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공부는 그만하고 썰매타고 놀면 안돼?"

박철의 <느릿느릿 이야기>

등록 2003.12.05 16:05수정 2003.12.05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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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아딧줄 네 살 때. 동네 논에서

아딧줄 네 살 때. 동네 논에서 ⓒ 느릿느릿 박철


유년 시절, 내가 가장 잊을 수 없는 추억은 한겨울 썰매를 타던 일이다. 강원도 화천 논미리 내가 살던 집 앞에 큰 개울이 있었는데, 여름이나 겨울이나 하루 종일 개울에 나가 살다시피 했다. 겨울에는 방학을 하기 전부터 썰매를 준비한다.


썰매 종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앉은뱅이 썰매(앉은뱅이 스께)와 외발 썰매였다. 앉은뱅이 썰매는 5-60cm 되는 두 개의 각목 위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널빤지를 나란히 박은 다음 각목에 굵은 철사를 못으로 고정시켜 날을 만들거나, 아니면 대장간에 가서 'ㄱ'자로 된 철주를 쪼개 만든 날을 돈을 주고 사와서 똑같은 방법으로 만든 것이 있다.

외발 썰매는 말 그대로 썰매 날이 하나이다. 철주를 쪼개 만든 날 위에 양발만 올려 놓을 만큼 작게 만든 게 특징이다. 앉은뱅이 썰매가 안정성이 있어 다칠 염려가 없지만, 속도 면에서는 외발 썰매가 훨씬 빠르다. 숙련되면 코너워크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 앉은뱅이 썰매는 돌이 많은 개울에서 타기가 어렵지만 외발 썰매는 작기 때문에 돌 사이를 잘 빠져나갈 수 있다.

썰매를 타려면 꼬챙이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쇠꼬챙이는 주로 소나무나 물푸레나무 가지 끝에 박아서 만든다. 굵은 철사나 쇠꼬챙이를 불에 달구어 나뭇가지 끝에 꽂아 망치로 박는다. 그러면 나무가 타면서 연기가 난다. 그런 다음 얼른 물에 집어넣는다.

썰매나 꼬챙이를 만드는 방법은 과히 어렵지 않다. 내 기억으로는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적도 있지만 거의 내가 만들었다. 나는 겁이 많은 편이어서 외발 썰매보다 주로 앉은뱅이 썰매를 즐겨 탔다. 앉은뱅이 썰매는 앉아서 타지만 외발 썰매는 구부정하게 서서 탄다.

아침밥만 먹고 나면 썰매를 둘러메고 개울로 나간다. 그 시절에는 날씨가 매우 추었다. 늘 콧물을 달고 살아서 옷소매가 반질반질했다. 아침에 일찍 나와 개울 얼음 위에 올라가면 "짱짱"하는 소리가 들린다. 얼음이 팽창해서 생기는 소리이다. 그 소리를 들어본 지 오래되었다.


동네에서 썰매를 타다 시들해지면 개울을 따라 다른 동네로 원정을 가기도 한다. 동네 형들은 주로 외발 썰매를 탔는데 폼이 스키를 타는 동작과 비슷했다. 형들을 따라 다른 동네까지 진출했다가 텃세에 밀려 갑자기 분위가 험악해지면 전속력을 다해 도망쳐 온다. 우리 동네에 도착하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것처럼 형들은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형들 얘기는 대충 이랬다.

a 동네 아이들과 함께 눈썰매장에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눈썰매장에서 ⓒ 느릿느릿 박철

"아까 웃마을 그 새끼말이야, 내가 꼬챙이로 똥구멍을 팍 찌를까 하다 말았어. 다음에 걸리면 국물도 없어. 너희들 봐라. 내가 그 새끼 다음에 만나면 박살낼 거다. 우리 동네 오기만 해봐라 이 새끼들!"


그러면서 형들은 전의를 불사른다.

얼음판에서 팽이치기도 한다. 팽이는 주로 소나무로 만든다. 소나무 가지를 잘라 낫으로 연필 깎듯이 뾰족하게 깎은 다음 적당한 크기로 자른다. 팽이가 있으면 반드시 팽이채가 있어야 한다. 그때 우리집은 화천 논미리 의무중대 앞에서 어머니가 재봉틀 하나로 군복 수선을 해서 먹고 살 때였다.

그러다보니 자질구레한 천 쪼가리는 구하기가 쉬었다. 가느다란 작대기에 천을 고무줄로 묶어 팽이채를 만들었다. 얼음판 위에서 팽이를 손으로 돌려놓고 팽이채를 물에 적셔 팽이를 치면 "딱딱"하는 소리와 함께 팽이가 돌아간다.

팽이치기 시합도 했다. 적당한 시간만큼 팽이채로 팽이를 친 다음 멈추고 나서 누구 팽이가 제일 오래 도는가이다. 나는 공부는 잘 못했지만 팽이는 제법 잘 돌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군복 쪼가리로 만든 팽이채 덕분이었을 것이다.

점심때가 되면 배가 고프다. 아이들이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 감자를 갖고 나온다. 강원도 사람들을 '감자 바위'라고 하지 않던가. 비교적 감자는 흔한 편이었다. 개울가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감자를 구워 먹었다. 감자가 다 익기도 전에 썰매 꼬챙이로 찔러 입에 숯 검댕칠을 해가며 먹는다. 애들 입이 다 새까맣다. 불에 구워 먹는 감자 맛은 기가 막히다.

수시로 모닥불을 피웠다. 썰매를 타다 보면 낮에는 햇볕에 얼음이 살짝 녹아 얼음판이 물이 된다. 그 위에서 놀다 보면 엉덩이가 다 젖는다. 눈이 오는 날이면 옷 전체가 젖기도 한다. 그러면 모닥불을 피워놓은 곳에 달려가 젖은 옷을 말린다. 엉덩이를 말리다 옷을 태워 먹기 일쑤다. 그 당시 옷은 나일론 계통의 옷이 많았다. 불에 약해 방심하면 금방 타고 만다.

그렇게 하루 종일 개울 얼음판 위에서 놀았다. 콧물을 달고 살았지만 감기를 몰랐다. 감기라는 말을 아예 들어보지 못했다. 옷도 넉넉하게 입지 못했고 먹는 것이 부실해도 그럭저럭 잘 놀고 잘 자랐다. 얼굴 볼이나 손발에 동상이 많이 걸렸다. 나는 귀와 발가락에 동상이 걸렸었다. 밤에 잠을 잘 때면 가려워서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한겨울에도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고무신을 신으면 얼음판 위에서 잘 넘어진다. 더러 까만 운동화를 신은 아이들도 있었다. 그런 아이들은 집안 형편이 괜찮은 집 아이들이었다. 나는 운동화를 신은 아이들이 제일 부러웠다.

겨울 방학이 되면 매일 얼음판에 나가 하루 종일 썰매를 타고 집에 돌아와도 "공부 좀 해라"는 말을 듣지 못했다. 요즘 아이들 같으면 공부성화에 견딜 수가 없었을 텐데 그 시절에는 공부와는 담을 쌓고 어떻게 하면 재밌게 놀 수 있을까? 겨울 방학 내내 그 궁리만 하고 지냈다.

a 눈썰매장에서 주희네 가족.

눈썰매장에서 주희네 가족. ⓒ 느릿느릿 박철


아딧줄과 넝쿨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유년 시절을 생각하며 아이들에게 나는 썰매를 만들어 주었다. 마침 동네 논 중에 가을걷이를 마치고 물을 잡아 놓은 논이 있었는데 한겨울이 되자 단단하게 얼었다. 썰매타기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논에 나가 앉은뱅이 썰매를 타고 놀았다. 그런데 썰매 날이 얼음판에 박히고 잘 나가질 않는 것이었다. 썰매 날을 숫돌로 갈아도 마찬가지였다. 이틀만에 이유를 알았다. 썰매날 앞을 스케이트처럼 비스듬하게 해주어야 날이 얼음판에 박히지 않고 잘 나가게 된다.

아딧줄과 넝쿨이가 이제 다 커서 썰매 타러 가자고 하면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눈썰매를 타러 가자고 하면 듣겠지만. 하는 수 없이 늦둥이 은빈이 썰매나 만들어 주어야겠다. 철물점에 가서 조립식 철제를 사와 그 위에 합판을 박으면 된다. 꼬챙이는 제일 굵은 철사를 잘라 나뭇가지에 박으면 된다. 조금도 어렵지 않다.

낼 모레가 대설(大雪)이다. 날씨는 여전히 포근하다. 겨울 날씨가 봄 날씨가 같다. 곧 추워지겠지. 교동은 논배미가 커서 자연 스케이트장 규모가 엄청나게 크다. 돈을 내지 않고도 얼마든지 입장할 수 있다.

앉은뱅이 썰매를 타고 엉덩이가 물에 젖어 모닥불에 말렸던 그 시절이 그립다. 친구들도 그립고 그 시절 모든 것이 그립다. 그리움은 더 진한 그리움을 불러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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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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