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졸이던 '국화옆에서'

무서리에 피어나는 한림공원 국화축제

등록 2003.10.27 00:23수정 2003.10.27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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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이면 생각나는 한 송이 국화꽃을 보기 위해 자동차로 40분을 달렸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을 조이며 기다렸던 첫서리가 내린다는 상강. 그 날 아침 한라산에서 보았던 눈꽃처럼 절기는 나의 뒤안길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무서리에 피어나는 국화향기는 다시 돌아온 누님처럼 거울 앞에 서 있다.

a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 김강임

국화축제가 열리는 한림공원으로 가는 길은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상강이 지나면 농부들의 일손은 바빠진다. 특히 올해 농부에겐 힘든 한해였지만 그래도 거둠의 계절이 있기에 기쁨도 있지 않겠는가?
가을 햇빛에 잘 익은 호박, 조, 수수, 콩을 수확하는 모습이 간간이 눈에 보였다. 무서리가 내려야 국화꽃이 핀다는데, 고단한 몸을 추스릴 사이도 없이 들판에서 살게 되는 농부들을 생각하면 내 정신적 사치가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a 늦가을의 정취에 흠뻑 빠져

늦가을의 정취에 흠뻑 빠져 ⓒ 김강임

한림공원에 들어서자 국화 향기가 바람을 타고 코 끝을 스민다. 가을은 한마디 인사도 없이 그냥 떠나가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국화향기를 가슴에 듬뿍 남겨놓고 떠나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빨강 색깔을 띤 소국이 먼저 인사를 한다. 그리고 그 옆에는 노란색과 하얀색으로 조화를 이룬 중국과 대국이 오는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억새꽃과 어우러진 국화꽃길을 따라가니 가을햇빛이 졸졸졸 내 그림자를 밟는다.

a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 김강임

아직 꽃망울을 터트리지 못한 대국들은 무서리를 기다리나 보다. 아니면 시집간 누나가 아직 기별을 주지 않아서인가? 꽃망울을 터트리기까지 산고의 고통을 생각하니 소쩍새가 왜 봄부터 울어댔는지를 알 것만 같다.

매일 아침 우렁각시가 아침상을 차려줘도 대답이 없는 파랑새처럼, 벤치 한 켠에 놓여진 하얀색 대국은 뭔가 고민이 있나보다. 언제나 꽃잎이 떨리게 될지. 이제야 콩알만한 꽃망울이 여물을 키워가고 있으니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a 먼저 핀 소국이 하늘을 우러러

먼저 핀 소국이 하늘을 우러러 ⓒ 김강임

그 중에서도 성질 급한 놈은 노란 색깔을 띤 소국이다. 벌써 활짝 핀 꽃잎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내밀고 벌과 나비를 유혹한다. 파란가을 하늘로부터 좀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에서일까? 그러나 가을하늘은 소식도 없이 바라보고만 있으니 소국의 안타까운 마음을 누가 알아주랴.


a 꽃길을 따라서

꽃길을 따라서 ⓒ 김강임

자줏빛 색깔로 갈아입은 국화꽃 길을 따라가 보자. 성실, 고상, 청초, 순정, 청결, 정조 등 모두가 소유하고 싶은 낱말들이다. 국화에 대한 꽃말을 기억하며 가을꽃은 청초하다는 생각이 든다. 바깥 세상은 시끄러운데도 한림공원에서 만나는 국화꽃은 그저 시름을 잊고 있다. 꽃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국화꽃을 보면 떠오르는 사람은 '미당' 서정주님이시다.

학창시절 줄줄 암기했던 '국화 옆에서'를 다시 한번 테스트 해 본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그 시절 수학시간에 배웠던 지수와 로그, 삼각함수, 미·적분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어찌 '국화 옆에서'만큼은 아직도 가슴속에 또렷하게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a 나비도 잠이 들고

나비도 잠이 들고 ⓒ 김강임

언제 피었는지 벌써 노란 소국은 만개하였다. 인생에도 절정기가 있듯이 만개한 소국을 보니 벌써 40세를 훌쩍 넘긴 내 나이를 헤아리게 된다. 웬일인지 그 키 작은 소국에는 벌과 나비가 찾아들고 있다. 세월의 연륜에서 묻어 나오는 향기 때문일까. 우리가 살아가는 삶도 그 연륜에서 향기를 내 뿜었으면 좋겠다.

나비도 곤히 잠이 들었다. 하루종일 꿀을 따러 다녔으니 얼마나 피곤했을까? 날개가 펼쳐지기를 기다리는 내 마음을 나비는 아는지 모르는지. 끝내 나비는 날개를 접고 쿨쿨 낮잠만 잔다.

a 색깔은 달라도 군락을 이루고

색깔은 달라도 군락을 이루고 ⓒ 김강임

울긋불긋 피어있는 국화꽃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모두가 색깔은 달라도 군락을 이루고 있으니 참 아름다워 보인다. 그런데 왜 이리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같은 색깔을 띠면서도 위선이 있는 것인지. 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밀어내고 아귀다툼으로 얼룩을 만들어 살고 있는지.

a 서로 얼굴을 내밀고

서로 얼굴을 내밀고 ⓒ 김강임

서로 얼굴을 내밀며 자태를 자랑하는 국화옆에서 발길을 멈춘다. 꽃의 세계도 서로가 경쟁을 하는 것일까? 같은 어미의 몸에서 양분을 막고 자랐어도 먼저 만개한 형님이 있는가 하면 아직 영양분이 부족하여 자라지 못한 못난이가 있다. 모양과 색깔이 같으면서도 그 개화시기가 다른 것을 보며, 우리의 가족 구성원 같아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a 꽃 탑은 잔치를 알리는 듯

꽃 탑은 잔치를 알리는 듯 ⓒ 김강임

꽃을 따라 발길 닿는 가을 끝에는 꽃으로 장식한 대형 탑이 세워져 있다. 축제의 잔치를 알리듯 꽃 탑은 형형색색의 색깔로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한림공원의 국화축제는 지난 10월 25일부터 다음달 25일까지 한 달 동안 전시한다.

a " 저에게 자유를 주세요"

" 저에게 자유를 주세요" ⓒ 김강임

자유를 달라고 소리치는 국화도 있었다. 잔치를 위해 몸을 사리는 희생타.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고 철사로 꽁꽁 묶여진 화분 속 국화가 애처롭게 보인다. 만들어지는 아름다움. 이를 어디까지 수용해야 할 것인지.

늦가을 소곤소곤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함께 떠나야 할 사람이 있다면 국화 향기 그윽한 한림공원에서 국향차 한잔을 나눠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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