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순택
1895년에 발생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과 이듬해 고종의 아관파천은 우리 근대사의 시작이 얼마나 험난했는지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들이다.
제국주의적 야심으로 가득찼던 열강들은 저마다 한양에 공사관을 세우고 각축전을 벌이며 노골적인 간섭을 일삼았다. 구한말의 혼돈은 1897년 선포된 뒤 불과 10여 년도 견디지 못한 대한제국의 흥망과 궤를 같이 한다. 그리고 그 굴욕의 역사가 집약적으로 펼쳐진 장소가 있으니, 덕수궁을 비롯한 정동 일대다.
덕수궁은 처음부터 비운을 안고 시작했다.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피난 갔던 선조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와 보니 궁궐들이 모두 부서져 기거할 데가 마땅치 않았다. 하여 지금 덕수궁터에 있던 월산대군의 사저를 개보수하여 임시 궁궐로 삼았다.
그리고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한 뒤 창덕궁을 대대적으로 복구, 그곳으로 옮겨가고서 '경운궁'이란 이름을 얻어 명맥을 유지하다가 1896년에서야 크게 재건축되고 덕수궁이란 이름도 갖게 됐다.
일본의 위협과 친일대신들의 압박에 고심하던 고종이, 일본 낭인의 칼에 아내를 잃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해 들어갔다가 나온 뒤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왜 본궁인 경복궁을 놔두고 덕수궁을 선택했는지 헤아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태풍의 눈은 고요하다고 했던가. 미국과 러시아, 영국, 독일 등 열강의 공사관이 에워싸고 있는 덕수궁은 비록 태풍의 눈일지언정 신변의 안전을 꾀할 수 있고, 외교적 줄타기에 기반한 통치행위가 가능할 것이라고 고종은 판단했을 것이다.
실제로 고종은 러일전쟁 발발의 위기상황에서 "대한제국은 엄정 중립국임"을 대외에 천명하는 등 열강의 쟁탈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