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돌방, 따뜻한 아랫목이 그립다

박철의 <느릿느릿 이야기>

등록 2003.11.25 17:08수정 2003.11.2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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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10년 전, 남양 장덕교회 사택 앞. 아딧줄과 여자친구

10년 전, 남양 장덕교회 사택 앞. 아딧줄과 여자친구 ⓒ 느릿느릿 박철

오늘이 소설(小雪)이다. 땅이 얼기 시작하고 차차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집집마다 겨울 김장을 하느라 분주하다. 어제 외출을 하고 돌아왔더니 넝쿨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국화를 꺾어 와 제 딴에는 예쁘게 포장을 해 제 엄마에게 선물이라고 건네준다.


자연의 질서는 신묘막측(神妙莫測)하게 정확하다. 그 자연의 이치와 질서를 유독 인간만이 거스르고 있어 안타깝다. 새벽녘에는 차가운 방 기운으로 잠을 설치기도 한다. 이럴 때 군불지핀 따뜻한 아랫목에 몸을 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는 이른바‘온돌문화’이다. ‘온돌’이라는 난방의 장치는 자연의 질서를 순응하며 조화하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의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난방과 취사를 함께 해결할 수도 있어 얼마나 실용적인가?

(시) 군불을 지피며


군불을 지피며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모두가 잠들어 있는 은밀한 시각에
연애편지를 읽는 심정으로
군불을 지필 때가 나는 좋더라
아무 소리 들리지 않아도
아무 말이 없어도
망연히 타들어가는
소나무 삭정이를 보면서
십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도 해보고
전라도의 어느 산자락을 그려보기도 하면서
부지깽이 휘저을 때가 나는 정말 좋더라
싸한 연기를 맡으며
군불을 지필 때가 나는 정말 좋더라
/ 박철
가정의 모든 규율과 질서도‘온돌’구조를 통해서 만들어졌다. 즉 집안의 가장이나 어른은 아랫목으로, 아이들은 웃목으로 자리가 정해져 있었다. 어른 공경이나 유교적인 ‘효’(孝)의 가풍이 ‘온돌문화’를 통해 실천된 것이다. 아무리 자식이 귀해도 아랫목과 웃목의 자리 배열이 뒤바뀌지는 않았다.

아침밥상을 대해도 가장이나 장남만이 아랫목에서 부자 겸상으로 자리를 같이 했고 나머지는 웃목 한켠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비민주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생활형태가 어디 있겠냐고 언뜻 납득이 가지 않을 젊은이들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그 시절의 ‘온돌문화’는 대가족이라는 가족형태의 가장 기초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의 주거문화는 어떻게 변했는가?‘온돌문화’는 거의 사라져가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보일러라는 기계가 생겨나면서부터 아랫목, 웃목이 아예 없어지고 말았다. 농촌에서도 너나 할 것 없이 보일러를 설치하여 한겨울에도 추위를 모르고 지내고 있다. 겨울 농한기 시간만 있으면 나무를 하러 다니고, 땔감 장만하는 일이 월동준비에 가장 큰 몫을 차지했는데 이제는 완전히 옛말이 되고 말았다.

문명의 혜택이나 이기(?)가 가져다 준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아랫목, 웃목이 없어지더니 어른이고, 애들이고 아무데나 앉고 눕는다. 심지어 어른이 외출을 하고 들어와도 아이들이 누워서 딴 짓을 한다. 어른도 그런 자식을 보고 나무라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옛날에는 동네 친구 집에 놀러만 가도 “어머니, 어디어디 놀러갔다 오겠습니다”하고 인사를 하고 허락을 받고 다녀왔는데, 이제는 완전히 거꾸로 된 것 같다. 부모가 자식에게 인사를 한다. “아무개야, 엄마 어디 좀 갔다 올 테니 잘 있어. 얼른 갔다 올게!”

그러면 자식은 벌렁 방바닥에 누워 있는 채 대답을 한다. “응, 알았어. 빨랑 갔다와!” 집에 손님이 와도 인사는 관두고 내다보지도 앉는다. “이 집 큰애는 어디 갔어요?”하고 물으면, “아니 자기 방에 있어요. 숙제하는가 본데 내버려두세요”하고 만다.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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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자식이 어른 행세를 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텔레비전 채널 선택권도 아이들 우선이고, 어디 음식점에 가서 메뉴를 결정하는 일도 아이들 몫이다. 아이들이 땡강 한번 부리면 사달라는 것은 다 사준다. 군대용어로‘개판오분전’이다.

내 얘기 좀 비약된 듯싶으나‘온돌문화’가 사라지고부터 이제 우리나라는 도덕적 가치관이나 정신적 가치관도 함께 없어지고 말았다. 일인당 GNP가 2만 달러에 진입하면 자동으로 선진국이 되는가? 전통적인 가치관의 붕괴와 함께 온갖 신조어들이 생겨나고 있다. ‘원조교제’니, ‘스와핑’이니 참으로 딱할 노릇이다. GNP만 높아지면 삶의 질도 높아지는 줄 알고 있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 그것도 저질 코미디가 아니고 무엇인가. 삶의 질을 높인다는 게 무슨 외국여행이나 다니고 덩치 큰 승용차나 굴리고 고급 아파트에서 살아야 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허구에 놀아나고 속는다. 현대인들은 진정 무엇인지, 소중한 지도 모르고, 소중한 것은 다 잃어버린 채 전혀 불필요한 것까지 기어코 소유하려고 바쁘게 살아가는 것이다.

온돌방이 그립다. 우리 집도 교동으로 이사 오기 전에는 온돌집이었다. 겨울이면 날을 잡아 교인들과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 도끼로 장작을 쪼개서 교회 사택 앞에 차곡차곡 싸놓는다. 부자가 따로 없다. 군불을 지피는 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여유롭고 넉넉한 시간이었다.

새벽에 군불을 지피고 내 방에 들어와서 녹차를 한 잔 한다. 바흐의 음악을 듣는다. 10년 전의 일이다.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결코 부(富)에 있지도 않고 편리에 있지도 않다. 인간의 따스한 정이 숨결처럼 흐르면 된다. 가난해도 좋다.

a 불이 잦아든 다음 자반고등어를 석쇠 올려놓고 구워먹으면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른다. 먹어본 사람만이 그 맛을 알 수 있다.

불이 잦아든 다음 자반고등어를 석쇠 올려놓고 구워먹으면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른다. 먹어본 사람만이 그 맛을 알 수 있다. ⓒ 느릿느릿 박철

가족들끼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화롯불에 인절미를 구워먹는 풍경을 상상하는 것이 옛일이 되고 말았다. 따스한 아랫목이 그립다. 아랫목만 그리운 것이 아니라 지나간 세월도 그립다. 아버지의 기침소리도 그립다. 어머니의 다듬이 방망이질 소리도 그립다.

이제 긴 겨울이 시작될 모양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나누며 옛 생각에 잠겨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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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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