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심은 콩을 삶아서 해강이 솔강이 주니 사진 찍을 틈도 안주고 다 먹네요. 부전자전이 대를 이어서 이어지려나.김규환
'콩 박사' 아버지의 남다른 콩 사랑
아버지는 '콩 박사'였다. 그걸 빼닮았는지 형은 콩 재배 기술자다. 사연인 즉 아버지는 콩 연구를 하신 게 아니라 콩을 쌀 다음으로 즐겨 드셨으니 콩 박사 아닌가.
그러니 우리 밥그릇엔 늘 손톱만큼 탱탱 불은 노란 콩이 쌀이나 보리와 섞여 있었다. 가마솥에 콩을 섞어서 밥을 하면 쪼글쪼글하면서도 적당히 익어 씹히는 맛이 무척 좋게 길들여진 걸까. 하여튼 나도 콩밥을 꽤 좋아한다.
그렇다고 아버지는 처음부터 콩을 좋아하신 건 아니다. 20대 초반까지는 콩 소리만 들려도 비린내가 난다고 넌더리를 치며 물리실 정도였단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해방 3년 전 15살 때 할아버지 대신 일제 징용에 가신 아버지는 아오지 탄광에서 2년여 노역을 하다가 쌀 2, 강냉이 4, 콩 4 비율의 밥을 주니 정말 ‘콩밥’이더란다.
속이 아려서 변도 못 볼 지경에 이르게 되었단다. 이런 '메주콩 밥'이 얼마나 먹기 힘든가는 메주 쑬 때 세 숟가락만 제대로 떠먹어보면 그 고역을 알 수 있다.
더 이상 참지를 못하고 급기야 같이 가신 아랫마을 선배 둘과 짜고 야밤에 도주를 하게 되었다. 흙탕물이던 두만강을 헤엄쳐서 건너신 아버지.
어릴 적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찌나 재미있었던지 밤 깊은 줄을 몰랐다. 결국 만주에서 호박죽에 보리밥 실컷 얻어 드시고 3일 만에 일경(日警)에게 붙잡혀 돌아오셨다. 하지만 해방되고 석 달이 지나고 광복 사실을 아셨으니 콩밥 신세 면키 얼마나 힘겨웠는지 알만하다. 아오지 막장은 그 만큼 멀고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던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