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끼' 있는 너희들이 좋다"

고운 한복과 엉덩이춤 그리고 지갑속 4000원

등록 2003.11.23 15:17수정 2003.11.24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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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한복을 입고 고운 자태로 절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한복을 입고 고운 자태로 절을 하고 있다, 그러나... ⓒ 안준철

a 한복을 입고 엉덩이춤을 추는 아이들의 못 말리는 끼

한복을 입고 엉덩이춤을 추는 아이들의 못 말리는 끼 ⓒ 안준철


학교 축제가 있던 날, 분장실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대기중인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고운 한복 차림에 화장까지 한 아이들을 보자 저는 왠지 마음이 뭉클해졌습니다. 딸 같은 어린 제자들이었지만 평소처럼 장난을 걸거나 가볍게 말을 건넬 수가 없었습니다. 좀 과장을 섞어 말한다면 범접할 수 없는 여인으로서의 자태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한 순간 그런 환각(?) 속에 빠져 있다가 저는 그만 "쿡"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말만한 아이들이 고운 한복을 차려입긴 했지만 그들이 무대에서 선보일 춤이 무엇인지 저는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얌전한 걸음새로 걸어 나와 우리 한복의 우아한 아름다움과 인사예법을 보여주겠지만 말입니다.

"선생님, 그때 꼭 조명을 어둡게 해줘야해요."
"응. 그래. 알았어."

조명을 어둡게 해달라는 '그때'가 바로 한복차림에 어울리는 얌전한 모습으로 걸어나와 관중들을 향해서 절을 하고는 갑자기 태도를 돌변하여 요절복통할 엉덩이춤을 선보이게 될 직전의 순간을 의미합니다. 그때 미리 준비한 끈을 이용하여 치마를 무릎 위까지 감아 올려야 하는데 그때를 위해서 잠깐 조명을 어둡게 해달라는 주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 너무 떨려요."
"연습한대로만 해. 너희들 오늘 너무 예쁘다."
"선생님, 우리 장기자랑에서 꼭 일 등할 거예요."
"그래. 그러면 좋지."

아이들과 이런 대화를 주고받다가 저는 또 한번 가슴이 뭉클해지고 말았습니다. 며칠 전 보라가 제가 쓴 글에 답글 형태로 올린 편지글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요 며칠간 선생님의 밝은 미소를 봤어요. 저희가 밤늦게까지 남아서 연습하는 모습을 바라보시는 그 눈빛, 그 미소, 아직도아른거려요. 저희 반 지각생, 결석생 몇 명 때문에 하루하루 선생님의 밝은 미소 속에 그늘진 모습이 보이곤 했었거든요. 근데 연습하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흐뭇해 하시는 선생님의 미소 속에는 정말 빛이 날 정도로 밝으셨던 거 아세요? (연습하면서 힐끔힐끔 봤어요) 선생님, 이번 축제 때 선생님의 흐뭇한 미소가 헛되지 않게 저희 꼭 1등 하자고 약속하고 다짐했어요."

축제가 사흘 앞으로 다가와 있던 어느 날, 저는 퇴근 후에 시내에 볼일이 있어서 잠깐 나갔다가 시내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습니다. 집과 학교가 한 정류장 사이라 버스에서는 여느 때처럼 이런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이번 정류장은 효산고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삼성아파트입니다."

그 방송을 듣자 저도 모르게 그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물론 전에도 가끔은 이런 일이 있기도 했습니다. 한 블록 정도는 걸어가자는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교실에서 한참 연습을 하고 있을 아이들에게 간식거리라도 사들고 올라가고 싶어졌던 것입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은 탕수육과 떡볶이인데, 그 둘을 합쳐 1인분에 1000원입니다. 교실에서 연습을 하고 있는 아이들이 몇 명이나 될까 하고 반장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12명이라고 대답을 해왔습니다. 본래는 15명인데 3명의 아이가 연습을 일찍 끝내고 집에 갔다고 했습니다. 저는 평소에도 아이들과 가끔씩 들려 잘 알고 있는 포장마차로 발걸음을 옮기려다가 문득 지갑을 확인해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평소에도 지갑에 돈을 많이 넣어 가지고 다니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삼사만 원은 항상 들어있던 지갑에는 1000원 짜리 4장만이 달랑 들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전날 동료 직원이 집안에 상을 당하여 주머니 사정이 그리된 것입니다. 거기에 장모님의 병구완을 갔다가 그날 돌아오기로 한 아내가 하루 뒤에 오게 되는 바람에 그만 사정이 더 딱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저는 잠시 망설였습니다. "4000원 어치라도 사들고 올라갈까? 아니야, 아이들 입에 몇인데…." 결국 저는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터벅터벅 집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도 자꾸만 아이들이 마음에 걸려 좌불안석이었습니다. 언젠가 아내가 저녁 식탁에서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여보, 이 고기 한 점 우리 아들 입에다 쏙 넣어주었으면 원이 없겠다."

아내는 고기 반찬을 먹다 말고 멀리 객지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아들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지요. 뿐만 아니라 무슨 과일 하나를 먹을 때도 꼭 아들 타령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마음이야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만.

그런데 그날 제 눈에는 교실에서 한참 연습을 하고 있을 아이들의 얼굴이 너무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거울을 보면서 양치질을 하면서도 한참 배가 고파있을 아이들의 입에 떡볶이를 하나 쏙 넣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습니다. 그 간절한 마음을 어찌하지 못하고 저는 옷을 다시 갈아입고 말았습니다.

"저, 지금 교실에서 아이들이 축제 준비를 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녀석들이 배가 많이 고프지 않겠어요. 입에 뭐 좀 넣어주고 싶은데…. 아내가 친정에 가고 없어서 마침 돈이 없네요…. 지금 꼭 그러고 싶은데…. 죄송하지만… 만 원만 빌려주시면…."

잘 알고 지내는 집 근처 가게 주인에게 늘어놓은 말입니다. 그렇게 구차한 말을 하고서라도 얻어낸 돈 만원이 저에게는 너무도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평소 돈을 함부로 쓰는 편은 아니지만 그날처럼 돈을 함부로 허비했던 일을 후회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만 원 짜리 한 장으로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날 축제 2부 장기자랑 무대에서 아이들은 자신들의 '끼'를 유감없이 발휘했고, 관객들에게도 최고의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1등을 차지하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사실은 그런 심사 자체가 없었습니다.

본래 축제 2부 마당인 장기자랑에서 1등을 한 팀은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3부 공연마당에 앵콜 공연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경합이 너무도 치열하여 어느 한 반을 선정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거기에 3부 연출을 맡은 저로서는 우리 반 아이들을 두둔하고 나설 입장이 못되었던 것입니다.

사정이 그러하니 아이들이 저를 찾아와 항의할 만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제 사정 얘기를 듣고서 섭섭한 기색을 푸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저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오늘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2부야. 3부 공연은 주로 특별한 재주를 가진 아이들의 발표 무대일 뿐이지만, 2부 장기자랑은 많은 학생들이 직접 참여하고 순수하게 너희들 스스로 기획하고 연습한 거잖아. 그래서 선생님은 너희들이 2부에서 마음껏 끼를 발산하고 관객들에게 최고의 박수를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고 만족해. 너희들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러자 한 아이가 이렇게 제 말을 받아 대답했습니다.

"1등을 해서 선생님께 선물로 드리려고 했는데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 저희들도 만족해요. 선생님, 그럼 3부 공연 연출 잘하세요. 저희들이 지켜볼게요."

그렇게 말을 하는 아이를, 또 뒤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저를 초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못 말리는 끼'를 고운 한복 속에 감춘 아이들을, 가끔은 그 끼가 사랑으로 승화되기도 하여 부족한 제 담임을 지켜주겠다는 기특한 마음을 품기도 하는 아이들을, 저는 몇 걸음 다가가 고운 한복이 구겨지지 않을 정도로만 가볍게 안아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이렇게 읊조렸습니다.

"나는 끼 있는 너희들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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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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