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란대를 거두었습니다

나의 작은 텃밭이야기

등록 2003.09.18 06:30수정 2003.09.18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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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란대가 식탁에 맛난 반찬으로 올라오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심는 과정이야 생략하더라고 토란대를 베어서 일일이 껍질을 벗기고, 따가운 햇살에 잘 말려야 합니다. 날씨가 좋으면 사흘이면 족하지만 비가 온다든지 흐리면 애써 까놓은 토란대가 흐물거리며 짓무르기 때문에 말리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그렇게 말린 토란대는 공기가 잘 통하는 곳에 보관했다가 반찬을 하기 하루나 이틀 전부터 물에 불립니다. 토란의 아린 맛을 없애야 하기 때문에 최소한 하루는 물에 담가 두고, 서너 번 물을 갈아주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고사리류의 나물을 무치듯이 갖은 양념을 해서 내놓으면 됩니다.

a 아직 거둘 때가 아닌데 거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컨테이너 가득합니다.

아직 거둘 때가 아닌데 거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컨테이너 가득합니다. ⓒ 김민수


태풍 '매미'는 이른 봄부터 애써 가꾼 토란이파리를 모두 앗아갔습니다. 앙상하게 줄기만 남은 토란대를 베니 두 컨테이너 가득하고, 종일 앉아서 토란대를 벗기고 나니 껍데기로 한 컨테이너는 반납을 합니다. 또 그것을 따가운 햇살에 널어놓고 말리면 마치 누가 훔쳐가기라도 한 듯이 봉지에 담아 새끼손가락으로 들어도 될 정도밖에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린시절.
낮에 토란대를 베어놓고 논밭에서 종일 일을 하고 오셔서는 30촉짜리 희미한 백열전구 아래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시며 토란대를 까시던 부모님이 제일 먼저 떠오르더군요. 두 분은 토란대를 까시면서 무슨 대화를 나누셨을까요?

제가 거두었던 토란대보다도 훨씬 많은 토란대도 다음 날이면 모두 가지런하게 멍석에 널려 있었습니다. 잘 말린 토란대는 서너 식구가 한 번 해먹기 좋을 만큼씩 묶여졌고, 어머니는 그것을 팔아 오셨습니다.

좋은 것은 죄다 내다 팔고, 상품가치가 없는 것들만 남아있다가 식탁에 올라와도 얼마나 맛이 있던지요. 밭에서 거둔 것도 실한 것은 모두 내다 팔고, 벌레 먹고, 못 생긴 것만 식탁으로 올라오는 것이 늘 불만이었던 어린 시절. "엄마, 우리도 잘 생긴 것 좀 먹어 보자"고 하며 어머니 가슴에 못을 박았던 철없던 시절.


a 껍질을 벗기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가을 햇살에 말리고 있습니다.

껍질을 벗기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가을 햇살에 말리고 있습니다. ⓒ 김민수


토란대를 까면서 어머니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니, 이번엔 제가 잘 말려서 제일 실한 것들만 골라서 부쳐 드릴게요. 어머님, 아버님 두 분이서만 잡수세요.'


아직 토란은 실하지 않아서 거두지 않았습니다.
토란도 거두면 실한 것, 예쁜 것만 골라서 서울에 보낼 것입니다.

군것질거리가 흔하지 않던 유년의 시절 겨울.
방안에 있는 걸레까지도 꽁꽁 얼고, 두터운 솜이불 바깥으로 나와 있던 코에서는 하얀 김이 들락달락하던 그 때 화롯불에 감자나 고구마를 넣어 두었다가 야심한 저녁에 꺼내 먹는 맛도 일품이었지만 광에 보관해 두었던 토란을 한바구니 삶아서 소금을 찍어 먹는 맛도 좋았습니다.

"얘야, 토란은 썩은 것을 먹어도 탈이 안 난단다. 그만큼 토란이 좋다는 얘기지."

실한 것은 아이들의 몫으로 남겨주고 상한 것만 골라 드시던 부모님들. 정말 맛있나 해서 극구 말림에도 썩은 것을 먹어 보았지만 쓰디 쓴 맛이 입에 가득해서 먹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철없이 자란 아들이 이젠 어머님께 손수 심고 거둔 토란을 보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으로 골라서 말입니다. 이젠 썩은 것일랑 드시지 마시고 제일 실하고, 예쁘게 생긴 것만 드세요.

a 따가운 가을 햇살에 이틀만에 잘 말랐습니다.

따가운 가을 햇살에 이틀만에 잘 말랐습니다. ⓒ 김민수

오늘과 같은 날씨가 내일까지만 이어 진다면 토란대는 다 마를 것입니다. 온 몸에 간직하고 있던 수분을 다 빼앗긴 토란대, 다시 물에 담가 놓으면 자신이 품고 있는 향내를 물씬 풍기며 다시 풍성해 질 것입니다.

태풍 매미가 지나간 나의 작은 텃밭.
일으켜 세웠던 콩들이 익어가길 소망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그 결과를 알 수 없고, 줄기를 잘라 다시 심었던 파는 다시금 꼿꼿하게 일어서 새순을 내고 있습니다. 부추도 다시 생기를 되찾았고, 감자는 여기저기서 작았던 싹들이 효자노릇을 하며 듬성듬성 올라오고 있습니다.
아예 갈아엎은 곳도 있는데 그 곳에는 오일장에 나가 씨앗을 구해서 마늘을 심던지, 김장무나 배추를 심어야겠습니다.

팽나무 그늘에서 토란대와 씨름을 하며 보낸 오늘은 참으로 오랫동안 부모님 생각, 고향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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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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