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담아 보낸다, 너에게

한 제자에게 보내는 가을 편지

등록 2003.11.15 18:21수정 2003.11.19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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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조계산의 가을-운수암 가는 길

조계산의 가을-운수암 가는 길 ⓒ 안준철

가을 산에 다녀왔다. 그런데 나는 왜 너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을까? 산길을 가다 말고 문득 멈춰 서서 널 생각하며 시집 여백에 깨알같이 무언가를 적고 있었을까? 가을을 어딘가에 담아서 보내주고 싶은 그 대상이 왜 하필 너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요즘 들어 한껏 성숙해진, 가을을 닮은, 아니 닮아가고 있는 너의 눈빛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금도 내 웃옷 안 주머니에는 네가 쓴 독후감이 들어있다. 상을 줄만큼 잘 갈무리한 글은 아니지만, 원고지에 정성을 담아 써낸 글도 아니지만, 독후감을 안 내면 종례 없는 줄 알라는 선생님의 엄포에 어쩔 수 없이 써낸 글이긴 하지만, 글 속에 담긴 너의 온기가 가슴에 닿아 오랫동안 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단다.

일 년에 한 권만이라도 좋은 책을 읽고 그 감동을 글로 적어보자고 말했을 때 너희들의 반응은 시큰둥했었지. 하긴 책을 억지로 읽는 것만도 지겨운데 거기에 읽은 소감을 글로 적어내라니 싫기도 했을 거야. 그런 너희들의 표정을 읽으면서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을 강요하는 것이 싫기는 나도 마찬가지였지.

다른 것은 강요하지 않을 테니까 그것만은 선생님 말대로 해달라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너희들에게 전했을 때, 넌 무언가 수긍하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지.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 수긍의 눈빛은 곧 체념의 눈빛이기도 했어. 어떻게든 안 읽고 안 내고 버티어보려던 너의 생각을 단념하는 그런 거 말이야. 그것이 얼마나 고맙고 예쁘게 보이던지.

a 조계산 가을-나무 다리

조계산 가을-나무 다리 ⓒ 안준철

5월이었지 아마. 네가 눈물바람에 가방을 챙겨들고 교실 밖으로 나가버린 그 날이. 전학을 온 너와 내내 사이가 좋았다가 그 날 처음으로 그런 일이 생기고 말았지. 내가 개방적이어서 좋다고 넌 그랬던가? 하지만 아무리 개방적인 선생님이라도 책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손바닥만한 가방을 메고 다니는 널 그냥 둘 수는 없었지.

그것은 학교에 와서 아무 것도 배우지 않겠다는 태도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어서 교칙으로 금하고 있는 귀걸이 착용을 슬쩍 눈감아주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거든. 그리고 그런 너를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널 포기하는 셈이 되는 거고. 그런 자상한 설명이 오히려 너에게는 따분하고 지루한 설교로 들렸던지 넌 알았다고 하면서 싸늘하게 눈을 내리깔고 말았지.

바로 그 눈빛이었어. 내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한 것은. 그때 난 너에게 무섭도록 화를 내고 말았지만 그것은 마치 돌을 던지면 수면 위에 하얀 포말이 일듯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 내 마음에 깊은 파문으로 남은 것은 어떤 허망함이랄까, 슬픔 같은 것이었지. 그 동안 난 너에게 아무 것도 가르친 것이 없다는 것. 우린 퍽 사이가 좋았지만 사실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것.


그 날 넌 내 전화를 받고 바로 교실로 돌아와 나에게 사과를 했고, 나도 너에게 버럭 화를 냈던 것을 사과했지만 그 날 이후 우리 사이가 예전 같지는 않았지. 네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나는 못하게 하는, 우리는 그런 사이로만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후에 있었던 오랜 너의 공백. 너의 빈자리를 보며 나는 내 몸통에서 한 가지가 잘려나가는 아픔 같은 것을 느껴야 했단다.

솔직히 그래. 네가 학교로 돌아오지 않아도 내가 불행할 이유는 없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그런데 네 휴대폰에 음성을 남기며 간절히 네가 돌아오기를 바랬던 것을 보면 난 널 사랑했던 것 같애. 넌 아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a 조계산에서

조계산에서 ⓒ 안준철

네가 다시 학교에 다니겠다고 엄마와 함께 학교에 나온 그 날, 나는 너를 혼내는 대신 이런 말을 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다시 학교에 다니고 싶다는 너의 말을 듣고 난 정말 반가웠어. 너에 대해 품고 있었던 감정들도 봄눈처럼 다 녹고 말았지. 네가 학교를 그만두게 되면 난 너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말지. 그렇게 되면 솔직히 내가 더 편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야. 너 때문에 힘이 좀 들어도 난 너와 상관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

그런데 지금부터가 문제야. 너는 학교에 다시 돌아왔지만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학교에 다닐 수도 있어.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나는 못하게 하는 그런 사이로만 우리가 존재한다면 난 너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되는 거야. 난 너에게 그런 담임은 되고 싶지 않거든. 네가 하고 싶어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런 담임이 되고 싶은 거야."

그때 내가 너에게 해준 말을 누군가 들었다면 이런 말을 네가 이해할 수 있을 것인지, 아마도 그것을 가장 염려했을 지도 모르지. 그리고 넌 성격이 화끈한 아이니까 무섭게 혼을 내주고 각서라도 한 장 받아두는 것이 너를 위해서도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할 수도 있었겠지. 너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분명한 것은, 그때부터 네가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거야. 나는 그것이 반갑고 고마울 뿐이란다. 그리고 어른들이 쉽게 생각하는 것처럼 너희들이 생각 없는 아이들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지. 그뿐이 아니었어. 어느 날인가는 수업시간에 어려운 문장을 해석하는데 네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거야. 그 눈이 얼마나 예쁘고 감사했는지 몰라.

그 후 며칠 뒤에는 몇 아이가 수업시간에 자꾸만 떠들어서 화를 냈던 것인데, 수업이 끝난 뒤에 나에게 와서 "선생님, 죄송해요" 하고 사과를 한 것은 떠들다가 나에게 혼이 난 아이들이 아니고 수업을 열심히 받은 바로 너였지. 넌 그런 아름답고 성숙한 아이로 변해가고 있었던 거야.

a 조계산의 가을

조계산의 가을 ⓒ 안준철

기억이 날지 모르겠다. 교사로서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욕설에 가까운 험악한 말을 너희들에게 마구 퍼부었던 그 날의 일을. 도서관에서 학급활동을 할 때였어. 여러 차례 거듭해서 부탁을 했건만 도서관 컴퓨터로 오락게임을 하고 있는 아이를 본 것인데, 그것도 내가 가장 싫어하는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지. 그것 역시 몇 번이고 강조를 했었는데 말이지.

얼마쯤 흘렀을까? 나는 이성이 돌아오면서 내가 너희들에게 한 짓이 잘못된 것임이 깨닫게 되었지. 너희들에게 꼭 사과를 해야한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고. 그런데 그 날 내 기분이 그래서 그랬을까? 도서관 컴퓨터로 카드놀이 같은 오락을 한 것은 분명 잘못한 것이지만 그것을 나무라는 과정에서 험악한 말을 내뱉은 것은 교사로서 더 큰 잘못이라는 말을 하면서, 나는 그만 바보 같이 눈물을 보이고 말았지.

몇 아이는 어이가 없는지 키득키득 웃기도 하고, 몇 아이는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옆 아이와 얘기를 나누느라 바빴지만, 너만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지. 그때 그 눈빛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단다. 그 날 이후 나를 바라보는 너의 눈빛이 한층 더 부드러워졌지. 넌 매일 내게 기쁨을 주는 '사랑의 아이'가 되어 있었고.

독후감을 읽어보니 선생님이 지은 책이어서 그랬는지 고맙게도 나에 대한 칭찬도 들어있더구나. 너도 누군가에게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지? 나도 그래. 하지만 그보다 더 기분이 좋았던 것은 네가 날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지. 사랑의 관심으로. 아닌가? 네가 쓴 글을 다시 써볼게. 읽을수록 기분이 좋으니까(솔직히 말하면 이 대목만 열 번도 넘게 읽었단다. 웃기지 않니?).

'평소 학교에서 뵈어도 우리 선생님은 겸손하시고 밝은 미소와 사랑으로 우리를 봐주신다. 처음에는 모르지만 장시간 동안 그렇게 대해주시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인데 선생님은 그게 가능하셨다.'

a 교실 밖 가을 풍경

교실 밖 가을 풍경 ⓒ 안준철

고맙구나. 하지만 난 겸손한 사람은 못 된단다. 겸손하다는 것은 큰 사람이 작은 사람에게 키를 낮추어 눈높이를 맞추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 작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거든. 난 그렇지를 못해. 하지만 가끔 자연에 와서 그런 진정한 겸손을 배우려고 노력하고는 있단다.

이번 가을 산행에서도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땅에 떨어져 다음 세대를 위해 썩어질 줄 아는 낙엽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왔단다. 어느 곳에 있어도 불만을 토하지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제 몫을 다 하는 나무들에게서도 배울 점이 많았어. 어느 핸가는 잎을 다 떨구고 빈가지만 남은 나무들을 보면서 이런 시구를 얻기도 했었지.

깊어진다는 것은
홀로 무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저렇듯, 제 잎을 지워
멀리 있는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리

요즘 너의 눈빛이 성숙하게 보이는 것도 네 자신만이 아닌 누군가를 배려하는 마음이 너에게 생긴 것과 무관하지 않을 듯 싶구나. 네가 정말 고마운 것은 선생님의 작은 사랑에 응답을 해준 바로 그것이란다. 만약 그런 응답이 없었다면 이 결실의 계절에 나는 얼마나 쓸쓸했을까? 어쭙잖은 사랑으로 너를 안아보려고 했던 나는 얼마나 초라했을까?

a 교실 밖 가을 풍경

교실 밖 가을 풍경 ⓒ 안준철

이제 축제가 내일 모레구나. 어제 밤늦도록 교실에서 연습을 하고 있는 너희들을 보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단다. 한복을 입고 야하게 엉덩이춤을 추는 너희들이 정말 모두 내 딸이었으면 싶었지. 요즘 들어 너희들의 달라진 모습을 보면서 나도 이 가을에 결실을 맺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단다. 나는 결코 실패한 교사가 아니라는 자부심 같은 것도 생기더구나. 모두 다 너희들 덕분이지. 누구보다도 네 공이 크다는 거, 꼭 말해주고 싶구나.

그 고마운 마음을 곱고 아름다운 가을 풍경들과 함께 담아서 너에게 보낸다. 요즘 들어 한껏 성숙해진, 가을을 닮은, 아니 닮아가고 있는 너에게. 남은 기간에도 너희들에게 좋은 담임이 되도록 힘써 노력하마. 그럼 이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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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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