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깨 터는 소리 따라 엄마 찾아간 소년

[사진이 있는 짧은 소설 1] 가을날의 시린 동화

등록 2003.10.06 12:33수정 2003.10.06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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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나무 단풍이 제일 먼저일 겁니다.
붉나무 단풍이 제일 먼저일 겁니다.김규환
요즘 들어 집안 분위기는 몰라 보게 썰렁하다. 가을걷이를 며칠 남겨두고 둘이서 합심해도 모자랄 판에 냉랭한 기운이 감도는 건 왜일까. 집안 곳곳엔 나뒹구는 농기구가 더 많아졌다. 마룻바닥도 며칠째 닦지 않았는지 먼지가 잔뜩 끼어 있다.


몇 마리 남지 않은 암탉, 장닭만 한가로이 마당을 후벼판다. 돼지새끼 우리 울타리에 앞발을 올려놓고 언제라도 튀어나오려 떼를 쓰고 있다. 돼지 오줌과 소 오줌이 모이는 곳은 여러 날 마당으로 흘러 넘친다.

집안 꼴이 말이 아니다. 중병아리 한 마리가 합수통(合水桶)에 빠져 간신히 씻겨 줬지만 시름시름 앓으니 언제고 죽을지 모른다.

여인은 그 꼬락서니 집안 사정을 모를 리 없지만 들일이 시급하니 하니 나가봐야 한다. 제 몸 돌볼 겨를 없다. 문 앞만 대충 훔쳐 닦고 부랴부랴 남의 집 떠나듯 하는 것이리라.

시골 다랑지 논 가에 핀 구절초
시골 다랑지 논 가에 핀 구절초김규환
길게 뻗은 차일봉 깊은 산자락은 이슬 한 점까지 일어나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기 힘들다. 휘 불면 날아갈 듯 맑게 갠 까실한 날이 며칠이고 이어졌다.

가을은 산몰랭이에서부터 아래로 밀려 내린다. 하지만 바닥엔 노랗게 벼가 익어갈 뿐 아직 초록빛 덮고 있으니 겨울은 멀어 보여도 살갗에 닭살이 듬성듬성 돋는 건 속일 수 없다. 뿌연 초록 달빛 받은 듯 산 안개가 햇살에 눈 치켜 뜨기 겹도록 동동 떠있다. 호랑이가 담배를 핀 걸까.


산길 굽이굽이 고기떼 만큼이나 국화 종류도 제각각 향연(饗宴)을 베풀고 있다. 일찍이 이런 좋은 가을날은 없었다. 싸한 그리움을 하늘에서 베껴 가득 품고 흐드러지게 피어 있으니 눈 시려 눈물 흐를 참이다.

하여도 봄에 취나물 주고 가을에 이리 아름다운 꽃을 주는 산국화 볼 짬도 없다. 밀려오는 향기로만 깊어 가는 계절감을 느낄 뿐이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배추밭에 뿌려줄 갈색 고무 오줌통을 이고 오르기가 그리 쉽던가.


을씨년스런 가을날의 옥수수 대
을씨년스런 가을날의 옥수수 대김규환
서둘러 손도 잡지 않고 오르는 걸음걸음에 쉰 살을 한 해 남겨둔 아낙 얼굴엔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이 깊은 산중에 홀로 오르는 것도 한두 번 아니건만 이다지 팍팍한 건 처음이다.

사람 맘 모르는지 시냇물 소리 정겹게 도란도란 속삭이며 굴러간다. 한 사람 지나가는 건 방해되지 않은가? 다람쥐는 알밤, 상수리 줍다 잠시 쳐다보고 제 할 일 한다. 어느새 붉나무는 붉은 옷으로 일찌감치 갈아입고 겨울날 채비에 들어갔다.

물 건너기를 벌써 다섯 차례다. 이젠 상수리나무, 조릿대 가벼운 잎을 비벼대며 바삭거리는 '웃동정지'만 오르면 절반 남은 거리에서 거지반 온 것이다. 그런데 왜일까? 허약해진 몸 때문인가? 계추(季秋)인데도 땀이 비오듯 쏟아져 온 몸을 흠뻑 적신다.

주변 으름은 새들 밥이 된 지 오래다. 찔레 열매 보리수 붉어지고 똘감이 꽤나 햇살을 받아 누런빛을 띠고 있다. 지나는 곳마다 장구밥도 널려 있다.

가을을 익히는 호박 한덩이
가을을 익히는 호박 한덩이김규환
뱀골에 하릴없이 짐을 내리고 시냇물을 한 손 떠 마시고 땀을 식힌다. 꼭대기만 두어 시간 넘으면 여인의 친정(親庭)이지만 갈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열 아홉 때 시집와서 못살겠다고 산을 넘을 때도 이 곳으로는 오르지 않았다.

주저앉아 쉴 틈도 없다. 너른 들녘 열 닷 마지기 추수를 어찌됐던 여인의 몸으로 혼자 다 해놓아야 올 겨울을 날 수 있으니 어깨가 뻑적지근하다. 마음은 천근만근 무거워진다. 어찌 손으로 그 많은 벼를 벨 수 있단 말인가?

걱정이 산 넘어 산인지라 곧 자리를 털고 밭으로 향한다. 고즈넉한 밭 가장자리엔 늙은 오이 노각이 힘없이 너울졌다 쓰러진 풀숲에 놓여 있다. 호박넝쿨 제 생명 마친 듯 늙어가고 있다. 아이들이 꺾어먹지 않은 옥수수 대 신세가 자신으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처연히 흔들린다.

깨금이라 부르는 개암 열매. 동화에 보면 동굴에서 '칵' 씹어 도둑을 물리친 것이 바로 이 개암이랍니다.
깨금이라 부르는 개암 열매. 동화에 보면 동굴에서 '칵' 씹어 도둑을 물리친 것이 바로 이 개암이랍니다.무네미닷컴
옆 다락 밭은 병아리 솜털 마냥 노랗던 목화 꽃이 붉어졌다가 하얗게 너털웃음 지을 준비를 한다. 아이들이 솜사탕을 따서 입에 넣을 때마다 세 개씩만 따먹으라던 때가 심심치도 않고 희망은 있었다.

"휴-"

길게 한숨 내뱉고 고단한 오후 일을 시작한다. 이 '긍내기' 골짝은 해가 길어 '웃고 내려갔다 울며 저녁밥 짓는다'는 곳으로 일하다 어둑해지는 걸 깜박하는 일이 잦았다. 밥 때 놓쳤다고 몇 번이나 핀잔을 들었던가.

'물텅굴' 주변 작은 폭포 사이로 씹히지도 않는 돌배 몇 개 익어간다. 그나저나 '끼룩끼룩' '짹짹' 소리 가끔 들릴 뿐 오늘은 고라니 소리 한번 들리지 않는다.

생각 같아서는 지친 몸을 앉히거나 뉘어 푹 쉬고 싶지만 쌀쌀해진 날씨에 땀 식으면 더 오싹해지니 마음을 다잡고 먼저 배추에 소매(오줌)을 조금씩 나눠 뿌려준다.

이윽고 쉴 짬을 내지 않고 밭 군데군데 모아 놓았던 들깨 더미를 들고 온다. 행여 쏟아질까 주둥이를 하늘로 향해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긴다. 깜짝 놀라 튀는 메뚜기도 이젠 살이 통통 쪄 있을 뿐 완연히 가을 풀빛을 닮았다. 파랗던 들깨 줄기가 삐쩍 말라비틀어진 듯 서로 잘 어울린다.

들깨 대가 마르지 않았다면 메뚜기 소리도 못 들었을 것이다. 이제 이 작은 체구의 곤충은 뭘 먹고 늦가을을 날까?

잘린 들깨 등걸 솟아올라 고랑 위에 아무리 천을 잘 깔아본들 울퉁불퉁하다. 바닥에 넓게 펴고 가지런히 옮겨 놓는다.

허수아비 들녘 쓸쓸히 지키고...
허수아비 들녘 쓸쓸히 지키고...김규환
때마침 학교를 마친 꼬마는 오리나 되는 먼길을 엄마 찾아 나섰다. 소년은 논에 어머니가 안 뵈면 큰 댁 할머니나 아무에게도 여쭈지 않고 골짜기에 버릇처럼 가보았다. 그 때마다 있었다. 오늘도 확신한 듯 하다.

담벼락에 달려 있는 배 하나 따서 입에 물고 빈 지게를 들춰 멘다. 행여 도깨비라도 나올까 낫은 허리춤 높이로 손에 들려 있다. 다슬기, 가재 잡으며 즐겁게 다녔던 형제자매를 두고 오늘은 어린 홀로 길을 나섰다. 몇 번이고 한눈 팔다가 목적지를 찾은 듯 뛰다가 벅차면 걷기를 반복한다.

길가에 개암 열매가 때 맞춰 익었다. 가지를 잡아 당겨 세 알을 땄다. 겉껍질을 벗겨 딱딱한 '깨금'(개암의 전라도 사투리)을 입에 넣고 탁 씹자 "칵!"하고 동굴이 무너진 듯한 소리가 들린다.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지만 아무 일 없다. 호두 부딪치는 소리가 잠시 귀를 울렸을 뿐이라는 걸 알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퉤-." 껍데기를 뱉고 나니 입안 가득 고소한 참깨 맛이 퍼졌다.

들깨를 털다가 소설을 쓰다.
들깨를 털다가 소설을 쓰다.김규환
이제 500m 가까이 다가왔다. 종종 걸음으로 산길을 오르니 숲 사이로 선산(先山)이 보인다. 고구마 줄기는 멀리서 보아도 황토를 먹고 자라 발갛다.

소년은 마지막 개울을 건너면서 납작 엎드려 물을 연신 들이킨다. 물에 잠긴 낙엽 사이사이엔 도토리가 이내 움을 틔우고 있다. 입에선 아까 씹었던 깨금 알갱이가 잘게 부서져 흩뿌려진다.

고개를 쳐들고 잽싸게 그늘을 뛰어서 지나친다. 이곳을 지날 때마다 꽃뱀이 길을 가로막고 혀를 "낼름~ 낼름~" 개구리 쳐다보듯 했다. 뛰지 않고는 벗어날 수 없었던 기억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언덕에 오르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산자락에 가려 아직 어머니는 보이지 않는다. 꼬맹이 키보다 훨씬 큰 풀이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친다.

"엄마~"
"엄마~"

메아리만 여러 소리로 나뉘어 길게 대답한다.

코끝엔 멀리서도 느낄 수 있는 들깨 향이 확 풍겨 건조한 가을 향기에 실려 하늘을 난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코피가 날 지경이다. 현기증을 가까스로 추스르며 언덕빼기를 오른다.

소년은 확실히 어머니가 있다는 걸 직감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들깨 내음이 이 멀리 올 리 없다. 한결 꼬마는 느긋해졌다. 그제야 바위틈으로 졸졸 흐르다 톡톡 떨어지는 폭포 소리가 들려왔다.

오이 풀 한 줄기, 가시를 둥글게 덕지덕지 달고 있는 수리취 대공을 따서 만지작거리며 휘휘 돌려가며 여유도 부릴 줄 안다. 한 번은 머리통을 치는 통에 밤 가시가 허공에서 내리치는 줄 알았다.

소년이 넘어졌던 돌
소년이 넘어졌던 돌김규환
"엄마! 나 왔어."
"어서 오니라." 나지막이 환영하지만 속으로 웃던 버릇 탓인지 간단한 미소만 잠시 흘릴 뿐이다.

"엄마, 나 왔당께~."
"얼렁와! 근디 어떻게 여기 있는 줄 알고 왔더냐?"
"그저께 들깨 털로 가신다 했잖아라우?"
"안 무섭댜?"
"하믄이라우. 할아버지 묘소도 있고 엄마도 여기 있는 것이 틀림없는데 뭣이 무섭다요?"

어머니는 마른 작대 하나 꺾어와 손에 쥐고 있다. 왼손엔 들깨 줄기를 잡는다. 푸석푸석 맑은 소리가 가슴을 후빈다. 머리를 긁적이게 했던 비듬, 부스럼 딱지 죄다 바닥으로 떨어진 듯 시원하다.

"찰찰찰"

잠시 멈춰 한 알 튈세라 주위 한번 굽어본다. '그래, 네가 이기는가 누가이기나 한 번 해보자'는 심사로 한 풀이를 할 태세다. 잔뜩 독을 품었다. 진지하기가 이를 데 없다.

"거시가 요리 와서 들깨 튀지 않게 쫙 펴보그라와~."
"알았어라우."

"글고 니기 아부지는 봤냐?"
"잉."
"뭐 하시댜?"
"깔 베더구만…."
"깔이라도 벼(베어) 놔야지."

아들은 이런 때는 한숨소리 듣지 않으려고 짐짓 거짓으로 고한다. 학교 앞 점방에서 낮술에 왁자지껄한 소릴 듣고 모른 채 부랴부랴 집으로 온 걸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괜히 일하는 사람 기분만 잡치게 하니 어쩔 도리가 없다.

여인은 못난 서방, 웬수 같은 남편에게 기대를 접은 지 오래다. 착하고 말썽부리지 않는 자식보고 산다고 하는 게 맞다. 무에 기대할 건가.

소년은 궁금했다. 그렇게 원수가 되었건만 밤에 도란도란 두 분이 이야기 나누는 소리는 꽤 정겨웠으니 헷갈리지 않을 수 없다.

한두 번이 아니어 이골이 나고 포기한다했지만 당장 자신의 거북이등 같은 손등에 쥐어진 푸석푸석한 들깨 신세를 보고는 울화가 마음 깊은 곳에 굳은 몽우리 마냥 덩어리로 쌓였다가도 소년을 보자 얼마는 풀어진 듯 하다.

오늘 상심이 더 큰 데는 따로 있었다. 아침에 아이들 잡부금도 쥐어주지 못해 온종일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남편이란 작자는 계집질만 안 했지 이 바쁜 가을걷이에도 허구헌날 백주(白晝)에 술타령에 윷놀이에 폭 빠졌다는 걸 알면서도 꼬마와 다투면 뭐하냐 싶어 그만 궁시렁대기로 마음먹었는지 모른다.

피같이 선명하게 붉은 팥배마저 없었다면 무척 슬펐을 것이다
피같이 선명하게 붉은 팥배마저 없었다면 무척 슬펐을 것이다김규환
다시 한 줌을 쥐고는 밖으로 하나라도 튈까 밑동을 잡고 살살 막대기로 두들긴다. 두세 번 건드리기만 해도 양철지붕에 소나기 툭툭 쏟아지는 소리처럼 요란하다. 보자기 바닥엔 까맣게 마른 들깻잎, 벌레가 수북히 쌓인다.

이젠 적당히 털어 냈으니 조금씩 세게 쳐대면 된다. 처음부터 사정없이 내리 쳤다가는 어디로 튈지 모른다. 그 집 음식에는 들깨 국물이 들어가지 않은 것 없었으니 한 톨이라도 흘릴 수 없었다. 들깨가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를 확인하고는 빠른 속도로 세차게 내리친다.

"착착착 착착착착"
"척척척 척척척척"

여인 몸에서 조금 떨어져 나간 들깨 대가 훅 불면 넘어갈 듯 가벼이 스러진다. 여인의 몸에서도 젖비린내 간 곳 없고 한여름 가득 품었던 들깨 향기가 진동한다.

"엄마, 나 쩌기 아그배 한나 따 묵고 와도 돼요?"
"그려. 뽀로(바로) 와야쓴디."
"알았으라우."

앵두만도 못한 작은 시큼한 배를 따먹어 심심한 입을 달랜다. 그림자 한없이 길어지자 소년은 바람이 하얀 억새 간질이는 소리에 밭으로 간다. 벌써 어머니는 하던 일을 대충 마무리 중이셨다.

"아가. 서둘러야 쓰겄다. 지게 갖고 왔쟈?"

주섬주섬 들깨 잎을 주워 밖으로 던지고 보자기를 싸서 지게에 올린다. 소년은 향기 덩어리와 씨 받을 오이 두 개, 무 세 뿌리, 배추 두 포기를 차곡차곡 쌓아 띠꾸리로 단단히 묶고는 어머니를 돕는다.

"엄마, 대강 해놓고 가면 안 된다요?"
"그럴란다. 글도 다음에 한 번 더 털어야헝께…."
"해 넘어가겄소."

여긴 아직 해가 있다. 백아산 꼭대기엔 벌써 희뿌연 연기에 휩싸여 있다. 살랑살랑 하늬바람에 허수아비 모자 간신히 걸려 있다.

"나 먼저 가께라우~"
"그려. 조심혀."

막내아들이 재작년 날카로운 낫에 찔려 고생 깨나 했던 기억을 소년 어미가 먼저 떠올렸던 것일까.

한 여름 세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누이랑 형과 함께 일을 마치고 허기진 배를 오이와 물로 채우다 일이 끝나자마자 어른들보다 먼저 뛰어 내려온다. 산길에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마구 뛰었다.

소년이 "읔!" 소리와 함께 '동정지' 상수리나무 밭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지게에 꽂혀 있던 왜낫이 오른쪽 팔뚝을 기다려 난도질을 했다. 여름철이라 반소매 아랫부분을 여지없이 흩뜨려 놓았다. 검게 탄 팔뚝에 살이 너덜거렸다. 신경까지 파고 들어갔다.

소년은 울지 않았다. 형제들은 낫이 꽂혀 있는 팔을 조심히 들어서 날을 뽑고 오이와 옥수수 싸맸던 보자기를 풀어 상처를 동여매고 총총 집으로 돌아왔다.

다친 즉시 보건소에 가서 꿰맸으면 줄 상처만 났을지도 모른다. 어른들은 '굳이 병원 갈 필요 없으니 사독(邪毒)이나 막자' 했다.

큰집에서 할머니가 쓰시던 화로를 가져다가 석유를 상처에 바르고 숯불에 며칠이나 쬐게 했던가. 그 덕에 상처는 더 커졌다. 소년은 보름 동안 살이 타는 경험까지 해야했다. 소독 한번 하지 않았으니 오른쪽 팔뚝 안쪽이 이글이글 익는 고통에 삼겹살 타는 역겨운 냄새를 풍겼다.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나중에는 폭 1cm에 길이 10cm로 구부러진 한반도 깃발 모양의 흉터가 남았다. 검게 타들어 간 살점을 얼마나 도려냈던가. 하얀 다이진 가루를 몇 통이나 비워서 산딸기 열매 입자처럼 오돌오돌 새 살이 돋게 했는지 모르는 끔직한 사건이었다.

고마리 꽃은 이렇게 붉은색과 흰색으로 핍니다. 꼴 베던 그 시절...
고마리 꽃은 이렇게 붉은색과 흰색으로 핍니다. 꼴 베던 그 시절...김규환
이제 이태가 지난 탓인지 아무런 느낌도 감흥도 없다. 다만 일부러 만지든지 뭉텅한 물건이 닿았을 때나 자릿자릿 재그러울 뿐이었다. 허리가 움직이듯 뛰어 평지(平地)를 오는 것보다 일찍 집에 도착했다.

마루에 짐을 하나둘 내려도 반기는 이 아무도 없다. 외양간엔 누렁 소가 성이 난 것인지 구유와 빗장을 쉼 없이 들이받는다.

소년도 화가 났다. 곰부랏대를 찾아 소코뚜레를 강제로 끌어다가 콧물 핏물 뒤섞여 질질 흐르도록 흠씬 두들겨 패줬다. 식식거리며 주인을 원망하지만 가축까지 제 멋대로 사는 건 어린 꼬맹이 눈에도 거슬렸던 모양이다.

성이 풀리자 남은 풀을 한 삼태기 퍼다가 주고 꼴 망태기를 메고 가까운 도랑가로 간다. 오늘 이렇게 굶길 수는 없다. 급할 때면 개울에 푹푹 빠져가며 고마리 풀을 베어다 주곤 했다. 서너 깍지 베면 한 망태가 되니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내일이라도 비가 쏟아질 참인지 하루살이 감나무보다 낮게 난다. 무등산 쪽으로 해가 지면서 주위의 온갖 먼지와 시름을 모아 태우는지 북새통을 이룬다. 평상심으로 보면 이보다 아름다울까 싶다.

아마도 비가 한바탕 내리면 맑아지려나.

들깨 터는 고향의 소리/ 김규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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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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