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처음으로 열린 '파주 어린이 책 한마당'에 가려고 벼르고 벼르다가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갈 수 있었다. 옥수수 밭을 지나 책에서만 본 하얀 메밀꽃이 신기해 다가가려는데 갑자기 행사 지원 차량 한 대가 멈춰 서더니 우리 아이들을 부른다.
"다른 체험 행사야 여기 아니고도 볼 수 있으니까, 너희들은 이 메밀꽃만 보고 가도 돼" 하는 아저씨의 말씀에 남편과 나도 덩달아 키 작은 아이들이 된다. 봉평의 메밀밭보다 넓은 3만평에 메밀을 뿌렸다며 꽃이며 검은 껍질을 가진 씨, 씨의 껍질을 벗기면 나오는 메밀국수와 메밀묵의 재료가 되는 흰 가루까지… 아이들에게 직접 만져보라며 자상하게 설명을 해준다.
옥수수 밭에서의 책읽기 체험이 너무 일찍부터 소문이 크게 나서 눈들이 그리로만 쏠리고, 애써 심고 가꾼 메밀밭을 아무도 몰라보는 게 아쉬웠던 모양이다. 아이들은 물론 나도 메밀꽃을 가까이에서 처음 봤으니, 친절하고 다정한 아저씨의 설명과 태도에 우리 네 식구 모두 기분이 좋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행사야 다 마감이 됐고, 마지막 날 오후의 파장 분위기 속에서 도서 전시 판매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이들에게 원하는 책을 고르라고 하고는 느긋하게 걸으며 이리 저리 구경하는데, 둘째가 뽐내는 얼굴을 하고는 다가와 쓱 책 한 권을 내민다. 책 제목에 들어있는 '할아버지'라는 글자만 보고 엄마 책이라며 들고 온 것.
어린이용 책과 그림책을 보다가 '책 속의 노년'을 만나곤 하는 엄마를 잘 아는 꼬마의 하는 짓이 귀여워 활짝 웃었더니, 이제는 아예 자기 책보다는 엄마 책 고르는 일에 열심인 눈치다. 큰 아이까지 가세해 둘이 계속 들고 온다. '할아버지의 천사', '욘 할아버지', '체리나무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하모니카', '할아버지는 수레를 타고'….
아이 덕분에 그 날 우리 집 도서 구입비 지출 담당인 남편은 예산이 초과해 허리가 휘청했고, 나는 덕분에 제목에 '할아버지'가 들어 있는 어린이 책을 책꽂이 한 쪽에 나란히 꽂는 횡재를 했다.
〈체리나무 할아버지〉는 토니노의 외할아버지이다. 정원사인 할아버지는 시골에서 할머니와 사시며 텃밭에 농사도 짓고, 닭과 거위도 기르신다. 토니노는 도시에서 엄마, 아빠와 사는데, 이층에는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가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살림을 따로 하며 살고 계시다.
할아버지는 오래 전 무남독녀 외동딸인 엄마가 태어나자 기뻐하며 집 앞 텃밭에 체리나무를 한 그루 심으신다. 나중에 이름이 '펠리스'로 바뀌었지만 처음에는 나무의 이름이 엄마의 이름과 같은 '펠리치타'였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체리나무 뿐만이 아니라 거위에게도 이름을 붙여 주셨는데, '알퐁지나'이다.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시자 외갓집에는 이제 할머니가 무척 사랑하던 거위 알퐁지나와 할아버지만 남는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 한 달 동안 외갓집에서 지내게 된 토니노에게 할아버지는 체리나무가 숨을 쉰다는 것도 가르쳐 주시고, 새처럼 고양이처럼 나무에 오르는 법도 알려 주신다.
그러던 어느 날, 시에서 외갓집 밭의 일부를 떼어내 도로를 만들려고 하자 할아버지는 그만 마음에 병을 얻으신다. 편찮으신 동안 토니노의 집에 머무르던 할아버지는 집을 그리워하며 알퐁지나를 안고 공원에 있는 나무에 올라앉아 소동을 일으키기도 하시더니, 결국 치매로 병원에 계시다가 세상을 떠나신다.
아빠와 사이가 벌어져 떨어져 있기로 한 엄마를 따라 토니노는 외갓집에서 살게 된다. 그 때 도로를 내기 위한 공사가 시작되면서 체리나무를 쓰러뜨리기 위해서 포크레인이 오고, 토니노는 체리나무를 지키기 위해서 할아버지가 가르쳐 주신대로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간다.
나무에 이름을 붙여주신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주기 위해 체리나무에 하얀 리본 장식을 해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기도 하고, 밤사이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체리나무의 꽃봉오리가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나무 밑에서 밤새 불을 피우기도 하신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토니노는 할머니는 알퐁지나로 변신했고 앞으로 할아버지는 체리나무로 변신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할아버지 곁에 머물면서 이야기도 하고 체리도 먹을 수 있는 새가 되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고 말한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나누는, 이보다 더 아름다운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있을까.
〈체리나무 할아버지〉에는 노년과 중년, 어린아이로 이어지는 세대간의 이야기는 물론 사람과 자연의 교감, 뜻대로 되지 않는 관계의 어려움과 사람 사는 일의 복잡함, 또 죽음 이야기까지 그 모두가 참으로 자연스레 녹아있다.
단순해 보이는 이야기 속에 그 많은 이야기를 깊이 있게, 그러나 어렵지 않게 담아낸 작가의 통찰력이 놀라울 뿐이다. 이렇게 쉬운 아이들 이야기를 통해 나이듦과 늙음과 죽음을 서로 나누며 생각을 주고받을 때, 어른과 아이 모두 또 한 걸음 성장하며 성숙해질 것이다.
좋은 책을 골라준 아이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한 번 읽어보라며 책을 내민다. 아이가 다 읽고 나면 같이 누워 책 이야기를 하는 행복을 누릴 생각에 벌써 내 눈과 마음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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