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같이 선명하게 붉은 팥배마저 없었다면 무척 슬펐을 것이다김규환
다시 한 줌을 쥐고는 밖으로 하나라도 튈까 밑동을 잡고 살살 막대기로 두들긴다. 두세 번 건드리기만 해도 양철지붕에 소나기 툭툭 쏟아지는 소리처럼 요란하다. 보자기 바닥엔 까맣게 마른 들깻잎, 벌레가 수북히 쌓인다.
이젠 적당히 털어 냈으니 조금씩 세게 쳐대면 된다. 처음부터 사정없이 내리 쳤다가는 어디로 튈지 모른다. 그 집 음식에는 들깨 국물이 들어가지 않은 것 없었으니 한 톨이라도 흘릴 수 없었다. 들깨가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를 확인하고는 빠른 속도로 세차게 내리친다.
"착착착 착착착착"
"척척척 척척척척"
여인 몸에서 조금 떨어져 나간 들깨 대가 훅 불면 넘어갈 듯 가벼이 스러진다. 여인의 몸에서도 젖비린내 간 곳 없고 한여름 가득 품었던 들깨 향기가 진동한다.
"엄마, 나 쩌기 아그배 한나 따 묵고 와도 돼요?"
"그려. 뽀로(바로) 와야쓴디."
"알았으라우."
앵두만도 못한 작은 시큼한 배를 따먹어 심심한 입을 달랜다. 그림자 한없이 길어지자 소년은 바람이 하얀 억새 간질이는 소리에 밭으로 간다. 벌써 어머니는 하던 일을 대충 마무리 중이셨다.
"아가. 서둘러야 쓰겄다. 지게 갖고 왔쟈?"
주섬주섬 들깨 잎을 주워 밖으로 던지고 보자기를 싸서 지게에 올린다. 소년은 향기 덩어리와 씨 받을 오이 두 개, 무 세 뿌리, 배추 두 포기를 차곡차곡 쌓아 띠꾸리로 단단히 묶고는 어머니를 돕는다.
"엄마, 대강 해놓고 가면 안 된다요?"
"그럴란다. 글도 다음에 한 번 더 털어야헝께…."
"해 넘어가겄소."
여긴 아직 해가 있다. 백아산 꼭대기엔 벌써 희뿌연 연기에 휩싸여 있다. 살랑살랑 하늬바람에 허수아비 모자 간신히 걸려 있다.
"나 먼저 가께라우~"
"그려. 조심혀."
막내아들이 재작년 날카로운 낫에 찔려 고생 깨나 했던 기억을 소년 어미가 먼저 떠올렸던 것일까.
한 여름 세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누이랑 형과 함께 일을 마치고 허기진 배를 오이와 물로 채우다 일이 끝나자마자 어른들보다 먼저 뛰어 내려온다. 산길에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마구 뛰었다.
소년이 "읔!" 소리와 함께 '동정지' 상수리나무 밭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지게에 꽂혀 있던 왜낫이 오른쪽 팔뚝을 기다려 난도질을 했다. 여름철이라 반소매 아랫부분을 여지없이 흩뜨려 놓았다. 검게 탄 팔뚝에 살이 너덜거렸다. 신경까지 파고 들어갔다.
소년은 울지 않았다. 형제들은 낫이 꽂혀 있는 팔을 조심히 들어서 날을 뽑고 오이와 옥수수 싸맸던 보자기를 풀어 상처를 동여매고 총총 집으로 돌아왔다.
다친 즉시 보건소에 가서 꿰맸으면 줄 상처만 났을지도 모른다. 어른들은 '굳이 병원 갈 필요 없으니 사독(邪毒)이나 막자' 했다.
큰집에서 할머니가 쓰시던 화로를 가져다가 석유를 상처에 바르고 숯불에 며칠이나 쬐게 했던가. 그 덕에 상처는 더 커졌다. 소년은 보름 동안 살이 타는 경험까지 해야했다. 소독 한번 하지 않았으니 오른쪽 팔뚝 안쪽이 이글이글 익는 고통에 삼겹살 타는 역겨운 냄새를 풍겼다.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나중에는 폭 1cm에 길이 10cm로 구부러진 한반도 깃발 모양의 흉터가 남았다. 검게 타들어 간 살점을 얼마나 도려냈던가. 하얀 다이진 가루를 몇 통이나 비워서 산딸기 열매 입자처럼 오돌오돌 새 살이 돋게 했는지 모르는 끔직한 사건이었다.
▲고마리 꽃은 이렇게 붉은색과 흰색으로 핍니다. 꼴 베던 그 시절...김규환
이제 이태가 지난 탓인지 아무런 느낌도 감흥도 없다. 다만 일부러 만지든지 뭉텅한 물건이 닿았을 때나 자릿자릿 재그러울 뿐이었다. 허리가 움직이듯 뛰어 평지(平地)를 오는 것보다 일찍 집에 도착했다.
마루에 짐을 하나둘 내려도 반기는 이 아무도 없다. 외양간엔 누렁 소가 성이 난 것인지 구유와 빗장을 쉼 없이 들이받는다.
소년도 화가 났다. 곰부랏대를 찾아 소코뚜레를 강제로 끌어다가 콧물 핏물 뒤섞여 질질 흐르도록 흠씬 두들겨 패줬다. 식식거리며 주인을 원망하지만 가축까지 제 멋대로 사는 건 어린 꼬맹이 눈에도 거슬렸던 모양이다.
성이 풀리자 남은 풀을 한 삼태기 퍼다가 주고 꼴 망태기를 메고 가까운 도랑가로 간다. 오늘 이렇게 굶길 수는 없다. 급할 때면 개울에 푹푹 빠져가며 고마리 풀을 베어다 주곤 했다. 서너 깍지 베면 한 망태가 되니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내일이라도 비가 쏟아질 참인지 하루살이 감나무보다 낮게 난다. 무등산 쪽으로 해가 지면서 주위의 온갖 먼지와 시름을 모아 태우는지 북새통을 이룬다. 평상심으로 보면 이보다 아름다울까 싶다.
아마도 비가 한바탕 내리면 맑아지려나.
| 들깨 터는 고향의 소리/ 김규환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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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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