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7일, 무슨 일이 있었나?

[가을걷이하는 시골 풍경 1]아버지의 라디오와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

등록 2003.10.27 23:17수정 2003.10.27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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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이 밝아오는 시골의 아침
어렴풋이 밝아오는 시골의 아침김규환
늘 좋은 소식과 돈을 가져오시는 우체부 아저씨


깡마른 우체부 아저씨가 오르막길 일색인 산길로 자전거 타고 집 앞에 이르면 늘 좋은 소식이 왔다. 서울로 올라간 두 형과 누나는 일주일이 멀다하고 잘 지낸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이 때마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 옆에서 편지를 훔쳐 읽곤 했다.

먹을 게 없어 시골마을을 떠났던 위 세 형제들은 굶을망정 아끼는 게 습관이었다. 먹을 것 못 먹고서도 매달 한번은 소액환을 보내왔다. 아버지는 등기우편을 받았다는 확인 도장 찍는 재미와 면소재지 우체국에 가셔서 소액환을 현금으로 바꿔 오는 재미로 사셨을 정도였다. 그 일은 전적으로 아버지 소관이어서 어머니는 감히 나서질 못했다.

행여 아버지가 면사무소 행 버스를 타시면 이웃 사람들은 '또 돈이 왔는가보다'며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러니 자랑삼아 말하지 않아도 자랑을 늘어놓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마을마다 그 소문이 퍼져 면에서 돈 잘 버는 효자 났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자연 집안 살림이 다시 피는 재미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즐거운 나날이었다.

시골에서는 그 돈으로 소를 사서 기르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또 부쳐온 돈을 월 20~30만원씩 3년 동안 차곡차곡 모아 고향 마을에서 8마지기 1600평을 사나갔다. 동네사람들은 "이러다 규환이 집이 양지 앞 논을 다 살 판이다"고 수군거리기까지 했다. 그러니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짐작하고도 남으리라.

백아산 아랫마을 전남 화순군 북면 방리 양지마을이 오른쪽으로 조금 보입니다. 지금은 벌써 가을걷이가 끝난듯 합니다. 산정상에서 움푹 패인 곳 바로 위가 그 유명한 백아산 마당바위입니다.
백아산 아랫마을 전남 화순군 북면 방리 양지마을이 오른쪽으로 조금 보입니다. 지금은 벌써 가을걷이가 끝난듯 합니다. 산정상에서 움푹 패인 곳 바로 위가 그 유명한 백아산 마당바위입니다.김규환
라디오를 끼고 사신 아버지는 라디오를 끄지 않으셨다.


이런 재미에 아버지 라디오 소리는 더 커져만 갔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언제나 라디오와 함께 하셨다. 그 까맣고 전축만큼 큰 라디오. 화가 나시면 라디오도 온전치 못했기에 1년에 한번은 바꾸시니 유행까지 좇으셨다.

아침에 깨어날 때는 '아차부인 재치부인'으로 시작해서 정오 무렵 '5분극 김삿갓 방랑기', 오후 소죽 쑬 때는 어린이 방송 '축구소년 차범근'과 '마루치 아라치'를 들었다. 부전자전으로 나도 라디오에 푹 빠졌다. 밥 먹을 때도 라디오는 흘러나왔다. 잠잘 때는 '세월 따라 노래 따라'의 구수한 아저씨 음성이 들려왔다.


밤 9시를 훌쩍 넘긴 시각 그래도 우리 라디오는 꺼질 줄 모른다. 낮이나 밤이나 라디오를 끼고 사시는 아버지는 라디오와 떨어져서는 살 수 없었다. 차라리 라디오를 보듬고 산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산 일을 하러 가시거나 들일을 가실 때도 건전지 떡약을 고무줄로 단단히 묶어 지게에 지고 가신다. 한번이라도 라디오를 끄신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 덕에 어린 산골짜기 소년은 지글지글 끓는 라디오 소리에 실려오는 전파를 잠을 뒤척이면서 까지 들어야 했다. 나중 이명(耳鳴)현상이 심해졌을 때는 귀에서 어릴 적 들었던 라디오 소리가 나오는가 착각할 지경이었다.

낮엔 잡음 없이 잘 나오던 라디오도 밤이 되면 승냥이, 늑대가 우글거리듯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다. 전파를 잡느라 싸이클을 돌리면 지글지글 끓는 소리와 음악이 섞여 나오다가 "미 괴뢰 도당 박정희, 전두환 인왕산 두꺼비를 타도하자"는 적개심을 가득 품은 북한방송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밤새 꺼지지 않는 라디오는 새로 건전지를 끼워도 일주일을 버티기가 힘들었다. 간혹 장날이 멀면 소금가마나 한데에 두었던 떡약을 다시 끼워 수명이 다 할 때까지 들을 정도였으니 한 때 할머니들이 연속극에 빠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다랭이 논. 한 배미에 4~50평이나 될까요?
다랭이 논. 한 배미에 4~50평이나 될까요?김규환
무서리 내리던 날 아침 일찍 벼 베러 가는 식구들

1979년 10월 26일 밤은 무던히도 맑아 별이 총총 하늘을 밝혔다. 차고 넘쳤는지 은하수가 죄다 쏟아져 내려 풀잎엔 하얗게 서리가 엉겨붙어 있었다. 감나무 잎도 하얀 색으로 바뀌어 따지 않은 감이 더욱 붉어 보였다.

마침 학교 가지 않는 날이다. 아버지는 쇠죽을 한 구유 가득 퍼주고 식구들 숫자에다 여벌 낫을 더 챙겨 숫돌에 가느라 아침 시간을 꽤 길게 보내고 계셨다.

된장 씰가리국(시래기국)에 미리 벤 통일벼를 찧은 햅쌀밥을 대충 말아먹고 낫과 숫돌, 새꺼리를 챙기느라 새벽부터 바쁘다. 싸늘한 아침 기운에 두껍게 걸쳐 입고 모자 하나씩 쓰고 여느 날이나 다름없이 아버지 애물(愛物) 라디오를 보자기에 튼튼하게 싸서 들고 집을 나섰다.

문전옥답(門前沃畓)이라 멀지도 않아 200m만 가면 우리 논이다. 짧은 길이었지만 그래도 신작로 바닥에 쑥쑥 자란 말 풀과 질경이, 바랭이에 신발과 양말은 물에 젖은 듯 흥건하다.

1979년 이 때 들녘은 가을걷이가 막 시작되는 철이었다. 다섯 식구가 벼를 베어 나간다. 아버지, 어머니, 형, 그리고 동생과 함께 하루 종일 베면 어른들과 형은 각각 한 마지기, 초등학생 둘 합해 한 마지기 200평을 벨 수 있으니 촌각을 다투는 보리 베기와는 달리 가을걷이는 그냥 식구끼리 해도 무방했다.

그래도 긴 방향 논두렁 쪽에서 시작하여 못줄 띄운 줄을 따라 야금야금 언덕을 향해 먹어들어 가는 벼 베기는 일년 농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최대행사다.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나는 두 포기, 형과 아버지는 네 포기를 한번에 잡고 몸 안쪽으로 움켜쥐듯 끌어안는 자세로 오른쪽 손에 들린 서슬 퍼런 왜낫을 잡아당긴다.

"쓱싹 쓱" "쓱쓱" "쓱-" 소리를 내며 물컹한 논 흙 바로 위를 간혹 스치며 벼 포기가 보일락 말락 밑둥까지 가지런히 베어 나간다.

벼를 아직도 낫으로 베는 곳이 있습니다.
벼를 아직도 낫으로 베는 곳이 있습니다.김규환
정규방송 시간에 웬 음악소리,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

일 머리를 잡고 얼마 베지 않은 시각, 서리가 덜 녹아 채 이슬이 걷히지 않은 때 갑자기 라디오에서 잔잔한 음악 소리가 흘러 나왔다. 볼륨을 최대로 높여 스피커가 찢어질 듯 해놓고도 사람이 옮아감에 따라 옮겨 놓은 것이어서 쉽게 분간이 가는 소리였다.

나는 벼를 베다 말고 낫을 던져두고 라디오 옆으로 다가갔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뭐든 사이클을 돌려놓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장송곡이 이어지면서 여성 아나운서의 울음 섞인 음성이 들려왔다. "어젯밤 대통령 각하께서 급작스럽게 서거하셨습니다. … 국민 여러분께서는 동요하지 마시고 경건한 마음으로 생업에 차질 없이 임해주시기 바랍니다.…우리 모두 박대통령의…"

"아부지 박 대통령이 돌아가셨다요."
"별이 떨어졌다."
"예?"
"그분은 별이나 마찬가지여~"
"글먼 우리나라는 망한다요?"
"망하기나 하겠냐? 글도 한참 힘들 것이여. 배고픈 사람들 많이 살렸제. 수출 얼마나 많이 했냐?"
"아~. 예."


아버지는 막걸리를 한 사발 쭉 들이키시고는 끌끌 혀를 차며 다시 일을 이어가셨다. 그나마 아버지께서 일을 계속하셨던 것은 젊을 때부터 야당생활을 하셨던 때문이리라.

나는 달리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세상에 지존은 언제나 그분이시고 우리나라 대통령은 언제나 그분일 줄만 알았다. 불사조요, 영웅이신 박 대통령이야말로 북진통일을 이룰 유일한 분이라고 여겼다. 그러니 초등학교 6학년에게 충격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온종일 벼를 베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오후 세시 무렵 검지손가락을 베고 말았다. 소년은 밤에는 어른들 몰래 흐느껴 울었다.

그런 음악 방송은 닷새나 지속되었다.
산골의 누런 벼. 그 때는 지금보다 20여일 늦게 가을걷이가 시작됩니다. 탈곡은 아직 멀었지요.
산골의 누런 벼. 그 때는 지금보다 20여일 늦게 가을걷이가 시작됩니다. 탈곡은 아직 멀었지요.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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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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