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딘 아이와의 사랑 이야기

우리 반 지각대장에게 희망을 갖는 이유

등록 2003.11.12 07:16수정 2003.11.12 14:11
0
원고료로 응원
오늘 한 아이에게 좀 이상한 편지를 썼습니다. 달리 이상한 것은 아니고, 편지를 받은 사람이 "어! 뭐가 이래?" 하는 반응이 나올법한, 좀 특이한 형식의 편지였습니다.

점심시간에 메일을 열어보니 편지가 한 통 와 있습니다. 답장을 바로 못하고 퇴근 후에 몇 자 적어 보냈는데, 이런 식이었습니다.

선생님...저 아라예요
오랜만에..쓰죠,,ㅋ

그래, 녀석아!
이번이 딱 두 번째다.

몇 번이고,,쓸려고..마음먹었는데..
마음먹다가..그냥...잊어버리고 해서..
지금에서야..쓰게되네요..

벌써부터 건망증이냐?
우리 아라에게 편지 받아 기분이 하늘인데...

우선은..선생님께..
너무 죄송하네요..
선생님이..그렇게까지..해주시는데..
제가..도대체 왜 이러는지...


요샌..알람소리를..못 들어서..
잘 할려구..하는데..
계속..지각하구..정말 죄송해요...

어제..선생님이..그렇게...말씀하셨는데..
오늘도...지각이나 하고...
저 정말..못됐죠,,?


그래 못됐다.
정말 너무 못됐다.

죄송합니다..
선생님이,,저..사랑하시는 마음..
다 알고 있어요..

알기만 하면 뭐해?
이렇게 늘 날 아프게 하면서...

앞으로..선생님과...만날 날이...
고작해야..두 달인데..
선생님께...받은 사랑...어떻게..갚아야할지...

두 달 동안..잘 할려구..마음먹었어요..
지금까지,,잘하겠다고..
수없이...말했지만...
지키지는..못했잖아요..

잘 할께요...정말..
내일부터는...달라진...
아라 모습 보여 드릴께요..
지켜봐 주실 꺼죠?

당근이지.
난 우리 아라 믿어
누구보다도 더.....

그럼 내일 보자.
사랑한다. 아주 많이......
안녕!


우리 반 지각 대장 아라에게 쓴 편지입니다. 아니, 아라에게서 온 편지입니다. 보내온 편지를 한 줄도 빼놓지 않고 되돌려 주면서 그 틈새에 제 마음을 넣어보냈으니 받는 아이의 표정이 어떠했을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오늘 아라의 편지를 받고 무척 반가웠습니다. 아라는 웬만해서는 제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기 때문에 힘들어하며 숙연한 표정으로 뭐라 얘기하면 다소곳이 듣기도 하지만, 평소에는 복도에서 만나도 먼저 인사하는 법이 없는 아이입니다. 그것을 나무라면 되려 저에게 인상을 쓰고, 그것이 괘씸하여 정강이라도 한 대 슬쩍 걷어차면 저도 지지 않고 제 정강이를 걷어차려고 달려듭니다.

그럴 때나 그 아이의 살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장난을 자주 치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 이 녀석이 제 담임을 우습게 알아 말을 듣지 않나 하는 의심을 품어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럴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좀 거칠고 무뚝뚝하고 어두워 보이지만 알고 보면 속정이 깊고 맑은 혼을 가진 아이입니다.

학기초에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겨울방학 동안 늦잠을 자던 습관이 고쳐지지 않아서인지 일주일 내내 한 번도 제대로 등교한 날이 없어서 속사정을 알아보려고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자취방처럼 방이 달랑 하나뿐인 집에는 강아지 한 마리와 함께 아라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모친은 그곳에서 500m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주무시는 날이 더 많아 아침이 되면 잠을 깨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녁은 어디서 먹니?"
"엄마 가게에서요."
"몇 시쯤 먹어?"
"열 시나 열 한 시쯤 요."
"내일부터는 늦어도 아홉 시에는 저녁밥을 먹어라. 그래야 일찍 잠자리에 들지."
"예."

그 외에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가게에 들려 모친께도 그런 부탁을 드린 뒤에 가게를 나와 시내 쪽으로 걸어가는데 아이가 집에 들어갈 생각을 않고 어느 만큼 저를 따라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만 들어 가보라고 해도 그럴 눈치가 보이지 않아 제가 물었습니다.

"왜 들어가지 않고?"
"선생님 택시 잡아드리려고요."
"택시? 그래 고맙구나. 그런데 오늘 날씨가 너무 좋아서 그냥 걸어가고 싶은데. 걸어가다가 시내버스 타고 가면 돼."

제가 아라에게 희망을 가진 것은 바로 그때부터입니다.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아라는 모친으로부터 택시 값을 받지는 않았던 것 같고, 제 용돈을 털어 택시를 잡아주려고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아라는 그런 아이입니다. 저를 만날 때마다 습관적으로 "선생님 저 맛있는 거 사주세요" 하고 애교를 떠는 아이들과는 사뭇 다른 구석이 있는 아이입니다.

물론 제가 아라를 실제보다 조금은 과대평가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벌을 받아 마땅한 제자에게 사용하는 언어가 듣는 이에 따라서는, 그렇게 해서 학생이 교사의 말을 무서워하겠나, 싶을 정도로 유약하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령, 이런 식입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이제 선생님에겐 방법이 없어. 널 많이 사랑해주고 대화해주고 기다려주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을 쓰고 싶지도 않고 쓸 수도 없어. 널 미워하고, 사람 취급 안하고, 때리고 혼내고,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아. 그렇게 해서 네가 잘 될 리도 없고. 지각하는 습관만 고치면 넌 훌륭한 점이 많은 아이야. 너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불과 2달 남짓인데, 네가 너에게 할 수 있는 말이 고작 지각하지 말라는 말뿐이잖아. 난 그것이 너무 억울하단 말이야."

며칠 전인가도 아라는 2교시가 끝나고서야 학교에 왔습니다. 볼일이 있어 교실에 들린 저를 보자 아라는 "죄송해요" 하고 공손히 인사를 했습니다. 얼굴에는 전보다도 더 미안해하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이상하게도 아이의 안색이 빛나 보였습니다. 그 아이 특유의 어둡고 짜증 섞인 표정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로도 줄곤 그런 환한 표정이었습니다. 절대로 그럴 아이가 아닌데 저를 보면 먼저 손을 흔들고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얼굴도 더 예뻐진 것 같습니다.

제가 잘못 짚었는지 모르지만, 아라는 지금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혹시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지도 모르지요. 그 사랑의 힘으로 제 안에서 빛나는 생명의 요구대로 멋지고 활기찬 삶을 가꾸어 가리라 저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좀 더딘 아이라 사랑도 더디긴 하겠지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4. 4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5. 5 "윤 정권 퇴진" 강우일 황석영 등 1500명 시국선언... 언론재단, 돌연 대관 취소 "윤 정권 퇴진" 강우일 황석영 등 1500명 시국선언... 언론재단, 돌연 대관 취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