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덕수궁에 비가 오락가락하다

노순택의 <사진이 사람에게>

등록 2003.12.04 14:10수정 2003.12.04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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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순택
굴종과 폭력으로 얼룩진 한국 근대사를 들춰보는 일은 오늘의 우리를 한숨 짓게 한다. 그 식민의 근대사가 과거형으로 끝나지 않고, 오늘의 우리를 규정하는 현재성을 지니고 있기에 이런 자괴감은 막을 도리가 없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을 돕는 한국 전투병 파병 문제는 탄식을 넘어 분노마저 자아낸다. 유엔무기사찰단이 진작부터 "없다"고 확인했는데도 기어이 "있다"며 전쟁을 벌인 조지 W. 부시는 왜 세계 시민 앞에 대량살상무기를 내놓지 못하고 있는가.

이제 와서 자신의 입으로 "후세인이 9·11 테러에 관계했다는 명백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고 말하는 그에게 상당수 미국시민들조차 등을 돌리고 있다. 미국과 영국은 개전을 위해 정보를 조작했다는 혐의마저 받고 있는 상태다. 그들은 이미 베트남의 악몽을 떠올릴 만큼 깊은 수렁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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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한국군 수뇌부는 이번 파병이 전투경험을 쌓을 수 있고, 석유자원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라며 "이왕 도울 것 확실하게 돕자"니, 대체 전투경험은 쌓아 뭘 할 것이며, 석유도둑 옆에 붙어 함께 도둑질을 하겠다는 그 고약한 심보는 뭔지 당황스러울 따름이다.

베트남 고엽제 피해자들의 증언이 생생한 이 땅에 이번엔 열화우라늄탄 방사능에 오염돼 신음하는 젊은이들을 만들 셈인가? 대체 무엇을 위해?

미국이 원한다면 간도 쓸개도 내어줄 수 있는 저 철저한 복종심, 세대를 잇는 이 식민의 현재성… 우리의 근현대사는 아픔 투성이다.

비운의 대한제국과 흥망을 함께 한 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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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이 재채기만 해도 서울은 감기 몸살로 앓아 눕고 마는' 따위의 이 고질적 허약 체질 외교는 비단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그 연원을 짚자면야 밑도 끝도 없겠으나, 직접적인 근대 식민의 상처는 1876년(고종 13년)의 강화도 불평등조약을 시발점으로 볼 수 있다. 이때부터 한반도는 일본과 미국, 중국, 러시아 등 열강이 다툼하는 격전의 현장이 아닌 적이 한시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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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에 발생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과 이듬해 고종의 아관파천은 우리 근대사의 시작이 얼마나 험난했는지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들이다.


제국주의적 야심으로 가득찼던 열강들은 저마다 한양에 공사관을 세우고 각축전을 벌이며 노골적인 간섭을 일삼았다. 구한말의 혼돈은 1897년 선포된 뒤 불과 10여 년도 견디지 못한 대한제국의 흥망과 궤를 같이 한다. 그리고 그 굴욕의 역사가 집약적으로 펼쳐진 장소가 있으니, 덕수궁을 비롯한 정동 일대다.

덕수궁은 처음부터 비운을 안고 시작했다.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피난 갔던 선조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와 보니 궁궐들이 모두 부서져 기거할 데가 마땅치 않았다. 하여 지금 덕수궁터에 있던 월산대군의 사저를 개보수하여 임시 궁궐로 삼았다.

그리고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한 뒤 창덕궁을 대대적으로 복구, 그곳으로 옮겨가고서 '경운궁'이란 이름을 얻어 명맥을 유지하다가 1896년에서야 크게 재건축되고 덕수궁이란 이름도 갖게 됐다.

일본의 위협과 친일대신들의 압박에 고심하던 고종이, 일본 낭인의 칼에 아내를 잃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해 들어갔다가 나온 뒤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왜 본궁인 경복궁을 놔두고 덕수궁을 선택했는지 헤아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태풍의 눈은 고요하다고 했던가. 미국과 러시아, 영국, 독일 등 열강의 공사관이 에워싸고 있는 덕수궁은 비록 태풍의 눈일지언정 신변의 안전을 꾀할 수 있고, 외교적 줄타기에 기반한 통치행위가 가능할 것이라고 고종은 판단했을 것이다.

실제로 고종은 러일전쟁 발발의 위기상황에서 "대한제국은 엄정 중립국임"을 대외에 천명하는 등 열강의 쟁탈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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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몸부림도 일본이 러시아를 패퇴시키고 1905년 굴욕적인 '을사늑약(乙巳勒約; 일반적으로 '을사조약'으로 알려져 있으나 '억눌러서 이루어진 조약'이라는 뜻에서 '늑약'이라고도 함...편집자 주)'이 강제되면서 부질없는 짓이 되고 말았다. 비운의 덕수궁은 치욕의 외교문서가 오고간 현장이었다.

1907년 고종은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해 을사늑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대한제국의 주권수호를 호소했지만, 그것이 그를 권좌에서 내모는 빌미가 됐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강탈했던 일본은 정미7조약으로 내정권마저 빼앗고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했다. 이완용을 비롯한 식민 모리배들이 앞장 서 설쳤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1910년 경술국치로 온나라가 통째로 일제의 손아귀에 넘어가면서 조선왕조는 건국된 지 27대 519년만에 망하고 말았다. 덕수궁은 조선왕조 500년의 몰락을 함께 한 비운의 궁궐로 기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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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은 식민의 근현대사를 몸으로 드러낸다

일제는 조선왕조의 상징이기도 했던 덕수궁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1922년 지금의 정동극장에서 경기여고 터로 이어지는 길을 내 덕수궁을 찢어놓은 것도 모자라 많은 시설물을 헐어버린 뒤 학교와 일본식 건물들을 세웠다.

1930년대 덕수궁은 일제의 유원지인 '중앙공원'이기도 했고, 일본 고관들이 묵고 가는 여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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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뒤 1946년 덕수궁 석조전에서는 향후 한반도의 미래를 '강대국끼리' 논의하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1948년에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투표감시단 본부가 이곳을 근거지로 삼았다. 일제 식민지화를 주도한 이들에게도, 백두대간의 허리를 갈라놓은 이들에게도 덕수궁은 말없이 자리를 내어주었다.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덕수궁 주변 땅을 계속 매입해 왔던 미국은 1984년 경기여고가 이사 간 자리를 매입한 뒤 이곳에 15층짜리 대사관 건물과 직원용 아파트 건축을 추진해 오고 있다.

광주를 피로 물들이는 데 미국의 도움을 받았던 전두환 정권이 그깟 옛 궁궐 터쯤 '미국 나으리께서 욕심을 내는데' 문화재보호나 나라의 자존심 따위에 관심을 두었을 턱이 없다.

일제가 세운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경기여고)의 자리는 역대 왕들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제사를 올리던 덕수궁 선원전 자리였다. 1984년 경기여고 터를 미국에 팔지 않았던들 오늘날의 논란과 시련은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래저래 덕수궁은 세대를 잇는 이 식민의 근현대사를 오늘까지 몸으로 보여주는 비운의 궁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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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생, 그것의 닮음

짧았던 대한제국의 흥망을 함께 한 비운의 덕수궁에 감히 비견하랴만, 여기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던 카메라 한 대가 있다. 태어난 지 채 8년이 못돼 회사가 망하면서 생산이 중단돼 버린 국산카메라 1호 '코비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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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비카의 역사는 1967년 박정희의 요청을 받은 당시 전경련회장 이정림(대한양회)이 구로공단에 대한광학을 세운 뒤 1969년 일본 마미야 사와 제휴, 기술협력 형식으로 일부 부품 및 설계도면을 제공받아 '베릭스 35A1'를 생산하면서부터 비롯된다.

대한광학은 1971년 카메라용 렌즈 생산에 성공, 1975년에는 자체기술로써 셔터를 제외한 부품을 완전 국산화하는 데까지 이르러 1976년 고유모델인 '코비카 BC-1'을 생산했다.

1982년 1월 26일치 <한국경제신문>에 따르면 대한광학은 코비카BC-1에 이어 코비카BC-7, 코비카BC-10, 코비카AE-F 등 모두 4종의 카메라를 연간 3만대 정도 생산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광학'이라는 용어조차 낯설던 시대에 카메라의 국산화를 주도했던 대한광학은 범람하는 일제카메라의 압박과 낮은 기술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국내시장마저 잃어버린 채 1983년 도산하고 만다.

35mm 레인지파인더형식에 렌즈셔터를 갖춘 코비카BC-1에는 일본, 독일, 캐나다, 한국까지 무려 4개국의 기술이 합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일본 생산, 일본 라이선스이긴 하나 독일 설계의 '테사 40mm F2.8렌즈'를 장착해 해외 수출을 모색했다고 한다.

옛 카메라이니만큼 대단한 성능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단돈 4만원에 셔터속도와 조리개, 초점을 모두 손으로 조작할 수 있는 '국산 카메라 1호'를 써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리라.

대한제국 비운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덕수궁에서 또한 짧은 생을 마감한 국산카메라 1호 코비카를 들고 파인더를 노려보았을 때 하늘엔 빗방울이 오락가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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