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씰가리'국에 무생채로 밥 비벼 먹어 볼까?

<고향의 맛 원형을 찾아서 40>시래기국과 무생채

등록 2003.10.15 18:15수정 2003.10.20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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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채는 반드시 소금을 넣지 말고 시골집 간장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 아시죠?
생채는 반드시 소금을 넣지 말고 시골집 간장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 아시죠?김규환
환절기를 극복하는 방법, 먹는 음식에 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몸이 버텨낼 수 있을까? 천고마비(天高馬肥)도 잠시였다. 겨울을 향해 치닫는 날씨는 하루가 다르다. 벌써 절기가 바뀌려는가. 우리는 언제부턴가 가을은 없고 늦여름이 지속되다가 동장군(冬將軍)을 맞이한다.

환절기에는 봄부터 쉬지 않고 위로 물을 뽑아 올렸던 나무도 이제 그 일을 그만둔다. 냇물이 차가워지고 지하수가 바깥 공기보다 따뜻해지는 게 이 무렵이다. 만산홍엽(滿山紅葉) 풍악을 울리는 건 이 이치다. 단풍나무 붉고 노랗게 물들인다.

사람에게도 변화가 온다. 피부가 건조해져 거칠어진다. 기관지도 약해져 감기에 콜록콜록 하고 허파에 바람들어가기 쉽다. 애와 어른들은 이 시절을 잘 나야만 한 겨울을 잘 지낼 수 있다. 은행(銀杏)을 삶아 하루 서너 알 씩 먹는 것도 좋다. 그래도 온 집안 사람들이 병원신세를 면키 어렵다.

입맛도 떨어져 햅쌀밥에 잡곡밥, 영양밥을 먹어도 혀끝이 껄끄럽다고 야단이다. 어떤 걸 먹어도 입안을 확 감아주는 끈덕지고 차진 감칠맛이 나지 않는다. 지칠 대로 지친 몸이 더 이상 처지는 걸 막기 위해 대충 몇 숟가락 물 말아먹고 집을 나서지만 나약해진 몸이 허전할 뿐이다.

그렇다고 살림도 빠듯하여 당장 보약을 사러 갈 수도 없다. 바쁜 농사철과 1년 동안 뿌렸던 세상의 알곡을 거둬야 하니 시간 여유가 없다. 뾰족한 수가 없을까? 젓갈 반찬이 맛은 있으되 아직 조개류 젓갈은 안심하기 이르다.


잡곡밥을 만든들 맛난 반찬과 국이 없으면...
잡곡밥을 만든들 맛난 반찬과 국이 없으면...김규환
일손 더 바빠진 농부네

쌀쌀해진 날씨에 언제 서리 쫘악 깔릴지 모르니 농부네 마음은 늘 긴장의 연속이다. 고구마 대 걷어서 줄기 삶아 널어야 하고 덜 익은 호박은 잘라 말려둬야 한다. 고춧대 뽑을 날을 택하기도 쉽지 않다. 짚이고 나무고 베어 헛간에 잔뜩 쟁여둬야 한다.


아침 저녁으론 찬바람에 추위가 살갗을 스치면 무, 배추도 햇볕과 가득 머금었던 수분을 뱉어낸다. 다소 질길 것 같지만 매운 맛만 모두 빠지고 달고 시원한 맛이 난다. 이 때 주부는 손놀림을 부지런히 해 '씰가리'(시래기, 무청의 전라도 사투리)를 뜯어다 한철 먹을 양식을 모아나가야 한다.

밭에 가는 즐거움, 입맛 찾는 즐거움. 이건 제가 심어 잘 자라고 있는 무랍니다.
밭에 가는 즐거움, 입맛 찾는 즐거움. 이건 제가 심어 잘 자라고 있는 무랍니다.김규환
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 끓였던 '씰가리'국

그 날 저녁 때 우리 마을에서는 군불 때는 연기가 모락모락 뒷산으로 기어올라갔다. 밭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신 어머니는 날이 저물 무렵에야 저녁밥 준비에 들어가셨다.

머리에 '씰가리'인지 시래기인지 쓰레기인지 무청을 가득 이고 오느라 목이 뻐근해도 풀 틈도 없었다. 밥하기 전에 마당가에 짐을 풀고는 '씰가리'를 국솥에 뚜껑을 닫기도 힘겹게 가득 앉혀 놓으신다.

불 때기는 아들에게 맡기고 그제야 투실투실한 양푼에 쌀을 퍼와서는 득득 문질러 구정물 통에 겨 물을 두 번 버리고 한 번 더 깎아 조리로 일어 담고 뉘를 골라 가마솥에 앉혔다.

캄캄해진 정지에서 풋나무를 갖다가 불을 사르니 활활 그을음을 날리며 잘도 탄다. 얼마간 땠을까? 김이 모락모락 나며 '씰가리' 삶아진 냄새가 진동을 한다. 원래 가을 '씰가리'는 풋내가 더 많이 났다.

"더 때끄라우?"
"찬찬히 때그라. 불 끄집어 내 각고 밥솥에 불 때그라."

끓는 걸 보아 더 끓이다가 밥 불을 때러 옆으로 옮겼다. 그 사이 어머니는 물 받을 동이를 받치고 고리 채반에 '씰가리'를 건질 준비를 하신다.

가을날에는 총각무 보다 그냥 김장용 가을 무가 더 시원하고 무 뿌리도 부드럽습니다.
가을날에는 총각무 보다 그냥 김장용 가을 무가 더 시원하고 무 뿌리도 부드럽습니다.김규환
"엄마 도와드릴끄라우~?"
"딜라(데일라). 한 삐작(쪽)으로 가 있어."
"글다 넘어가면 어쩔라구 근다요?"
"뽀짝(가까이)오면 큰 일 난다와~."
"알았어라우."

큰 주걱과 국자를 써보지만 뜨거운 물이 팍팍 튀고 김이 쉬 빠지지 않아 어머니는 김에 순식간에 휩싸였다. 몸이 땀에 절었는지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옆에서 따로 거들어 드릴 수도 없었다. 잘못 했다간 언제 손을 데일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건지고 자꾸 건져내도 하나 둘 따라 올라오는 익은 '씰가리'를 모두 퍼내는 건 쉽지 않다. 조리로 몇 번 휘휘 저으니 금방 끝난다. 곧바로 물에 담그신다. 풋내는 영양소가 파괴되더라도 오래 우려서 없애는 게 최고였다.

삶은 물을 퍼내고 솥을 깨끗이 씻어 국끓이기를 시작한다. 재료는 별 다른 게 없다. 된장 두 국자를 퍼서 쌀뜨물에 휘휘 저어 풀어놓고 무 '씰가리' 열댓 줄기 가져와 두어 번 거칠게 송송 썰어 집어넣으면 된다.

여기에 마늘 대여섯 쪽을 칼꽁댕이로 대충 푹푹 찧어 넣고, 풋고추 네 개 길고 엇비슷하게 썰고, 멸치 똥만 발라 대가리와 몸통을 손바닥으로 둘둘 비볐다가 넣고 끓인다. 막판에 거친 고춧가루 풀어 된장 떫은맛을 뺀다.

가을엔 무 줄기가 배추 쭉대기(줄거리)보다 맛이 좋다. 배추는 부드럽긴 하지만 무르다. 쫄깃쫄깃한 맛과 부드러운 이파리 부분의 감촉을 함께 느끼려면 아무래도 무여야 한다.

무 시래기 삶기. 거친 것은 삶을 때 미리 무잎을 넣어야 합니다. 끓기 전에 소금 조금 넣으면 더 파랗겠지요?
무 시래기 삶기. 거친 것은 삶을 때 미리 무잎을 넣어야 합니다. 끓기 전에 소금 조금 넣으면 더 파랗겠지요?김규환
무청 넣고 생채 만들어 차리면 다른 반찬 필요 없어

어머니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개중 큼지막한 무 뿌리 세 개를 뽑아 오셨으니 다음 밭에 가실 때까지는 생채를 해 먹을 양으로 충분하다. 김장도 김장이려니와 이런 맛에 가을 김장거리를 심는 것이다.

생채는 가을 김장 무의 겉 청은 떼어내서 삶아 국 끓이고 안에 있는 부드러운 속잎 서너 장을 남겨 채를 뚝딱뚝딱 썰어 고춧가루 넣고 마늘 찧고 참깨 한 숟갈 넣으면 되는 간단한 반찬이다. 설컹설컹 씹히는 맛이 최고다.

입맛에 따라 멸치젓갈이나 새우젓 또는 황새기젓을 넣으면 입맛 돋구는데 둘 없는 반찬이요, 침이 꼴깍꼴깍 넘어간다. 더 매운 걸 원하면 풋고추를 두 개 썰어 넣어도 된다.

그 맛을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무 잎이 있으니 상큼하다. 깨가 씹히니 고소하다. 무채에서 서서히 빠져 나오는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뿐인가. 붉은 색에 대파가 없어도 벌써 파란 줄기가 손가락 한 마디씩 썰려 들어가 있으니 눈이 먼저 좋아라 한다. 먹음직스럽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들었는지 모른다.

찬물에 담가 놓으면 냄새가 가십니다. 부분부분 두루 섞어서 밀봉해서 냉동실에 넣어 뒀다가 한 봉지씩 꺼내 국을 끓이면 됩니다.
찬물에 담가 놓으면 냄새가 가십니다. 부분부분 두루 섞어서 밀봉해서 냉동실에 넣어 뒀다가 한 봉지씩 꺼내 국을 끓이면 됩니다.김규환
조촐한 저녁상에 둘러앉아 남은 국물에 밥 비벼 먹고…

잠시라도 식을 새라 가족을 먼저 불러모으고 쪽문으로 밥과 무생채만 상에 올려 들어간다. 함치르르 윤기 자르르 흐르는 햅쌀밥에 아버지 드시는 젓갈 하나가 차려져 있다.

뜨겁던 국그릇도 곧 식으니 국물을 둘둘 흔들어 온기를 유지하고 국을 정성껏 퍼서 담는다. 쟁반에 올려 각자 몫을 받아 들고 밥 세 숟가락 말아 후루룩 후루룩 떠먹으니 소가 여물 먹고 코방귀뀌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돼지 움직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 그릇씩을 비우고 나서야 손놀림이 다소 느려졌다. 그 때가 되어야 상위에 생채가 놓인 걸 알고 젓가락질을 하기도 했다. 한 그릇을 더 먹겠다는 사람은 국솥에 잔불이 아직 있어 더 걸쭉해진 국을 떠다 먹는다.

두 번째는 국을 되직하게 말아 몇 번 떠먹다가 남은 밥을 마저 다 말고 그 위에 생채를 듬뿍 올려 둘둘 비벼서 먹는다. 이 때 드디어 감칠맛이 나고 침이 끈끈해지고 입안이 즐겁다.

그 날 먹었던 '씰가리' 국은 멸치 몇 마리밖에 넣지 않았는데도 추어탕 맛이 났다.

여기에 끓이면 더 맛있겠죠? 이 솥 안에는 지금 추어탕이 끓고 있습니다.
여기에 끓이면 더 맛있겠죠? 이 솥 안에는 지금 추어탕이 끓고 있습니다.김규환
가을은 무, 배추가 맛있는 계절

바야흐로 가을. 무 배추가 맛있는 계절이다. 가을 쌈거리로 노란 배추속 만큼 좋은 게 없고 국거리로 시래기 만한 게 없다.

서늘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가을 채소는 안전하기도 하다. 물리지도 않는다. 가격마저 저렴하다. 무 두어 뿌리 살 때 바닥에 놓인 무청을 모두 달라고 하면 상인이 더 좋아한다. 돈 안들이고 말끔히 치우니 일석이조 아닌가.

무 뿌리는 이제 매운탕 맛을 한껏 더 낼 철이다. 그 동안 무채도 그렇고 매운탕도 맛이 없었던 것은 재료답지 않는 재료를 썼기 때문이다. 이제 감자, 호박 시대는 지났다. 무 뿌리로 갈치조림을 하든, 동태국을 끓이든 맛나지 않은 게 없다.

뿐인가? 무 뿌리에는 감기와 위장에 좋다는 효소가 풍부하니 맘껏 즐길 때이다. 식당주인은 무, 배추로 푸짐하게 한 상 차려내 계절감을 더하면 고객들이 한층 늘어날 것이다.

마지막으로 비벼 드셔 보세요.
마지막으로 비벼 드셔 보세요.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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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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