 동한 이회옥이 무엇을 이해하지 못하였느냐고 물은 것이 대화의 시발(始發)이었다.

호옥접이 이해할 수 없던 것을 물으면 이회옥이 설명하였다. 침상에 누워 훈장 노릇을 한 것이다. 대화가 계속되는 동안 그녀는 그의 끝간데 없을 지식에 여러 번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의 그런 지식이 오로지 독서백편의자현의 결과라는데 더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말이 그렇지 정말 심오한 뜻을 지닌 어떤 글귀를 그저 백 번 읽는다고 그 뜻이 절로 깨우쳐지게 된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독서백편의자현이 진짜 실현되려면 그것을 이해할만한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해야 하고, 오의(奧義)를 깨우칠만한 두뇌가 없다면 거의 불가능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스승 없이 홀로 독학했다는 이회옥의 박학다식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매 아흐레마다 방문하던 장일정이 이번에 오지 않았다.

전 같으면 왜 오지 않나를 생각하며 전전긍긍하였을 호옥접이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장일정이 무뚝뚝한 성품이라면 이회옥은 다정다감한 성품이었다. 게다가 상대의 심리 상태를 파악해 적절한 배려를 하는 섬세함까지도 지녔다.

또 상대로 하여금 미소짓게 하는 재주를 지니고 있었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방금 전 모르는 것 빼놓고는 다 안다는 식의 말 같은 것이 그런 말이다. 그의 남들과 다른 어휘 선택 때문에 호옥접은 계속해서 교소(嬌笑)를 터뜨려야만 하였다.

예를 들어 뻔히 아는 소리를 하면 다른 사람들은 "두말하면 잔소리"라고 하는데 이회옥은 "두말하면 숨가쁘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가만히 곱씹어 보면 절로 미소짓게 하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장일정이 방문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상심하거나, 고심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웃느라고 바빴다.

한편 이회옥은 상처가 거의 회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애써 총단으로 가려 하지 않고 있었다. 배루난과 말년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면 아마도 대대적인 수사가 벌어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장에 버리고 온 무적검에 선혈이 묻어 있었으니 상처 입은 자들을 추적할 것이 뻔하다.

이런 상황에서 전신에 상처를 입은 몸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내가 범인이오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에 다 나을 때까지 나설 수 없었던 것이다.

말년이 살아 있다면 상황이 다를 것이다.

하극상을 범한 배루난이 또 다시 공격하였기에 방어차원에서 그를 처단하였다고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극상을 범했다는 증언을 해줄 말년이 죽은 이상 함부로 나섰다가는 죄를 덮어쓸 수도 있다는 것을 참작한 것이다.

의성장은 무천의방 부방주의 사저라 하였다. 따라서 다른 곳은 다 수색하더라도 이곳만은 지나칠 확률이 컸다.

게다가 나중에라도 자신이 이곳에 있었다는 것을 증언만 해준다면 별다른 의심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어쨌거나 이곳에서 시간을 벌면서 누가 들어도 납득할만한 전후상황을 만든 후에 나서도 나서야 할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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