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재 박상의 영정오창석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고 달은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그들을 대체한 세력은 '사림(士林)'이었다. 사림의 연원은 조선의 개국에 반대한 정몽주와 길재 등으로부터 시작하여 세조의 왕위 찬탈에 불복하여 지방으로 낙향한 이들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향촌에 기반을 두고 끊임없이 후학들을 길러 내 중앙 정계로 진출시켰다. 이런 가운데 1515년(중종10년) 담양 부사로 있던 눌재 박상(訥齋 朴祥)은 순창군수 김정과 함께 신씨복비소(愼氏復妃疏)를 왕에게 올리게 된다.
소(疏)는 중종 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에 대한 복위를 주장한 것으로, 폐비 신씨는 반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해서 박원종 등에게 살해 당한, 연산군 때 좌의정을 지낸 신수근의 딸이었다. 반정에 성공한 이들은 신수근의 딸이 왕비로 있다가는 자신들이 위태로워질 것을 염려해서 왕을 압박해 폐비를 관철시켰는데, '이는 의리와 도를 저버린 일'이므로 신씨를 복비 시키고 박원종 등은 국모 폐출의 죄를 물어 관작을 추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상소로 인해 박상은 귀양을 가게 되는데 이 문제를 두고 조정은 논쟁에 휩싸였고, 그 동안 무오, 갑자사화의 여파로 약화되었던 사림이 의리와 명분을 내세우며 결집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당시의 상황에서 권력자의 의지에 반하는 주장이란 목숨을 잃을 뿐만 아니라 멸문지화까지 당할 수 있는 엄혹한 시대였음을 놓고 볼 때, 실로 의기 넘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