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알아가는 아이들

지금 아니면 먼 훗날 언젠가는

등록 2003.11.03 12:01수정 2003.11.03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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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반 토요일 종례는 좀 색다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종례가 없습니다. 꼭 전할 말이 있으면 2교시 수업시간에 짬을 내어 몇 마디 해줄 뿐입니다. 대신, 아이들은 청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저와 10㎝가 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서 눈맞춤을 해야 합니다.

스킨십을 어색해하지 않는 아이와는 서로 어깨를 붙잡고 눈을 맞춥니다. 반대로 그런 행동들을 낯간지럽게 생각하는 아이들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리모콘 눈맞춤을 합니다.

청소구역은 교실과 화장실, 그리고 도서실입니다. 그런데 청소가 끝나는 시간이 각각 다를 뿐더러 구역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전체 아이들을 다시 교실로 불러들여 종례를 하는 것이 마땅치가 않아 그런 변칙을 쓰게 된 것인데, 하다보니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맛도 있고, 아이들과 개별적인 정을 나눌 수 있는 장점도 있습니다.

언제나 마지막으로 저와 눈맞춤을 하는 세 아이는 화장실 청소 당번들입니다. 어느 후배 교사는 그들을 가리켜 "어쩌다가 선생님 반에 다 몰렸네요"라는 말로 저를 위로한 적이 있습니다. 그 위로를 고맙게 받긴 했지만 그들 중 한 명이라도 우리 반이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을 품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만큼 사랑스러운 구석도 있는 아이들이지요.

한 때나마 교사로서의 깊은 좌절감에 빠지게 했던 세 아이는 오늘 쪽지시험에서 모두 만점을 맞았습니다. 그 중 두 아이는 1m 앞에서 저와 눈맞춤을 하고, 한 아이는 마치 딸이 아빠에게 하듯이 나의 어깨를 붙잡고 다정하게 눈맞춤을 하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점심을 먹고, 잠깐 휴식을 취하려다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수화기를 집어들었습니다.

"여보세요. 다운이 어머님, 접니다. 다운이 담임이에요"
"예. 안녕하세요?"
"오늘 다운이 칭찬 좀 해주세요. 영어 쪽지시험에서 만점을 맞았어요"
"어머나. 이 얘가 웬일로 공부를 했나보네요"

"수업 태도도 아주 좋아지고 이번 중간고사도 성적이 많이 올랐어요"
"성적도 성적이지만 선생님 속이나 안 상하게 해드렸으면 좋겠어요"
"이제 저 속상할 일 별로 없을 거예요. 요즘 저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졌어요. 뭐랄까요? 사랑을 알고 느끼는 것 같아요"


가령, 500t의 무게로 혼신의 힘을 다해 말을 하면 겨우 1g의 반응을 보이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그 1g의 반응을 기뻐하며 다시 500t의 힘을 들여 말을 하면 또 1g의 반응을 보이는 아이들. 하지만 아이들을 지도하다 보면 언제까지고 이런 지루한 덧셈만 반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계기가 오면 아이들은 점프할 능력을 갖게 됩니다. 물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 사랑뿐입니다. 문제는 그 사랑이 종종 길을 잃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관심을 쏟고 애를 태우고 하면서도 그것이 정작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는 무관할 때가 많습니다. 결석이나 지각이 잦은 아이들 때문에 학급운영이 어려워지고, 윗사람도 윗사람이지만 후배교사들에게 무능력한 교사로 비쳐지는 것이 싫어서 아이들의 지도에 더욱 힘을 쏟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런 와중이었을 것입니다. 한 아이로부터 이런 내용의 쪽지를 받은 것은.


"그동안 제가 지각을 많이 해서 선생님을 곤란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다시는 선생님이 저 때문에 피해를 보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쪽지를 받고, 한편으로는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아이구나" 싶은 마음에 안도감이 들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 아이가 사용한 '피해'라는 말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습니다. 다음날 저는 그 아이를 찾아가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선생님을 걱정해주어 고맙구나. 그런데 한 가지 너에게 사과할 게 있어. 선생님이 너 때문에 학교에서 무능한 교사 취급을 받을까봐 걱정했던 거. 너의 잘못된 생활습관을 고쳐주기보다는 선생님 자신을 더 생각했던 거 말이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학급 운영을 잘해서 최고의 교사가 되는 거, 그런 것보다 수천만 배 네가 더 중요해. 네가 성실한 학생이 되는 거. 네가 당당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거. 널 사랑한단 말이야!"

이런 어쭙잖은 사랑의 고백이 아이들의 행동을 금세 바꾸어놓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마치 땅에 씨앗을 뿌리면 그것이 발아하여 뿌리를 내리고 무성한 이파리와 함께 탐스러운 열매를 얻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니 결코 조바심을 낼 일이 아니지요. 어쩌면 씨를 뿌렸다는 사실조차도 까마득히 잊고 있을 때 어린 싹들은 찬연히 제 모습을 드러내 보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지금 아니면 먼 훗날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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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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