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국의 성주청에서 풍류 시인이 되다

선조들의 혼이 살아 숨쉬는 '제주목관아'를 찾아서

등록 2003.11.07 20:33수정 2003.11.08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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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는 벌써 입동에 접어들었는데도, 늦가을의 햇빛은 계절 가는 줄을 모른다. 이맘때가 되면 꼭 꺼내 입는 옷이 바바리 코트다. 더욱이 바바리 코트에 어울리는 머플러까지 목에 둘렀으니 마음은 벌써 떠날 채비가 다 되어있다.

이 바바리 코트에 어울리는 곳이 어디일까? 조금은 한적하지만, 역사가 숨쉬고 있는 곳, 선조의 혼이 살아 숨쉬고 있는 곳으로 떠나보자.


a 제주목관아의 풍경

제주목관아의 풍경 ⓒ 김강임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 행정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가장 소홀하게 여기는 것이 그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는 일이다.

그래서 마지막 가는 가을 해를 붙들고 찾아간 곳이 조선시대 제주지방 통치의 중심지였던 '제주목관아' 이다. 제주목관아는 제주시 관덕정을 포함하는 주변 일대에 분포해 있었으며, 이미 탐라국시대부터 성주청 등 주요 관아시설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관아시설은 1434년 관 부 화재로 건물이 모두 불 타 없어진 뒤, 바로 역사를 시작하여 그 다음해인 1435년에 골격이 이루어졌으며, 조선시대 내내 중·개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제주목관아는 일제강점기 때 집중적으로 훼손되어 관덕정을 빼고는 그 흔적을 볼 수가 없었다. 이에 제주시에서는 탐라국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던 제주목관아를 원래의 양식으로 복구하였다.

a 외대문을 지나

외대문을 지나 ⓒ 김강임

제주시내 관덕정 옆에 자리잡은 제주목관아는 1993년 3월30일 국가지정 사적 제 380호로 지정되었으며, 발굴과정에서 확인된 초속 기단석 등을 토대로 <탐라순력도>와 <탐라방영총람>등 당대의 문헌 및 전문가들의 고증을 거쳐 원래의 양식으로 복원됐다. 특히 제주목관아는 홍화각과 연희각 우련당, 귤림당, 영주협당, 외대문, 중대문 등이 복원되었다. 그리고 지난 1999년 9월부터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2002년 12월에 복원을 완료하고 2003년 1월 22일 준공식을 갖고 개관하게 되었다.

관아의 관문인 외대문에 들어서니 어느새 풍류 시인이 된 듯하다. 세상 밖에서 빠르게만 걷다가도 이곳에 들어오면 어느새 거북이가 된다. 그리고 바바리 코트의 호주머니 속에 잠시나마 손을 넣고 걸어 볼 수 있어서 좋다.


외대문은 문헌에 <탐라포정사>, <진해루>로 표기되어 있다. 관아의 관문으로 1435년 홍화각 창건시에 건립했다고 전한다. 1966년 남지훈 목사가 개건 했다고 한다. 2층 누각 건물로 종루로도 활용되었다. 여기서 새벽과 저녁에 종을 쳐서 성문을 여닫는다고 하며, 그 종은 묘련사의 옛 터에서 가져왔다고 전한다. 외대문밖에서는 잰걸음으로 걸어 왔으나 이곳에 들어오면 아주 느리게 걸을 수밖에 없다.

a 중대문 앞에서 관아를 바라보니

중대문 앞에서 관아를 바라보니 ⓒ 김강임

외대문과 내대문 중간에는 중대문이 있다. 활짝 열려진 중대문으로 보이는 관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a 우련당의 연못에는

우련당의 연못에는 ⓒ 김강임

먼저 연못이 있는 우련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우련당(友蓮堂)은 1526년에 이수동 목사가 성안에 우물이 없으면 적이 침입하여 성을 포위하거나 화재가 발생하였을 때 구급하기 어렵다 하여, 못을 파고 물을 가두어 연꽃을 심은 뒤 그 위에 세웠던 정자이다.

이곳은 연회 장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그 뒤 양대수 목사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시끄럽다 하여 연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다 한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연못에는 단풍잎처럼 고운 금붕어 때들이 줄을 지어 신선놀음을 하고 있었다.

a 잠시 통인방 앞에서

잠시 통인방 앞에서 ⓒ 김강임

우련당 뒤에 서 있는 홍화각은 예전에 절제사가 사무를 보던 곳이다. 홍화각에는 제주방어에 필요한 무기를 보관한 무기보관고가 있었다. 또 절제상의 방어사가 집무를 보던 절제사나에는 복식, 경상, 연상, 문방구류가 비치되어 있다. 특히 제주지방 6방이 예속된 향리들이 업무를 처리한 향리방이 있다. 홍화각의 모습은 탐라 고각이라 불리었을 정도로 관아건물 중에서 가장 웅장하였다. 특히 홍화각 뒤편에 있는 통인방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목사의 심부름을 하는 소공이 머무르는 통인방에는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a 연희각을 지나

연희각을 지나 ⓒ 김강임

가을 해의 그림자는 길어 갈수록 짙어만 갔다. 잔디를 밟으며 발길을 돌린 곳은 연희각이다. 연희각은 목사가 집무하던 곳으로, 상아의 동헌, 목사의 정아 등으로도 불리었다. 건물은 겹처마에 깊숙한 지붕으로 좌 대 위에 높게 지어져 있다. 그 이름을 연희라고 한 것은 외신이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정성을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a 투호를 즐겨보고...

투호를 즐겨보고... ⓒ 김강임

관아의 광장에는 이곳을 방문하는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사람들을 위해 투호를 즐길 수 있다. 투호는 잔디밭·대청 등에 귀가 달린 청동 항아리를 놓고 여러 사람이 동·서로 편을 갈라 10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화살을 던져 항아리 속에 것으로 궁중에서 왕족들이 즐겼던 놀이문화이다.

a 귤림당의 지붕이 이색적이다.

귤림당의 지붕이 이색적이다. ⓒ 김강임

"누가 귤림당에서 거문고를 타고 있을까?"

귤림당 앞에 서자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귤림당은 거문고를 타고 바둑을 두거나 시를 지으며 술을 마시는 장소였다. 이원조 목사의 <귤림당 중수기>에 의하면, 이 땅에 귤명으로 된 국과원이 모두 36곳인데, 홀로 이 귤림당만이 연희각 가까이에 있다. 입추 이후가 되면 서리가 내려서 많은 알갱이가 누렇게 읽는다. 공무를 보는 여가에 지팡이를 짚고 과원을 산책하노라면 맑은 향기가 코를 찌르고, 가지에 열매 가득한 나무들을 쳐다보노라면 심신이 다 상쾌해진다. 특히 귤림당의 지붕이 이색적이다.

a 영주협당에 서서...

영주협당에 서서... ⓒ 김강임

마지막 발걸음을 옮긴 곳이 영주협당이다. 영주협당은 원래 군관들이 근무하던 관청으로, 군관들이 왕래 할 때는 항상 말이 지급되었다고 한다.

영주협당 앞에서 보이는 제주목관아의 풍경은 고풍스런 종가 집을 연상케 한다. 특히 시민들의 정성어린 손으로 기와를 헌와하여 이렇게 아름다운 관아를 복원하였으니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a 잠시 풍류 시인이 되어본다.

잠시 풍류 시인이 되어본다. ⓒ 김강임

몇 그루의 고목과 어우러진 홍화각. 왕의 어진 덕화(德化)가 백성에게 두루 미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붙여졌다는 홍화각을 바라보면서, 이 땅에 어진 왕이 어디 있는지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그 어진 왕의 덕화가 백성에 두루두루 미치기를 기원하였다.

제주의 혼이 살아 숨쉬는 제주목관아. 건축물 하나하나에 혼이 담겨져 있음을 느끼며, 걸어온 길을 다시 돌아 우련당을 지나 연희각 앞에 섰다.

"조선시대 관리들의 충성과 정성은 과연 어떠했을까?" 날마다 매스컴에 쏟아지는 뉴스처럼 돈으로 얼룩지는 정치는 아니었는지.

그러나 외대문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복원된 관아의 풍경만큼이나 따스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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