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6가 평화시장 입구 계단 앞에선 아직 이런 물건을 팝니다.김규환
당시 동네 꼬마 녀석들은 흥겨울 때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란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툭 튀어나와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즐겨 불렀다. 오십 줄을 넘긴 형님들이 군대가서 불렀다는 이 노래를 30대 후반인 내가 알고 있다며 핀잔을 들었던 적이 며칠 전의 일이다. 여성을 비하한 상스런 노랫말이 들어 있는 이 노래를 굳이 들춰낸 까닭이 있다.
인천은 성냥공장
한때 가발, 섬유산업과 함께 대한민국 근대 산업을 일으켰던 선구자 역할을 했던 성냥산업과 여기에 종사했던 여성 근로자의 애환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1886년 인천에 첫 성냥공장이 생겨났고 1917년 10월에 자본금 50만원(圓)으로 국내 최대 규모의 조선인촌회사(朝鮮燐寸會社)가 문을 열었다. 동구 금창동 피카디리 극장 자리 2000여평터에 자리잡고 '우록표' '쌍원표' 제품을 생산한 이 회사는 한때 고용인원이 여자 300여명, 남자 100여명이 넘었다.
하루 평균 2만7천 타, 연간 생산 능력은 7만 상자로 국내 생산 능력이 당시 국내 성냥 소비량의 20%를 차지할 만큼 성업이었다. 요즘 포철이나 현대자동차를 산업 시찰하는 것처럼 서울이나 지방 학생들이 이 공장을 견학하는 것을 수학 여행의 코스로 삼았을 정도였다.
노래처럼 인천에는 성냥공장도 있었고 거기서 일하는 성냥공장 아가씨도 분명 있었다. 성냥 제조업은 인천의 산업을 일으킨 불씨였다. 개항 후 외국인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자 생활 필수품인 성냥 수요가 급증했다.
1920~1930년대 인천에 있는 성냥공장들의 생산력은 우리 나라 성냥의 70% 이상을 차지하기도 했고 일부는 중국에 수출하기도 했다. 이처럼 인천에서 성냥 산업이 발달한 것은 목재, 유황 같은 원자재 수입이 용이했을 뿐만 아니라 개항이 되면서 전국 각지 사람들이 모여들어 노동력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또한 타 지역에 비해 전력 사정이 비교적 좋았다는 점도 작용했다.
그 당시 성냥제조업은 노동집약적인 산업이었다. 성냥개비에 인을 붙이거나 성냥을 곽에 넣는 작업은 일일이 사람 손에 의존했다. 성냥공장이 자리한 동네에는 재료를 받아 밀가루 풀칠을 해서 성냥갑을 만드는 가내수공업도 번창했다. 공터나 골목어귀에는 햇볕에 말리기 위해 널어놓은 성냥개비와 성냥갑이 지천이었다고 한다.
공장 주변의 500여 가구가 성냥갑을 만드는 일로 생계를 이어갈 정도로 한 때 금곡리는 '성냥촌'을 방불케 했다. 정미소에서 돌을 고르던 일밖에 없었던 때인지라 성냥 공장은 여성 고용 창출에 한몫 했으나 고용환경은 극도로 나빴다. <인천시사>에 따르면 여직공들은 1만 개의 성냥개비를 붙여야 60전을 손에 쥘 수 있었는데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13시간에 달할 정도였다.