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현대비자금 '단독입수'는 '뻥튀기'

[정치 톺아보기 38] 타 매체서 먼저 보도...입맛따라 '재탕·재해석'

등록 2003.11.18 09:30수정 2003.11.18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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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은 대북송금 사건의 특검 및 대검 수사기록 일부를 단독 입수했다. 총 7권으로 된 기록 중 4권(3000쪽 분량)으로, 여기엔 대북송금 사건과 현대비자금 사건에 모두 등장하는 김영완(해외체류)씨와 박지원(朴智元) 전 문화관광부 장관, 정몽헌(鄭夢憲) 전 현대회장 등 주요 등장인물의 자술서와 신문조서 등이 포함돼 있다."

a 단독? 정말? <조선일보> 11월 18일자 4면 기사

단독? 정말? <조선일보> 11월 18일자 4면 기사

<조선일보>는 11월 18일자에서 <월간조선>이 단독 입수한 대북송금 사건의 특검 및 대검 수사기록 일부를 인용해 "광주에서 출마…박지원씨, 돈 필요하다 자주 말해" 제목의 기사를 비중 있게 실었다. 또 이 신문은 같은 수사기록을 인용해 "군비전용 우려 있지만 정상회담 위해 줬다" 제하의 관련 기사도 함께 실었다.

편의상 이 글에서는 "광주에서 출마…박지원씨, 돈 필요하다 자주 말해" 제목의 기사를 A 기사라고 하고, "군비전용 우려 있지만 정상회담 위해 줬다" 제목의 기사를 B 기사라고 한다.

A 기사 제목은 전직 무기중개상인 김영완씨(50)가 현대비자금 사건과 관련 대검에 보낸 '자술서'(8월 29일자)에서 김씨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고, B 기사 제목은 김보현 국정원 3차장(대북 담당)이 검찰 진술조서에서 밝힌 진술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그런데 우선 "월간조선은 대북송금 사건의 특검 및 대검 수사기록 일부를 단독 입수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흔히 언론에서 '단독 입수'라는 표현을 쓸 때는 '독점 입수' 혹은 '다른 데보다 먼저 입수'한 것을 의미하는데 그에 비추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앙-한국일보 '김영완 자술서' 일부 내용 처음 보도

일단 멀리 갈 것도 없이 <오마이뉴스>는 지난 7월부터 대북송금 특검 수사기록을 '단독 입수'해 이를 근거로 'X파일 대북송금 특검수사'라는 연재물을 10회에 걸쳐 보도해 왔다. 그뿐 아니라 오마이뉴스는 지난 10월 30일에도 추가로 현대비자금 관련 공판기록을 입수해 '정몽헌에게 김영완 소개한 사람은 이익치... [단독입수] 정몽헌 신문조서·김영완 자술서'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이때도 오마이뉴스는 관련 기록을 사진으로 보여주면서 "오마이뉴스는 최근 정몽헌 회장의 피의자신문조서·김영완씨가 변호인을 통해 미국에서 보내온 자술서 등 대검 중수부의 수사기록을 단독 입수해 이같은 사실을 확인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오마이뉴스처럼 공판기록 전체(5000쪽 분량)를 입수한 것은 아니지만, 김영완씨 자술서는 이미 <중앙일보>와 <한국일보>가 지난 9월 19일자에 배치한 "현대 돈 200억 중 50억원 권씨 집 찾아가 직접 줬다" 제하의 기사를 통해서도 중요 대목들이 맨 처음 공개된 바 있다.


중앙일보는 당시 "전직 무기 거래상 김영완(金榮浣. 50. 미국 체류)씨가 2000년 4·13 총선을 앞두고 현대 측에서 받은 현금 2백억원 중 50억원을 직접 권노갑(權魯甲. 구속)전 민주당 고문에게 전달했으며, 그 중 10억원은 총선 이틀 전인 4월 11일에 갖다줬다고 검찰에 진술했음이 밝혀졌다"면서 김씨 자술서를 '단독 입수'한 사실을 이렇게 기사화했다.

"18일 본지가 단독 입수한 金씨의 자술서에 따르면 金씨는 2000년 2∼3월 이익치(李益治) 전 현대증권 회장에게서 '돈이 준비됐으니 가져가라'는 연락을 받고, 서울 압구정동에서 1천만원 뭉치 20개(2억원)가 들어 있는 박스들을 받아 집으로 가져갔다는 것이다."

당시 중앙일보가 자술서 전문(A4용지 16장 분량)을 입수한 것은 아니었다. 그 뒤 김씨의 자술서는 9월 26일 열린 박지원씨 뇌물수수 혐의 관련 1차 공판과정에서도 그 내용이 일부 공개되어 화제가 되었다.

검찰은 이날 서울지법에서 열린 박씨의 뇌물수수 혐의 관련 1차 공판에서 150억원을 받게 된 경위와 관련 "돈을 관리한 김영완씨 자술서에 따르면 '언론인을 만나는데 돈이 많이 든다'며 은근히 고(故) 정몽헌 회장에게 돈을 부탁할 것을 김씨에게 요구했고 150억원 중 30억원을 한번에 3000만∼5000만원씩 약 20∼30차례에 걸쳐 받아썼다고 하는데 사실이냐"고 추궁했다.

한국일보 10월 8일 '자술서' 추가입수해 김씨 진술 신빙성 의문 제기

<한국일보>는 10월 8일자에서 김영완씨 자술서를 추가입수해 "본보, 金씨 자술서 입수/박지원씨에 줬다는 2, 3억 수표 추적해도 포착 안돼…150억원 전달한 경위도 故 정회장 진술과 엇갈려 김영완씨 진술 신빙성 의문" 제목으로 보도했다. 앞서의 중앙일보 보도와 다른 중요한 점은 김씨의 진술을 여과없이 수용한 중앙일보 보도와 달리 한국일보 기사는 김씨의 진술에 대한 검증을 시도한 점이다.

다음은 한국일보 기사의 한 대목이다.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비자금 관리인으로 알려진 김영완(50·미국체류)씨가 검찰에 '박씨에게 100만원짜리 수표로 2억∼3억원을 전달했다'고 진술했으나 계좌추적결과 자금 전달사실이 전혀 포착되지 않는 등 김씨 진술의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7일 본보가 입수한 김씨 자술서에 따르면 김씨는 '2000년 5월부터 올해 초까지 모두 20∼30회에 걸쳐 1,000만∼1억원씩 줬으며 100만원권 수표로 1억원씩 줬던 적도 2∼3회 있다'고 진술했다."


결과적으로 김영완 자술서(중앙일보, 한국일보), 현대비자금 사건 공판기록 전부(오마이뉴스) 등으로 공개된 사실에 비추어 조선일보와 월간조선이 이 기사에서 '단독 입수'라는 표현을 강조한 것은 언론계의 상규(常規)에서 벗어난 '얌체 같은 일탈행위'의 발로인 셈이다.

문제는 '형식'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기사의 내용에서도 그런 '일탈행위'가 발견된다는 점이다.

김씨의 '일방적 주장' 담은 자술서 공판과정에서도 신빙성 의심

앞에서 말한 대로 A 기사의 제목은 "광주에서 출마…박지원씨, 돈 필요하다 자주 말해"이다. 이 제목은 미국에 체류중인 김영완씨가 변호사를 통해 보내온 '자술서'의 일부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조선일보 기사대로 김씨는 자술서에서 "박 장관이 2001년경부터 김대중 정부가 끝나면 광주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려고 하는데 그러려면 돈이 필요할 것이라는 말을 여러 번 한 적이 있다"면서 "그래서 박 장관이 저에게 맡겨둔 돈(150억원)을 관리하면서 증식해서 나중에 선거 때 줘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진술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김씨의 일방적 주장일 뿐이다.

월간조선이 입수했다는 "총 7권으로 된 기록 중 4권(3000쪽 분량)"에는 150억원을 받은 적이 없다는 박지원 전 장관의 '일관된 부인' 진술이 더 많이 등장한다. 이에 비해 미국에 사실상 도피중인 김영완씨의 진술 분량은 '달랑 16장'뿐이다.

물론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진술의 '양'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문제는 김씨가 순전히 임의로 썼다는 자술서의 진술에 허점이 너무 많고 오락가락 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김씨 자술서는 공판과정에서 신빙성 자체를 의심받고 있다.

김씨의 진술에 따르면 김씨는 150억원 가운데 30억원 가량을 박 장관에게 건네주었다. 김씨는 이 돈을 자신이 직접 건네주거나 인사동에서 고서화를 취급하던 조00씨(2001∼2002년경 간암으로 사망)를 시켜 박 장관 집에 전달했는데, 그 중에는 100만원권 수표로 1억원씩 주었던 적도 2∼3회 있다고 진술했다. 따라서 2∼3억원을 수표로 준 셈이다. 그런데 현재까지 계속된 검찰의 수표 추적에서 박 장관이 사용한 어떤 단서도 나오지 않고 있다.

박지원 150억원 CD 수수 경위 등 정몽헌 회장 진술과 상반

박 장관에게 150억원을 전달한 경위에 대해서도 김씨와 정몽헌 회장의 진술이 엇갈린다. 김씨는 "2000년 3, 4월 박씨가 장관실에서 스케줄이 적힌 수첩을 보여주며 '돈이 많이 들어 죽겠다'고 해 정 회장에게 돈을 부탁하라는 취지로 이해했다"며 "다음날 정 회장을 찾아가 '박씨가 요즘 어려운 모양인데 한번 도와줘요'라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반면 정 회장은 검찰에서 "박씨가 김씨를 통해 남북정상회담 준비에 필요하다며 150억원을 요청했다"고 진술했었다.

CD(양도성예금증서)로 150억원을 받게 된 경위에 대해서도 김씨와 정 회장의 진술이 엇갈린다. 김씨는 자술서에서 "박 장관이나 저는 '150억원'이라고 구체적인 액수를 특정하지도 않았고, 150억원을 '무기명 CD'로 달라고 하는 등 돈을 주는 방법에 관하여도 구체적으로 말을 하였던 기억은 없다"고 진술했다. 반면에 정 회장은 검찰에서 "김씨가 박 장관이 돈이 필요하다며 150억원을 달라고 했다"고 상반되게 진술했다.

김씨는 또 "2000년 4월 박씨가 P호텔에서 봉투를 건네며 '잘 관리해 달라'고 해 집에 돌아와 보니 양도성예금증서(CD)가 들어 있었다"며 "측근 허모씨에게 물어본 후에야 그것이 CD인줄 알았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전문가 수준의 비자금 관리인인 김씨가 CD를 몰랐다는 점은 상식 밖이라는 지적이다.

박지원 전 장관은 공판에서 검찰이 김씨의 진술에 근거해 "150억원 중 나머지 돈은 광주·전남지역 출마를 위해 남겨둔 것 아니냐"고 따져 묻자 "현대로부터 150억원을 받은 사실이 없으며 퇴임 후 김대중 전 대통령을 모시고 해외에 나가 조용히 살 계획이었기 때문에 출마는 생각지도 않았다"고 이를 부인했다.

박씨가 김대중 정부 집권 이후에도 상당 기간 주소지를 경기도 부천에 두고서 '정치인 박지원'으로서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꾀한 것은 사실이다. 또 그러다가 고향 진도와 광주에서의 출마를 생각해본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딴 생각 품지 말고 나하고 함께 하자"는 DJ의 한 마디에 '정치인 박지원'의 꿈을 접은 사람이다.

'퇴임 후 김대중 전 대통령을 모시고 해외에 나가 조용히 살 계획으로 150억원을 챙겨두었다'면 혹시 또 몰라도….

결국 조선일보의 '단독입수' 기사는 관련 기록을 다른 언론사보다 먼저 입수한 것도 아니고, 또 입수가 늦었더라도 관련 기록 전체를 입수해 사건을 새롭게 조망한 것도 아니면서, 오직 자신의 입맛에 맞게 '재탕'하거나 '재해석'한 것을 '단독입수'한 것처럼 '위장취재'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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