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는 승부가 아니다!"

책 속의 노년(64) : 〈나이를 거꾸로 먹는 건강법〉

등록 2003.10.16 16:42수정 2003.10.16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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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여성들을 위한 강의를 할 기회가 있을 때면 늘 강의 초입에 '나도 이제 늙었구나'하고 느꼈을 때는 언제인가를 묻곤 한다. 대여섯 명씩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눈 후에 발표를 하도록 하는데, 거의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달라 재미있게 다같이 웃으며 그 마음을 나누곤 한다.

역시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은 건망증이다. 하도 깜빡 깜빡 잊어버려서 정말 치매가 아닌지 걱정된다는 이야기는 어디서나 빠지지 않는다. 그 뒤를 잇는 것이 몸 여기 저기가 아픈 것과 생각대로 몸이 따라주지 않을 때, 늘어난 흰머리, 돋보기, 아이들을 향한 잔소리 등이다.


집에서 막내로 자란 나는 나이 먹어서도 친정 어머니를 할머니로, 노인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언니와 오빠가 일찌감치 결혼해 아주 오래 전에 손자녀를 보시고 외할머니, 친할머니가 되셨는데도 내 마음 속의 '우리 엄마'는 늘 젊게 느껴졌었다.

내가 아이들을 낳고 그 아이들이 크도록 내 마음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아, 이제 우리 엄마도 늙으셨구나…'한 것은 언제부턴가 어머니와 이야기가 잘 통하지 않게 되면서부터였다.

일흔 여섯 연세가 무색하도록 총명하고 솜씨 좋으신 어머니가, 가만 보니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계속해서 당신이 하실 일들만 챙기면서 내게는 집중을 하지 않으시는 것이었다. 집중을 하지 않으시니 잘 못 알아듣게 되고, 잘 못 알아들으니 흥미가 없어져 이야기를 계속 이어갈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노년학 책을 꺼내 들고 '노년기 성격 특성의 변화'를 들추어본다. 관심과 주의를 외부의 사물이나 행동에 보다는 내면적인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경향인 '내향성과 수동성의 증가'인가…. 역시 아는 게 병이라고, 피식 웃으며 책을 덮는다.

내 경험에 비쳐 봐도 나이 먹으면서 달라지는 것이야 꼭 책을 들추지 않아도 분명하다. 그 변화를 자신과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인정하느냐가 보다 중요한 것을, 섣부른 공부는 늘 그렇듯 사람의 속을 헤집고 낱낱이 밝히려 든다.

"93세 청년의사 히노하라 박사의 무병장수 프로그램"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책〈나이를 거꾸로 먹는 건강법〉은, 흰 의사 가운에 손에는 청진기를 들고 편안하게 웃고 있는 할아버지 사진이 담긴 표지로 일단 눈길을 잡아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은퇴를 했어도 벌써 했을 연세인 93세에도 '현역 인생'을 살고 계신 이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은, 몸의 건강뿐만이 아니라 마음의 건강, 사회적인 건강에 이르기까지 90년 인생의 경험을 천천히 그리고 조목조목 풀어놓으신다.

욕심이 아니라 희망을 가질 것을 강조하며 시작되는 이 책은, 건강한 생활을 위해서는 일반적인 기준치에 매달리기보다는 자기 몸의 상태에 맞춰나가는 것이 가장 좋으며, 과음과 과식 등 지나친 것부터 고쳐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충고로 이어진다.


장수를 꼴불견으로 여기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젊은이들에게 모델이 되는 삶을 살 수는 없을까' 하는 고민에 이르게 된 저자는, 2000년 가을 '신노인(新老人) 운동'을 주창하기에 이른다. 노인만이 할 수 있고, 노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을 해보자는 이 운동의 자격 제한은 75세 이상의 건강한 노인이다.

2020년이면 일본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65세 이상이 된다는 엄연한 현실을 앞에 두고, 평생을 병원에서 환자와 함께 보낸 이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은 '노인은 사회의 성가신 존재'라는 선입견을 깨고 늙음의 가치를 새롭게 세워보고자 하는 열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이 운동을 시작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오랜 호스피스(죽음을 앞둔 환자 간호 및 관리) 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다음 세대에게 전하기 위해 고민해 온 흔적이 여러 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죽음 교육을 통해 '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가'를 알게 하고, 죽음을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속에서 우리들 삶의 길을 찾아보자고 높지는 않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다.

아울러 오랜 의사 생활에서 얻은 의사의 바람직한 모습, 즉 병이 아니라 사람을 볼 줄 아는 눈, 환자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감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젊은 사람의 이야기라면 그렇고 그런, 뻔한 이야기라고 저만치 미뤄 놓을 수도 있겠지만 90년 인생이 잘 녹아 있어 자연스럽게 우리 마음에 다가드는 미덕이 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일본의 오십대를 위한 잡지인〈이키이키(生生)〉에 연재한 글을 정리한 탓에 구슬이 한 줄에 죽 꿰어지는 매끄러움이 좀 부족하다는 점이다. 욕심을 내지 않고 의사로서의 경험은 다음으로 미루고, 나이듦과 죽음에 대한 것만 좀 더 풍성하게 모았더라면 90 인생의 걸음을 뒤따라가며 좀 더 깊이 있는 생각의 계기를 만들어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책의 마지막 옮긴이의 후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어린 시절 외가에서 자라 외할머니에 대한 마음이 각별했는데도 옮긴이는 지난 해 아흔으로 세상을 떠나신 할머니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책을 옮기면서 할머니의 죽음을 많이 생각했고, 죽음 역시 할머니의 한 모습이기에 이제 그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옮긴이가 책으로 변화를 경험했다면 더 이상 무슨 덧붙임이 필요할까 싶었다.

노년은 이래서 참 좋다. 일로 만나든, 우연히 스치며 만나든 진정성을 갖고 마주한 사람에게는 꼭 변화를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 속 저자의 말에 나는 '맞습니다!'를 속으로 외치고 또 외친다. "늙는다는 것은 쇠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숙하는 것입니다." "나이는 승부가 아닙니다. 겸허하게 그리고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건강법 IKIKATA JOZU / 히노하라 시게아키 지음, 고선윤 옮김 / 서울문화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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