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에 물들고, 차에 취하고, 열매 따먹고...

붉고 까만 추억의 열매 다 따먹는 계절

등록 2003.10.23 12:14수정 2003.10.23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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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이런 아름다운 곳이 있다니 기분 참 좋습니다. 장성군 북일면 금곡영화마을 입구에서. 벼베기가 한창입니다.
아직도 이런 아름다운 곳이 있다니 기분 참 좋습니다. 장성군 북일면 금곡영화마을 입구에서. 벼베기가 한창입니다.김규환
금수강산 물이 내리고 단풍 절정으로 치닫는 계절


가을이 깊어 가고 있다. 들녘 누렇더니 이젠 하나 둘 알곡, 열매만 남기고 사라진다. 하늘은 공활하다. 구름 한 자락 없이 푸르디푸르니 가슴이 더 저민다.

붉나무, 느티나무, 벚나무, 은행나무, 복자기, 홍단풍, 당단풍, 고로쇠 형형색색 노랑, 빨강, 다홍, 주황, 보랏빛, 자주색 옷을 입고 나들이 나왔으니 눈부시다. 물빛마저 찬란하다.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살모사(殺母蛇)나 두꺼비의 희생에 머리가 숙여지듯 풀, 나무도 잠시 커가기를 멈추고 단풍으로 사람 눈을 즐겁게 한다.

분명 잎을 키우고 줄기 마디마디를 굵게 했던 꿈틀거리는 성장은 잠시 휴식을 취하려나 보다. 봄여름 긴 세월 머금었던 물기를 뱉어내고 밑으로 물을 내리는 자연의 이치에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발을 흥건히 적셨던 이슬도 이젠 서리가 되어 발을 시리게 한다.

그래! 줄기든, 잎이든 스러지고 떨어져 푹푹 썩어라. 썩어서 퇴비가 되어 씨앗을 보듬고 있다가 땅에 뿌리내리거든 자양분이 되거라.

보리수, 포리똥, 보리똥
보리수, 포리똥, 보리똥김규환
금수강산 백두대간 줄기줄기 흐르는 강물처럼 남으로 내려온 단풍이 밤새 서리맞고 백두산,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가리왕산, 치악산, 태백산, 민주지산 타고 덕유산에 지금 붉은 깃발을 꽂았다.


며칠 있으면 한동안 지리산에 정박하여 남녘 너른 들의 황량함을 채우겠지. 계룡산, 내장산, 백운산, 무등산에 노닐다가 마침내는 월출산 사람 끌어 모으고 겨울 한라산으로 건너간다.

탱자와 가시. 향이 유자와 비슷하고 진합니다. 주머니에 넣어 다시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탱자와 가시. 향이 유자와 비슷하고 진합니다. 주머니에 넣어 다시면 기분이 좋아집니다.김규환
동무와 차 한잔 어때요?


눈이 즐거운 계절. 보아서 마음만 화려해지면 들뜨기 안성맞춤이다. 이 때 마음을 다스리는데는 물이 최고다. 그 다음이 그윽한 차 한잔이다.

옛 추억을 곱씹을 동무와 마주하고 도란도란 이야기 하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지. 건조한 가을 날씨에 차 향이 코끝으로 밀려오면 방안 가득 맡기 좋은 내음이 가득하리라. 오래 머무르는 향기의 추억처럼.

이 때 나는 커피마저 색감이 달라진다. 초가을에는 누렇다가, 차차 짙어져서 붉은색을 띤다. 이 무렵부터는 고동색이었다가 진한 갈색으로 맞춘다. 차 숟가락으로 설탕과 프리마를 조금 더 줄여나가다가 급기야 둘 다 넣지 않으니 이러다가 가을에 빠지고, 가을을 타고, 헤어나지 못하는 수가 더러 있었다.

청미래 열매가 익어가고 있습니다.
청미래 열매가 익어가고 있습니다.김규환
열매를 맛보면 눈과 입이 동시에 즐겁다.

입이 즐거운 일은 또 하나 있다. 맛난 밥을 먹는 것인데 늘상 먹는 것 입에 물리니 어디론가 홀연 나가 시름을 잠시 잊고 열매를 하나 씩 따먹어 세상에 이런 맛도 있나 음미할 수 있는 좋은 시절이다.

야생 보리수 열매는 여름 내내 파리 떼가 똥을 찍찍 깔려 놓았는지 붉은 열매에 희뿌연 점이 점점이 박혀 있다. '포리똥', '보리똥'이니 씨까지 씹어도 씁쓸하지 않으니 이 얼마나 좋은가.

피보다 붉은 '팥배'는 팥 크기다. 야산 길가에 잎 떨어지고 붉게 익은 것을 마주치면 인사하여 그 시큼한 맛을 보아도 즐겁다. 붉기는 토마토, 사과, 선혈의 그것과 다르다. 맑고 고운 붉은색 일색이다.

정금
정금김규환
'찔구' 꺾어 먹던 찔래 열매를 만져 입안에 섬유질 가득 머금어 혀를 도려낼 듯한 기분에 "퉤-" 뱉어버리면 그만이다.

밭뽕, 산뽕이 부족하면 우린 들로 산으로 가서 꾸지뽕 잎을 가시에 찔려가며 따와야 했다. 찔리지 않게 조심하여 뇌(腦)를 닮은 꾸지뽕 열매를 따서 흰 뜨물 흐르지 않게 입에 넣어보라.

낮은 키로 밭가에 몇 개 있는 장구밥나무 열매도 이젠 노랗더니 약간 탄 듯한 건빵색을 띠고 손짓하고 있다.

찔레 열매
찔레 열매김규환
정금 열매는 벌초할 때 가서 얼마나 익었는가 눈여겨 봐뒀다가 이 때 쯤 가보면 건조하고 척박한 땅을 가리지 않고 푸르다가 차츰 갈색으로 나중에는 검정색으로 익는다.

이걸 하나 따서 입에 넣으면 수많은 작은 입자가 입안에 고루 퍼지는데 그 기분을 누가 알까? 먹다보면 입술이 푸르댕댕 시퍼렇게 변한다. 머루와 포도의 중간 맛으로 술을 담가도 좋다. 홍주(紅酎)는 여기에서 나온다.

팥배2
팥배2김규환
그래! 청미래덩쿨도 이젠 파랗지 않다. 나무 할 때 가장 싫었던 양지바른 산에 오르면 동글동글한 열매가 지천이다. '명감', '맹감'을 하나 따서 입에 넣으면 껍질은 단지 알맹이를 보호하고 사람을 유인하는데 만 유익할 뿐 아무 쓸모가 없다. 말린 고춧가루 굵게 빻아 놓은 듯하니 겉을 걷고 속을 씹으면 솜사탕 저리 가라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람 하나 못이기고 떨어진 죽이 된 감 홍시 하나 주워 먹어 허기를 달래고 밭에서 일하고 있는 농부 만나거든 "애쓰십니다"하면 모과 하나 줄지 모른다. 차에 실어 돌아오면 넉넉한 향기가 가을에서 가을로 오래 이어진다. 행여 노오란 탱자 만나거든 살짝 하나만 따서 주머니에 넣어오자.

떨어진 감홍시. 조금 더 세게 떨어졌더라면 입을 갖다 댔을지도 모릅니다.
떨어진 감홍시. 조금 더 세게 떨어졌더라면 입을 갖다 댔을지도 모릅니다.김규환
장구밥은 장구처럼 생겼습니다. 노란 것은 아직 잊지 않았습니다.
장구밥은 장구처럼 생겼습니다. 노란 것은 아직 잊지 않았습니다.김규환
꾸지, 꾸지뽕, 뿌지뽕
꾸지, 꾸지뽕, 뿌지뽕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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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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