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매타기보다 더 재미난 놀이 있을까?

동무들과 썰매 손질하고 창 만들어 썰매 타고 불피워 양말 말리던 추억

등록 2003.12.08 07:42수정 2003.12.08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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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면 눈사람 즐겁습니다. 곧 추워진다는 소식에 얼마나 추위가 기다려졌습니까?
눈이 내리면 눈사람 즐겁습니다. 곧 추워진다는 소식에 얼마나 추위가 기다려졌습니까?김규환

백아산(전남 화순 북면에 있는 산으로 해발 810m. 곡성군, 담양군, 순천시의 경계에 위치한 빨치산의 고장) 자락 골짜기 다섯 마을은 중부내륙지방 만큼이나 겨울이 길었다. 삼한사온이 뚜렷했던 그 땐 왜 그리 춥고 눈이 많이 왔을까?


황금 들녘과 허허 벌판은 삽시간에 이뤄진다. 밀, 보리 파릇파릇 돋아나 학교 가는 신작로마다 쏙쏙 고개를 내밀고 올라오는 싹은 눈이 많이 와서 포근한 이불을 덮어주면 더 잘 자랐다.

추위와 서릿발에 못 이겨 새싹이 누렇게 타서 움츠러들면 동무들은 겨울철 놀이 찾기에 바쁘다. 꼴 베러 다니고 나뭇짐 지고 다니느라 키 클 새가 없었던 산골 아이들에겐 자연과 벗하며 즐기는 놀이가 널려 있었다.

상수리로 구슬치기를 하고 딱지치기하며 놀다 초겨울 들어서는 팽이를 직접 깎고 닥나무 껍질을 벗겨 팽이채를 만들었다. 겨울이 무르익으면 썰매 탈 생각에 소풍 전야와 같은 설렘으로 밤을 보냈다.

밤새 소복이 쌓인 눈 위로 간혹 참새 발자국만 찍혀 있을 뿐 온 천지가 눈이다. 마당을 당그래로 밀고 삽으로 퍼서 바지게에 지고 냇가에 갖다 버리거나 눈덩이를 굴려 마을 앞까지 갖고 나가 눈사람을 만드는 것도 즐거운 소일거리였다.

"형! 오늘은 나무 하로 안 가겠제?"
"몰라…. 일단 아부지께 여쭤 봐야 알제 내가 어떻게 안다냐?"
"글면 얼릉 눈 치우고 썰매 만드까?"


애초엔 외양간과 측간, 사립문 앞에까지 사람 다니는 길만 치우려다 "눈 오는 날은 조리를 만들어라"는 아버지 한 말씀이면 옴짝달싹 못하고 어두침침한 방안에 손가락 마디마디 부르트도록 갇혀 지내야 한다. 그런 날은 부지런을 떨어 서둘러 마당을 치워놓아야 했다. 바빠지기 시작했다.

집집마다 싸리 빗자루, 대빗자루로 눈 쓰느라 매운 헛기침을 해댄다. 때마침 감나무에 걸린 눈덩이가 찬란한 아침 햇살을 받아 머리 위로 툭 떨어진다. 아침밥 먹기 전에 온몸이 두엄 자리에서 나는 김 마냥 땀에 절고 김이 펄펄 날린다.


옆집 병문이와 승호, 해섭이에게 창대를 찌러 가자고 해 놓고선 아침 나절에만 복조리를 만들었다. 일손이 잡힐 리 없다.

"그만 맹글어라."

양지마을 꼬마들은 뒷골 산으로 조림한 지 서너 해 되는, 창 감으로 좋은 곧은 리기다 소나무를 가지만 따 버리고 각자 너덧 개씩 들고 내려온다. 준비해 간 비닐 부대를 타고 눈 위를 미끄러져 내려오니 옷이 흥건하다.

솔방울 가시가 더덕더덕 붙어 손을 찔러대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허리춤 길이의 칼자루만한 두꺼운 쪽에 연장 통에서 제일 큰 못을 찾아 박는다. 생나무여도 벌어지기 일쑤니 미리 철사를 두 번 둘둘 감아 오그리고 망치로 두들기고 껍질을 벗긴다.

이어 못대가리를 치는 순서다. 큼지막한 돌 위에 못대가리를 놓고 요리조리 돌려가며 백 번을 넘게 쳐 대니 못 끝이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형제 자매 식구 수대로 두 개씩을 만들었다. 박힌 못을 망치로 몇 번 두들겨 날렵하게 한 뒤 돌 위에 문질러 주면 썰매 창이 완성된다.

썰매는 우리만 아는 뒤뜰 창고에 고이 모셔져 있다. 벌써 몇 해째 탔던 터라 닳을대로 닳았지만 양 귀퉁이에 작은 못을 박아 오므려 고정하면 올 한 해는 끄덕 없다. 구해 둔 생선 상자 판자를 썰어 덧대고 바닥을 고쳐 나갔다. 마당 흙 위에 썰매를 문질러 철사 녹을 벗겨내고 마루 밑에 넣어 뒀다.

대지는 하얀 솜이불을 덮어 놓아 포근하다. 이엉 위에 용마루를 올린 초가지붕 처마를 타고 눈이 녹아 내리더니 해질녘 고드름이 주렁주렁 열렸다. 제법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옳거니! 드디어 추워지기 시작하는구나.'

남자 아이들은 가을걷이 이후 물을 뺀 보를 다시 막을 준비를 한다. 어둑해지기를 기다리면 어른들 발길이 뜸해진다. 짚 서너 다발을 표나지 않게 훔쳐다가 풀지 않고 바닥에 깐다. 평소에 들기 힘든 큼지막한 돌을 조심히 몇 개 올리고 잔돌을 물이 차기 전에 무수히 던져 떠내려가지 않게 한다.

"병문아! 니기집 가서 소금 좀 한 바가지 퍼와라."
"뭣 땜시?"
"얼기 시작하는 얼음 위에다 왕소금을 뿌리면 더 꽁꽁 언당께."

물이 차 오름에 따라 얼음 알갱이가 엉키기 시작했다. 낮은 곳은 한 자(尺 30.3cm)나 높아지니 80여 미터나 되는 긴 냇가가 날이 새면 봄까지는 우리들 놀이터다. 소금을 뿌려주고 집으로 가니 '어딜 그리 쏘다니냐?'며 야단이시다. 꿍꿍이를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다.

몰래 짚다발을 훔쳐다가 해질녘 보를 막아 썰매타기 좋게 합니다.
몰래 짚다발을 훔쳐다가 해질녘 보를 막아 썰매타기 좋게 합니다.김용철

매서운 칼바람 부는 아침, 밥도 먹지 않고 빨치산 복장을 갖춘 아이들이 떼로 몰려나온다. 양말 두 켤레에 벙어리 장갑과 면 장갑, 토끼털로 귀를 막고 목엔 언니들 목도리를 칭칭 감았다. 올 굵은 실로 짠 빵 모자를 눌러 썼으니 영락없는 거지다.

밤새 마른 눈이 얼음 위에 쌓여 바람에 날린다. 살금살금 한 발을 디뎌보니 얼음 쫙쫙 갈라지는 소리가 났지만 몇 걸음 더 옮겨봐도 아무 이상이 없다. 안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빗자루 들고 나올 시간도 아까워 지푸라기와 풀을 뜯어 쓸고 썰매 위에 올라선다.

여자 아이들은 널찍하게 만든 썰매 위에 행감을 치거나 무릎을 꿇고 앉아 짧은 창으로 툭툭 찍어대도 엉덩이 무게에 앞으로 잘 나아가질 못한다.

남자들 썰매는 다르다. 조막만한 발을 간신히 작은 썰매 위에 걸쳐 올리고는 꼿꼿이 서서 긴 창을 연신 찍어대면 스키 타는 맛이다. 세상에 가장 질이 좋은 첫얼음, 살얼음판에서 타는 썰매는 아무 잡음 없이 씽씽 바람만 귀때기를 스쳐 발갛게 물들일 뿐 걷힐 것이 없다.

썰매는 쇠 젓가락 굵기의 얇고 가벼운 철사를 바닥에 고정하여 평형만 맞춰 날렵하게 만들어야 한다. 길만 잘 들이면 이보다 나은 게 없다. 철근으로 만들면 길들이기도 힘들거니와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다.

"야야…. 비켜!"
"어어~."
"꽈당!"
"옵빠. 엉엉."

앉아서 타는 사람만 내동댕이쳐질 뿐 서서 일어섰다 앉았다 반복하며 힘껏 굴려 쏜살같이 달리는 남자애들은 도랑 가에 손을 짚거나 창으로 얼음을 찔러 제 몸을 추스릴 수 있다. 빠른 속도로 끝 부분에 다다라 사뿐히 방향 전환을 자유자재로 한다. 급제동의 짜릿함을 만끽하기는 눈썰매와 논에 물을 대서 타는 맛과 비교할 수 없다.

폭이 10m도 안 되는 좁은 냇가에 마흔 명이나 타니 마치 서울 거리에 차 사이로 곡예 하듯 빠져나가는 오토바이를 닮았다. 그래도 누구 하나 창끝에 찔리는 경우는 없었다. 바깥 소식을 들었던 몇 형들은 대나무를 쪼개 불에 구워 오그려 활강 스케이트 모양을 만들어 타기도 한다.

응달진 냇가에서 한 시간여 지나니 겨드랑이에서는 땀이 났지만 노출된 곳은 곱아오고 살을 에는 듯한다.

"아따 춥다. 누구 성냥 안 갖관냐?"
"성, 왜?"
"건너편에다 불 좀 피워봐야."
"글다 불나면 어쩔라고…."

살얼음판에서 썰매타는 기분 최곱니다. 이런 좋은 경험을 가진 우린 행복합니다. 며칠 있다 아이들 손 잡고 산정호수에라도 다녀와야겠습니다.
살얼음판에서 썰매타는 기분 최곱니다. 이런 좋은 경험을 가진 우린 행복합니다. 며칠 있다 아이들 손 잡고 산정호수에라도 다녀와야겠습니다.김용철

가깝고 멋모르는 아이가 사각 화랑 통성냥을 통째 가져와 건너편 논두렁 언덕 밑에 불을 지핀다. 고무신에 나일론 양말을 두 겹으로 껴 신었지만 소용없다. 하나 둘 몰려와 잠깐 쬐고 간다는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고무와 나일론 타는 냄새가 날 지경으로 불을 그리워한다.

얼음 위에서 내려다본 물 속은 온갖 물고기 떼가 요리조리 놀란 눈으로 떼지어 다닌다. 얼마를 탔을까? 첫 얼음이라 얼음에 금이 많이 가 있고 낭창낭창 늘어져 푹 꺼진 데가 더러 있다. 높이가 현저히 낮아진 움푹 들어간 곳을 지날 때면 거의 바닥에 닿을 듯 하지만 그 재미를 아는 터라 그리만 몰려들었다.

아침 밥 먹고 와서 다시 타고 해질녘까지 썰매타기는 계속되었다. 집에 돌아와서 양말을 벗어보니 쥐구멍보다 크게 뻥 뚫려 있었다. 어머니께 몇 번이나 야단을 맞을까 몰래 행랑채 쇠죽 쑤던 아궁이에 밀어 넣고 방으로 들어갔다. '내일 또 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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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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